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 대표님!”
“오셨습니까?”허기찬과 선우현을 비롯한 XX당 관계자들이 하나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천천히 차준호에게로 다가섰다.
자신의 죽음마저 아득하게 비웃던 이 남자가, 이제 내가 벌여놓은 정황의 전장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
“회사 안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회장님하고 한남동이라도 가시지.”
“신하늘 밥 안 먹었을 거 아니야.”이 와중에 밥 타령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가 몰고 온 보좌 인력들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팩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싱그러운 과일과 정갈한 고급 한정식 도시락, 그리고 세련된 디저트까지.
이 남자는 늘 이랬다. 자신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은 방관하면서도, 언제나 내 끼니와 안위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람 마음을
“어! 대표님!”“오셨습니까?”허기찬과 선우현을 비롯한 XX당 관계자들이 하나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 역시 천천히 차준호에게로 다가섰다.자신의 죽음마저 아득하게 비웃던 이 남자가, 이제 내가 벌여놓은 정황의 전장 속으로 깊숙이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회사 안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회장님하고 한남동이라도 가시지.”“신하늘 밥 안 먹었을 거 아니야.”이 와중에 밥 타령이라니.그러고 보니 그가 몰고 온 보좌 인력들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팩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싱그러운 과일과 정갈한 고급 한정식 도시락, 그리고 세련된 디저트까지.이 남자는 늘 이랬다. 자신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은 방관하면서도, 언제나 내 끼니와 안위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사람 마음을 이토록 심란하게 어지럽혀 놓고서.“대표님, 저랑 잠깐 옥상에서 이야기 좀 나눠요.”어쨌든 나를 아끼는 그 지독한 마음을 이용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는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꽉 감싸 쥐었다.“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그가 잡아끄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이 굳어있던 내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었다.***서울의 밤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으나, 그 속살은 지독하게 건조하고 냉혹했다.옥상 위, 나는 차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득한 허공을 응시했다. 봄의 초입이라기엔 너무도 예리한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베고 지나갔다.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빛이 차갑게 일렁였
세종동의 좁은 골목 초입, 최기범이 공들여 준비한 그곳에 다다랐을 때 도시에는 서서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그러나 건물 내부는 마치 쇳물을 부어 넣는 주물공장처럼 열기와 긴장감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모양새였다.일반 직장인들에게는 퇴근길에 접어들 시간이었지만, 이곳엔 당에서 파견한 정예 인력이 즉각 투입되어 사무실은 흡사 거대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벽면에는 내 얼굴과 기호가 큼지막하게 박힌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거 공약서와 홍보 인쇄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다섯 대의 유선 전화기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울려 댔고, 벽면 데스크에 늘어선 봉사자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팽팽한 치열함 속의 총격음처럼 귀를 때렸다.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전의 내게 선거일이란 그저 빨간 날로 표시된 공휴일일 뿐이었고, 거실 소파에 누워 개표 방송을 게임하듯 들여다보던 게 전부였다.하지만 이것이 진짜 정치판의 민낯이자,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의 서막이었다.사무실 한쪽, 당에서 파견된 선거 전략 전문가 이승은 선대위원장이 지역구 지도 한 장을 거창하게 펼쳐 놓으며 나를 불러세웠다.“신 후보님, 개표 방송 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후보님 가슴에 당선 무궁화꽃이 달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판을 짜겠습니다!”내가 직접 벌인 판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절로 기가 찼다.“역시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그럼요. 오래 사셔서 국회에도 아주 길게 머물러 주셔야죠.”내가 오래오래 살아가는 그 길에 반드시 차준호라는 남자도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데.그 지독하고 오만한 성격상 절대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차준호의 귓가에는 차진철 회장과 강진욱 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닿지 않았다.아버지에게 자신의 시한부 비밀이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나,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났을 진실이었다.그보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자신을 수술대로 떠밀려는 신하늘의 기특하고도 처연한 간절함이었다.차준호가 여전히 생명에 초연한 채 딴생각에 잠겨 있자, 차진철 회장은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장 이식 수술 날짜부터 잡아! 진아와 고 여사에게는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테니! 조직적합성까지 맞다는데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아니면 강소희라도 끌어들이든가! 해준다고 할 때 받아! 받아들이란 말이다!”차준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무엇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온통 신하늘뿐이었다. 밥은 제때 챙겨 먹었는지, 저 험악하고 어수선한 선거판 한가운데에서 위축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조급해진 차준호는 말 한마디마다 서늘한 독을 품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아버지, 소희는 배우이고 현재 임신 중입니다. 진아 이야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고요. 타인의 피를 짜내 연명하느니, 차라리 우아하게 말라죽겠습니다. 사람 목숨, 그리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그러자 차진철 회장 역시 벼락같이 일어나 차준호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았다.“네 어미도 그렇게 금방 죽었다! 다들 내 곁을 그리 황망하게 떠나 버렸는데······ 너마저 이러면······ 나는 대체 어쩌라고·····&m
