ANMELDEN외출을 앞두고 전신 거울 앞에 선 신민아는 신경질적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몇 년 전, 한결과 함께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할 때 입었던 화사한 플로럴 원피스였다.
당시에는 영상 속에서 그녀의 눈부신 젊음과 어우러져 찬사를 받았던 옷이지만,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그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얇은 쉬폰 소재는 잦은 세탁으로 보풀이 일고 윤기를 잃었으며, 허리선에 잡힌 주름은 낡은 티를 내고 있었다.
단순히 예쁜 옷을 입지 못해서가 아니다.
존재 자체가 초라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버린 듯한 그 지독한 위축감.
민아는 자신의 뽀얀 살결 위로 반지하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날까 두려워, 아침부터 몇 번이나 바디워시를 짜내어 문질러 씻었다.
하지만 아무리 향수를 뿌려대도, 피부 모공 깊숙한 곳에서부터 가난의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한결아. 우리 진짜… 그냥 가지 말까?"
민아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오늘 아침부터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장염이라고 핑계 대면 진우네도 이해해 줄 텐데……."
구차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민아는 어떻게든 이 외출을 피하고 싶었다.
대학 시절, 그들과 몰려다니며 누구보다 빛났던 것은 자신과 한결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진우와 서연 부부를 보며, 속으로는 '청춘을 낭비한다'며 묘한 우월감마저 느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입장이 완벽하게 역전되어 버렸다.
낡은 운동화 끈을 매고 있던 한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의 턱관절이 뻣뻣하게 굳어지며 볼우물이 깊게 파였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무슨 죄지었어?"
한결이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짙은 열등감과 불안감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진우 그 자식, 대기업 좀 들어갔다고 벌써부터 유세 떠는 거 짜증 나서라도 가야 해. 우리가 뭐 돈 빌려 달라고 가는 것도 아니고, 축하해 주러 가는 건데 왜 기죽고 그래? 당당하게 다녀오자. 어깨 펴."
그의 말은 민아를 향한 위로가 아니었다.
철저히 부서져 내리기 일보 직전인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한, 스스로를 향한 필사적인 방어기제였다.
민아는 한결의 그 위태로운 허세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강남 한복판에 우뚝 솟은 신축 고급 아파트 단지.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두 사람의 이마에는 끈적한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반지하 월세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전해져왔다.
압도적인 자본이 뿜어내는 위압감.
단지 내 조경은 미술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마저 여유로웠다.
아득하게 높은 층수를 향해 솟구치는 엘리베이터 안.
투명한 유리 너머로 멀어지는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민아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낡은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머! 민아야! 한결 오빠! 어서 와!"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서연이었다.
"오랜만이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길 찾기 안 힘들었냐?"
뒤이어 진우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진우와 서연 부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공한 30대'의 표본 그 자체였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음에도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귀티와 여유.
"안녕… 초대해 줘서 고마워. 집 진짜 좋다."
민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민아는 순간 자신의 몸에서 반지하 냄새가 날까 두려워, 반사적으로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으며 옷깃을 굳게 여몄다.
"야, 뭐 이렇게 큰 집을 샀냐? 둘이 살기엔 너무 넓은 거 아니야? 하하하!"
한결은 부러움과 비참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들어와, 들어와. 편하게 있어. 음식 다 세팅해 놨어."
진우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거실은 두 사람의 멘탈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창 너머로는 서울 시내가 발아래로 굽어보이는 아찔한 시티뷰가 펼쳐져 있었다.
과거, 그들의 유튜버 시절 영상을 보며 부러움에 찬 댓글을 달았던 진우와 서연.
지금 두 부부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대한 계급의 단층이 적나라하게 시각화되어 있었다.
"자자, 일단 건배부터 하자. 너희들 온다고 특별히 내가 아끼는 와인 꺼냈어."
서연이 유려한 솜씨로 크리스탈 와인잔에 진붉은 액체를 따랐다.
"와인 맛은 잘 모르지만… 축하한다, 야. 진짜 멋지게 해놨네."
한결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피를 토하듯 쥐어짜 낸 진심 없는 축하.
서연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 마찰음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한 모금 넘긴 최고급 레드 와인의 맛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들이 해외에서 여행하며 마셨던 어떤 와인보다 맛있었다.
"너희 여행은 즐거웠어?"
서연이 샐러드를 포크로 가볍게 찍으며 물었다.
"유튜브 보니까 진짜 부럽더라. 우린 그 좁은 고시원에서 취업 준비하느라 20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맨날 삼각김밥만 씹으면서 밤새웠잖아, 우리."
그 순간, 거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서연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20대의 쾌락과 자유를 유예하고 미래의 안락함을 쟁취했다.
