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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파멸의 도화선, 불타오르네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1 12:05:56

이 깊은 밤, 밀폐된 공간.

난 바로 곁에 내려앉은 차준호를 보며 크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에게서 은밀하게 스며 나오는 명품 남성 향수의 잔향이 차가운 공기 중에 녹아들며 내 심장을 죄어왔다. 

인간적인 온기와 자본주의 사회 정점에 이른 오만한 위치, 그리고 날것의 남성적인 매력이 한 몸에 뒤엉킨 지독하리만치 모순적인 존재.

그런 대단한 차준호가 지금은 기자들의 접근을 막아주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인 관계의 경계를 시험해 보려는 듯한 노골적인 제안까지 건네면서.

‘잠자리? 나 원 참!’

입가에 맴도는 노골적인 질문을 간신히 삼키자,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준다면, 못 이기는 척 그 품으로 넘어간다고 판단한 건가.

나를 뭘로 보고.

“천만에요. 그런 확인 따위 필요 없을 만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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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평선 너머에서 마침내 아침의 첫 빛이 피어나고 있었다.작은 옥탑방 창문 너머로, 붉고 일렁이는 태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곳 제주에 내려와 열흘도 넘게 지냈지만, 이 고요한 일출을 눈에 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아득한 검은 바다가 짙은 오렌지빛으로 온통 물들어 가고, 하늘과 물이 맞닿은 경계선에서 태양은 세상을 품어 안듯 천천히 올라서고 있었다.빛이 창가를 넘어 쏟아져 들어오자, 곁에 있던 차준호가 미간을 천천히 찌푸렸다.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건장하고 묵직한 상체가 이불 바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남자가 이토록 무심하고 나른하게 내 곁에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일 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조만간 거대한 전쟁의 그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남자의 온기가 온전히 남아 있는 이 짧은 평화가 찰나의 꿈처럼 아련하고 소중했다.“······저, 선물 받는 기분이네요.”내 나직한 중얼거림에 차준호가 피식,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선물 안 줬는데······.”둘은 동시에 쿡-, 하고 낮은 웃음을 뱉어냈다. 차준호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짙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그리고 커다랗고 뜨거운 손을 뻗어 내 턱 끝을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어디 주스 없어?”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내게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기 위한 핑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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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25. 그녀의 기사들도 본론으로

    순간 나지란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오만함마저 완전히 휘발되어 버렸다.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비굴함과 추악한 눈물로 지저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듯 고개를 조아리며, 이왕춘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살려주십시오! 아버님! 전 그이도 없이 홀로 이 차가운 집안에서 며느리로 버텼습니다! L그룹의 본가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김희주와 손을 잡아야만 했어요! 앞으로······ 앞으로 아준이에게도 잘하겠습니다!”“할아버지! 제발 저와 엄마 구속만 안 되게 해주세요! 이제 회사 지분 따위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게요! 이아준도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네?”[하늘 보육원]에 불을 질렀냐는 직구에 느닷없는 동문서답이라니.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죄를 덮기 위해 허겁지겁 불쌍한 척을 연기하는 두 모녀의 꼴을 보고 있자니 가소로움에 기가 찼다. 대체 뭘 잘하고, 누굴 돌보겠다는 것인가.“제가 던진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죠. 김희주와 결탁해서,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알면서도 [하늘 보육원]에 불을 지른 겁니까? 역시 처음부터 진짜 타깃은 나였습니까? 내가 죽으면 다 잘될 줄 알았냐고요.”이아준의 낮고 서늘한 일갈이 응접실의 공기를 단칼에 베어냈다. 정적이 질식할 듯 가라앉았다.“어멈아. 대답해라.”이왕춘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으나, 그 음성에는 무간지옥의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대하고 서늘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아버님! ······아준이를 죽이려던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224. 문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보여줘

    차준호는 타오르는 갈증과 인내심의 한계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그때 회장실 벽면의 TV 뉴스가 나직하게 흐르며 집무실의 정적을 깼다.[스카이 블루]의 철벽 보안은 그를 철저히 이방인 취급하며 밀어냈고, 신하늘과의 거리는 단 한 뼘도 좁혀지지 않았다.그는 이 정체된 상황을 타개할 마지막 열쇠를 찾기 위해 차진철을 찾아오게 되었다.“20XX년, 아버지도 세종동에 부지를 매입하셨더군요.”그 땅에 묻힌 진실이 뭐길래 차준호의 직감이 이렇게 들끓는 걸까.“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땅이라는 건 돈 냄새가 나면 사는 거다. 넌 지금 네 사업에나 집중해. 신 비서는 어디서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 신경 끄고!”차진철의 대답은 어수선했다. 뜬금없이 신하늘을 언급하다니.왜 말을 돌리는 것일까.문득 속내가 뒤틀려가는 기분이 든 차준호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차진철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아버지, 혹시 신하늘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있습니까?”세종동 개발 비리의 뿌리를 캐내기 위해 김희주의 행적만 추적해 왔는데.차진철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수십 군데 부지를 소유한 그가 지금 왜 동요하는 걸까.“뭐가 되었든 간에 난 최선을 다한 경영인이야.”차준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일순간 차진철이 짓고 있는 그 굳은 표정 뒤에 숨겨진 비겁함을 목격했다. 갑자기 제 심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그래서요?”그것은 신하늘의 상처와 직결된 가장 추악한 진실로 통하는 문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스쳤다.차준호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한 순간, 차진철은 참지 못한 노기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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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4. 폭풍의 눈이 열리다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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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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