병원 복도에는 하얀 소독약 냄새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맴돌며, 마치 유령의 숨결처럼 서늘하게 피부를 핥고 지나갔다.차진철 회장의 눈빛에는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것은 듣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을 터뜨려 버린 나를 향한 원망이자, 무너진 자존심이 내뿜는 독기였다.“신 비서, 선거로 바쁜 몸일 텐데 남의 집안일에 유난 떨지 말고 어서 돌아가!”피 끓는 아비의 절박함인 동시에, 무너져 내린 위엄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화풀이였을지언정 난 반발하지 않았다.오한이 서릴 정도의 무시와 멸시를 해도 차준호만 살릴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차 대표는 절대로 이식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큰일이야, 신 비서. 제발 살려줘.]고미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잔인한 진실이 귓가를 울렸다.그렇기에 나는 차진철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끌어들여 그를 강제로 벼랑 끝에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제가 무모했습니다, 회장님. 이런 방식으로 알려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이기적인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대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나의 처연한 사죄에 차진철은 짓눌린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몸을 돌려 서늘한 복도 너머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신하늘, 같이 가. 기다려.”거칠고도 단단한 악력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돌아본 곳에는 여전히 오만한 가면을 쓰고 있는 차준호가 서 있었다.늘 모든 것에 초연하고 아득한 거리를 두던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사정
차진철 회장의 등장만으로도 로비를 채우고 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쏠려들었다.나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수행원들을 빽빽하게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병원 복도의 공기를 순식간에 다시 겨울로 바꿔 버렸다.구겨진 미간 아래로 굳어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노골적인 멸시와 불쾌함이 그 서늘한 눈빛에 훤히 찍혀 있었다.“신 비서, 선거는 벌써 포기한 건가? 바쁠 텐데 그만 가봐.”감히 이 재계의 거물을 병원으로 불러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겁이 없긴 했다.차진철의 냉정한 축객령에도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차준호의 얼굴에도 깊은 불쾌함이 감돌았다.“신하늘, 선 넘지 마.”손끝으로 차가운 오한이 몰려왔지만, 나는 꺾이지 않기 위해 허리를 바짝 세우고 차진철 회장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제가 아무리 바빠도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나의 당돌한 응수에 차진철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운 좋게 공천장을 거머쥐어도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아.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지!”그는 거침없이 날 선 비난을 내던지며 나를 짓눌렀다.정치적 입지가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한들, 차진철의 눈에 나는 여전히 감히 차준호의 곁을 탐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하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이 서늘한 거물을 직접 병원으로 끌어들였겠는가.“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원들을 모두 멀리 물려주십시오. 회장님과 대표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만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신하늘, 피곤하니까 일 키우지 마
“어르신! 차준호가 아프다니요?”김희주는 충격과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대고 크게 외쳤다.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서늘하고 차가운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건조하게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신하늘이 흔들리기 시작하겠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선거운동 따위는 제대로 해내지 못할 수순이야.호재도 이런 대형 호재가 없었다. 차준호라는 거대한 인물의 치명적인 건강 이상이라니.미리 알았더라면 자신이 진작에 그 약점을 낚아채 세상에 터뜨리고,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 갔을 터였다. 이건 예상치 못한 최고의 변수였다.“그렇다면······ 제가 사퇴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혀를 쯧쯧 차는 서늘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김희주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자신이 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묘책이라는 말을 내던졌다는 뜻은, 자신을 구원할 계략을 꾸미고도 남았다는 소리였다.― 그 여자의 발목을 낚아채 흠을 붙잡고 늘어져 보든가. 대중은 김 의원을 향한 관심을 자연스레 잊게 될 것이오. 이번 선거는 몸을 사리고, 다음 지방선거 때 김 의원이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전폭적으로 판을 깔아주겠소.김희주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네?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요?”언제 울었냐는 듯 일그러졌던 그녀의 얼굴 위로, 서서히 기괴하고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이건 차원이 다른 새로운 도약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라니, 막강한 실권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