반면 한결과 민아는 20대의 찬란함을 영원할 것처럼 낭비해 버렸고, 그 대가로 반지하의 곰팡이와 지독한 가난을 얻었다.
"……."
한결의 얼굴에서 억지웃음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며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탁자 밑에 놓인 그의 주먹이 핏줄이 터질 듯 하얗게 쥐어졌다.
"아… 응. 뭐… 젊을 때 아니면 언제 그렇게 놀아보겠어."
민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애써 분위기를 무마하려 허공을 헤매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잔인하고 적나라한 평가.
한때 영원을 맹세하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두 사람의 20대.
지중해의 코발트블루 바다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눴던 그 찬란한 사랑과 농밀했던 교성들은, 이 차갑고 거대한 대리석 성벽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전락해 버렸다.
오태환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상석에 앉아 있는 백 영감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그가 내려놓은 노트북 모니터 위에는 스위스 비밀계좌의 최상위 마스터 권한 승인 화면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떠 있었다.신민아가 새벽에 넘겨준 코드가 작동한 결과였다.“영감님,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스위스 계좌의 비자금 마스터 권한, 방금 제 손으로 완전히 회수했습니다.”백 영감의 흐린 눈동자가 화면 속 거액의 숫자를 천천히 훑어내렸다.서슬 퍼렇던 노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역시 오 사장이야. 손발이 굼뜬 것들과는 일하는 격이 달라.”오태환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리며 차갑게 덧붙였다.“윤 실장 그 계집이 제 가족 계좌로 돈을 빼돌리며 시간을 끌던 이유가 바로 이 마스터 권한을 가로채려던 수작이었습니다. 청소부 놈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자신이 독차지하려 했던 것이죠.”오태환의 한마디에 윤은선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완전히 확정되었다.백 영감의 손짓 한 번에, 방 구석을 지키던 거구의 사내들이 주저 없이 안쪽 철문을 열어젖혔다.“끌고 와라.”사내들의 거친 손길에 질질 끌려 들어온 윤은선이 차가운 바닥 위로 내팽개쳐졌다.사내들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거칠게 찢어발기듯 벗겨냈다.단추가 뜯겨 나가고 속옷이 찢겨 나가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이 차가운 바닥 위로 적나라하게 내던져졌다.사내들은 그녀의 양팔을 등 뒤로 꺾어 밧줄로 단단히 결박했다.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짓눌렀다.방 안을 둘러싼 대여섯 명의 거구의 사내들이 차가운 눈빛으로 벌거벗은 윤은선의 나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언제나 도도했던 오태환의 비서 윤은선.한 때는 함께 비자금 세탁의 판을 설계하고 공로를 나누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되는 오태환의 가학적인 변태 행위로 인해 신물이 났고, 결국 오태환을 떠났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남편이 받아오는
새벽의 적막이 낡은 여관방 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창밖을 때리던 거친 빗줄기는 어느덧 완전히 잦아들어 있었다.침대 위, 한결은 극도의 긴장감과 치열했던 정사로 완전히 지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르고 깊은 남편의 숨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낮게 울렸다.한결의 묵직한 팔에 안겨 누워 있던 민아는 가만히 눈을 떴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민아의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남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자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내의 온기였지만, 민아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머릿속에는 오태환의 문자가 낙인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다.'비자금 마스터 코드만 알려줘. 그 다음엔 내가 다 알아서 할게.'민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한결의 팔을 들어 올렸다.한결이 미세하게 뒤척였지만, 깊은 피로 탓인지 깨어나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민아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침대 밑으로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삐걱거리는 낡은 장판 바닥을 딛고, 방구석에 놓인 한결의 노트북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바닥에 놓인 노트북은 대기 모드로 화면이 꺼져 있었다.민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살짝 건드렸다.어두웠던 화면이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켜졌다.한결이 스위스 계좌에 접속해 작업하던 화면과, 그 옆에 열려 있던 작은 텍스트 메모장이 화면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Master Routing Key: SW-8849-XXXX][Backup Recovery Code: 9942-0184-XXXX]스위스 비밀 계좌에 묶여 있는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한결이 자신의 목숨줄처럼 쥐고 있던 최고 관리자 마스터 코드였다.민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에 한결이 깰까 두려워, 코드를 한 글자씩 문자 입력창에 직접 적어 넣었다.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숨기는 거라니… 내가 오빠한테 뭘 숨겨?”민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러나 떨리는 목소리 끝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한결은 민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화장실에서 한참 동안 안 나오고 있었잖아. 얼굴도 사색이 되어 있고.”“그냥… 배가 좀 아파서 그랬어.”민아가 아랫배를 감싸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봐. 아까 잡힐 뻔했던 순간만 생각하면 온몸이 덜덜 떨려서….”민아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거짓말이었지만, 쫓기는 삶에 대한 피로와 공포만큼은 진실이었다.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는 아내의 모습을 보자, 한결의 날카로웠던 눈빛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미안해, 민아야… 내가 예민했어.”한결은 민아를 와락 끌어안았다.자신이 아내를 지나치게 몰아세웠다는 죄책감과 함께, 아내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한결의 거친 숨결이 민아의 귓가를 스쳤다.그는 민아의 얼굴을 감싸 쥐고 타는 듯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읍…!”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민아가 제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온전히 소유하고 묶어두려는 본능적인 집착이 담긴 키스였다.한결의 혀가 민아의 입안을 집요하게 헤집고 파고들었다.민아는 거부하지 못한 채 한결의 옷자락을 쥐었다.오히려 오태환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섹스가 더 그리웠다. 한결과 몸을 섞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거부한다면 남편은 자신을 더욱 의심하게 될 터였다. 한결은 민아를 침대 위로 거칠게 밀어 눕혔다.민아는 그의 행위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침대 위에 허물어졌다.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와 함께 민아의 헐렁한 상의가 거칠게 말려 올라갔다.한결은 민아의 브래지어를 위로 밀어 올리고 그녀의 풍만한 유방에 얼굴을 묻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민아의 몸은 한결에게 흥분제와 같았다. 그의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한결은 민아
새로 구한 외곽의 낡은 여관방.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아래, 눅눅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한결은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고 창문 커튼을 굳게 닫았다.“여기도 오래 머물기는 힘들어. 하지만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버틸 수 있을 거야.”한결이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노트북을 펼쳤다.민아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남편의 등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눈을 돌려 방 안을 한 바퀴 둘러 보았다. 벽지 모서리가 뜯겨 나가고 곰팡이가 슬어 있는 허름한 방 안의 공기가 숨통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민아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빠… 좀 좋은 데로 가도 되지 않을까...""무슨 소리야, 좋은 숙소는 도시 대로변으로 가야하는데, 그럼 놈들한테 금방 들킬거야. 좀 안좋아도 이런 데가 안전해."눈도 마주치지 않고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는 한결을 바라보며 민아가 물었다.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키보드를 두드리려던 한결의 손끝이 멈칫했다.민아가 메마른 숨을 들이쉬며 절망 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언제까지 이렇게 쫓기면서… 이렇게 위태롭게 지내야 하는 건데? 정말 끝이 있기는 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었다.한결은 뒤를 돌아보며 민아의 곁으로 다가왔다.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민아의 차가운 어깨를 감싸 안았다.“조금만 더 버티자, 민아야. 자금만 우리 쪽으로 완전히 묶어두면, 이 지옥도 다 끝나. 내가 너 다시는 이런 초라한 곳에서 도망자 신세로 살게 하지 않을게.”한결의 목소리는 결연했지만, 민아의 귀에는 그 약속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질 뿐이었다."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이 그 돈을 포기할거 같아? 우리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치면 지구 끝까지 쫓아오겠지. 오빤 그런 생각 안해봤어?"한결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 했다. 민아도 오태환의 문자를 받기
오태환과 윤은선이 머물고 있는 강남의 비밀 안가 거실.어두운 조명 아래 시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윤은선은 오태환의 표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장님, 신민아가 과연 그 문자 한 통에 흔들려 사장님께 연락을 해오겠습니까?”소파에 깊숙이 묻혀 있던 오태환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윤 실장, 벼랑 끝에 선 인간을 길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오태환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시가를 툭툭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슬쩍 밀어서 바다에 빠뜨린 다음에 허우적거릴 때, 밧줄을 던져주는 거다. 놈이 죽기 직전일 때 내가 살려준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거지.”윤은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작전을 바꾼다는 말씀이십니까?”“신민아는 지금 불안할 거다. 정재계 인사들이 모아놓은 비자금을 동결시켜놓고 안전하리라 생각하는게 이상한거지. 강한결이 아무리 똑똑한척 해봤자 제 꾀에 넘어지게 될거야.”오태환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뱀 같은 광기가 번뜩였다.“곧 백 영감한테서 핸드폰 위치 추적 결과가 올거야. 이제부터 윤 실장 넌 사람들 풀어서 위치 주변을 압박해라. 단, 내가 지정하는 경로만 슬쩍 비워두고 수색을 진행하는 거야.”윤은선은 오태환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태환이 직접 신민아에게 수색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대피로를 흘려줄 작정이었다.그 정보를 따라 위기를 넘기는 순간, 신민아의 머릿속에는 강한결이 아닌 오태환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지시대로 움직이겠습니다.”윤은선이 고개를 숙이자, 오태환은 미소를 지으며 민아의 대포폰 번호를 다시 화면에 띄웠다.같은 시각, 강한결과 신민아가 머물고 있는 서울 외곽의 낡은 민박집.한결은 침대 바닥에 켜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옆에서 옷가지를 정리하던 민아의 시선이 한결의 노트북으로 향했다.“오빠, 스위스 계좌 자금은 어떻게 되는 거야?”한결이 민아를 돌아보며 안
윤은선을 필두로 정보망을 총동원하던 무리들은 전혀 단서가 잡히지 않자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때 윤은선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싸늘한 느낌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여보세요?"대답이 없던 상대는 한숨부터 쉬고 말을 했다. "후우... 오랜만이네, 윤 실장."상대는 놀랍게도 오태환 사장이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다 윤 실장 덕분이지. 내가 감옥에 간 것도, 감옥에서 나온 것도. 큭큭큭."기분 나쁜 웃음에 윤은선이 전화를 끊으려하자 오태환 사장이 말을 이었다. "백 영감이 윤 실장을 끝장내서라도 계좌에 있는 돈을 꼭 찾아오라고 날 풀어주던데... 어떻게, 돈은 찾았나?""고, 곧 찾을 겁니다. 지금 안그래도..."오태환이 말을 끊었다. "불가능하겠지. 맘 먹고 숨어버린 녀석들을 찾아낸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그, 그럼 어떻게…?”“놈들이 제 발로 걸어 나오게 만들어야지. 일단 넌 지금 주소 하나 보내줄테니까 그쪽으로 와라.”오태환의 목소리에 서늘한 가학성이 감돌았다.윤은선이 당황하여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휴대폰 화면으로 또 전화 신호가 들어왔다.백 영감의 전용 번호였다.“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윤은선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백 영감의 전화로 연결을 전환했다.“영, 영감님…”“오태환이가 나온 건 들었겠지.”백 영감의 쉰 목소리가 귓전을 긁었다.“네… 방금 전화를 받았습니다.”“이제 오태환이를 도와서 그 돈 반드시 찾아와라.”백 영감이 차갑게 덧붙였다.“돈만 찾아온다면, 네년 목숨과 네 가족은 살려주마.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때는 네 자식놈부터 끝장낼 줄 알아!”“네! 명심하겠습니다, 영감님! 무조건 돈을 찾아오겠습니다!”윤은선은 안도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백 영감의 보복을 피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또 오태환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 될게 뻔했다. 전화가 끊긴 뒤, 윤은선은 오태환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탈진할 듯한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 엉켜 누웠다.천장에서는 녹슨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미지근한 바람을 아래로 토해내고 있었다.땀방울이 맺힌 가슴을 오르내리며 숨을 고르던 민아는, 한결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듯 동그라미를 그렸다."오빠...""응.""나, 오빠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냥 우리 한국 가지 말고 평생 여기서 이렇게 살까?"나른한 쾌감에 젖어 속삭이는 민아의 목소리.한결은 민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땀에 젖은
그녀의 애타는 요청에, 한결은 허리에 힘을 주어 단번에 그녀의 좁고 뜨거운 질 내벽을 가르고 들어갔다."아앙! 흣... 으응...""하아... 젠장, 너무 조여... 민아야..."빈틈없이 맞물린 점막의 마찰.뜨겁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빈틈없이 채워지는 감각에 두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처녀는 아니었지만, 이 완벽한 감정적 교류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강렬했다.한결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깊숙이 박아 넣었다가 끝까지 빼내는 느릿하고 진득한 피스톤 질.그때마다 민아의 좁은
코발트블루.끝을 알 수 없이 깊고 푸른 에게해가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다.그리스 산토리니,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듯한 최고급 풀빌라의 테라스.하얗게 칠해진 외벽은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났고, 불어오는 해풍은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여유를 품고 있었다."자,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드디어 저희가 벼르고 벼르던 산토리니의 하이라이트, 선셋을 보러 왔습니다! 한결 오빠가 무리해서 예약한 보람이 있네요!"카메라 렌즈를 향해 활짝 웃는 신민아의 미소는 지중해의 태양보다 눈부셨다.하얀 비키니 위로 가볍게 걸친 얇은 리넨
귀국 후 3개월이라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다.꿈만 같던 여행지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지만, 곰팡내 나는 반지하에서의 현실의 시계는 지옥처럼 느리면서도 잔인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돌아갔다.형광등을 켜도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 오직 창백한 노트북 모니터 불빛만이 수염도 깎지 못한 한결의 퀭하고 초췌한 얼굴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새로고침을 누른 화면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이 떠 있었다.[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번 채용에서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