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자연스럽게 이아준의 차가운 시선이 이아정의 손에 들린 신경질적인 종이 뭉치로 향했다.
“너 말 다 했어?! 내가 너 누나야! 그리고 네 앞길에 똥물 뿌릴 수 있는 사람도 나야! 이번에 XX당 보좌관으로 들어갔거든? 제발 내가 가는 길 좀 막지 마!”
이아정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리며 서슬 퍼렇게 악을 썼다. 이아준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을 보듯, 무심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받았다.
“반대 상황도 생각해야지. 김희주한테 줄이라도 섰나 봐? 그쪽 당 보좌관 자리 하나 꿰찼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야?”
“신하늘이나 어떻게 좀 해봐! 외국으로 보내든가, 조용히 찌그러져 있게 하든가! 어차피 흙수저 밑바닥 출신 아이는 평생 거기서 굴러야지, 어디 감히 근본도 없이 위를 쳐다봐? 차준호는 내 남자야!&새벽잠을 설친 여파로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밤새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도국은 새벽 5시가 되자마자 매니저 차를 타고 휙 나가 버렸고, 이아준 역시 6시가 조금 넘자마자 자리를 떴다.한여름이라 해가 일찍 뜬 덕분에 녀석들은 밤새 게임에 몰두하다 쪽잠만 대충 자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차준호도 없고, 상하이로 떠난 마당에 나는 분명 어제 허기찬 실장의 문자를 받고 출근을 거절하려 했다. 여행까지 다녀온 터라 피곤에 찌든 몸을 생각하면 오늘은 집에서 푹 쉬었어야 마땅했다.‘왜······ 회장님이?’내가 CC그룹으로 방문하지 않겠다고 거절해서 직접 확인하러 오기라도 한 걸까.생각할수록 머릿속 한쪽이 찌릿찌릿 지끈거렸다. 집에 혼자 남아 심란하게 뒹굴러봤자 불안만 커질 뿐이었다. 결국 나는 친구들이 떠난 직후 서둘러 출근 채비를 시작했다.옷장은 무엇을 입어야 할까 한참을 서성였다. 화려한 원피스나 치명적인 차림새는 오늘따라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 이아준이 넌지시 챙겨주었던 단정한 검은색 슬랙스 바지에, 깨끗한 흰색 시폰 긴팔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머리도 최대한 흐트러짐 없도록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다.버스를 타고 회사를 향해 달리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거대한 안개처럼 어지러웠다. 마침내 정류장에 내려 회사 로비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렇게 회사가 가기 싫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하는 서글픈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터덜터덜 걸어가며 평소처럼 대표실 전용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가, 왠지 오늘은 그럴 용기조차 나지 않아 23층까지 운행하는 일반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비상구를 통해 25층 대표실 구역으로
"도국아!"오늘 웬일로 녀석이 찾아온 걸까.반가운 마음에 손부터 흔들었다.그리고 그 뒤에 세단도 한 대 도착했다. 바로 이아준이었다."저번에 그 난리를 부리더니, 뭐냐? 낙서 또 시작되었잖아?""제대로 수사하나 했더니, 쯧!"녀석들은 내 등 뒤로 펼쳐진, 페인트 테러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나만큼이나 친구들이 걱정해 주니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사실 나는 늘 익숙한 일이라 다시 낙서가 시작되어도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이례적으로 경찰 측에서 피해자 보호도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더니, 지금은 흐지부지된 상황임이 분명해 보였다."너무 신경 쓰지 마. 경찰관 분들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들어가자. 너희들을 위해 줄 선물이 있어."나는 녀석들에게 그래도 좋아할 법한 술과 주전부리 간식, 그리고 게임 팩이 든 쇼핑백을 건넸다.경제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녀석들이지만,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게임 칩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순식간에 어린아이처럼 받아 들고는 기뻐했다."아, 재미있겠다! 요즘 스트레스 잔뜩인데, 하하!""하늘아, 뭘 또 사 가지고 왔어."굳은 얼굴을 풀며 친구들을 안으로 들였다.그래도 오늘 같은 날 할 말이 많은데 친구들이 찾아와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집도 그대로, 가구도 그대로.에어컨도 최저 온도로 틀고, 모니터 앞에 자리 잡고 앉고 나니 역시 내 집이 마음이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맥주도 앞에 놓고 내가 준 해산물을 말린 것과 견과류 기념품을 풀고는 우린 게임을 시작했다."도국아 진짜 겨울에 군대를 가냐? 국보급 연예인인데."투덜거리는 이아준의 말에 도국은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대답을 건넸다."국보는
선우현의 문자를 확인한 순간부터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그때 옆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차준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깨어났다.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준호를 따라 공항을 가로질러 가면서도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그와 나란히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걸어 나오는 길, 내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있었다.도쿄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나눴던 아찔한 입맞춤과 숨결이 아직도 입술 끝에 생생한데, 현실은 얼음장 같은 바람이 확 불어닥친 기분이었다."신하늘, 왜 그리 심각해? 피곤해?"차준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그윽하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의 미세한 떨림을 귀신같이 포착해내고 있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세상이 전부 내 것인 양 아득해졌었는데, 한국 땅을 밟자마자 거대한 현실의 파도가 목덜미를 덥석 움켜쥔 기분이었으니까.CC그룹으로 오라는 선우현 비서실장의 문자는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의중이 더 문제였다. 왜 하필 ‘대표님 몰래’ 오라는 걸까."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갑자기 발생해서요."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충 얼버무렸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차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나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그 여유로운 태도가 사람을 더 거슬리게 만들었다.문득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나를 압박했다. 정말 이 문자 내용을 그에게 숨겨야만 하는 걸까.CH-컴퍼니의 평범한 비서가 남
그날 밤, 도쿄의 어둠이 깊어만 갔다.신하늘은 영락없는 토끼 같으면서도, 가끔은 여우처럼 심장의 가장 연한 곳을 훅 파고들곤 했다.속내가 투명하게 다 비칠 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상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기묘한 영리함이 있었다.붉은 블러디 메리의 취기에 살짝 뺨을 물들인 그녀의 손을 잡고, 마침내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객실 문을 닫자마자 묘한 긴장감이 끈적하게 밀려들었다. 단둘만의 밀폐된 공간이 주는 고요함은 이성의 끈을 더욱 아슬아슬하게 흔들었다.이 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차준호의 속내는 시끄러워졌다.“대표님, 정말 이성적이시네요. 그 좋은 분위기에서 술은 입에도 안 대시다니요.”신하늘이가 풀린 눈으로 샐쭉이 웃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그녀와 달리, 차준호는 너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해야만 했다.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진실이 있었다. 자신 안에서 남들과 다르게 흐르는 모래시계를 멈추려면 사랑하던 술조차 철저히 끊어내야 한다는 것을.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건 강진욱의 경고가 아니라, 지금 자신 눈앞에서 몽환적인 눈빛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 여자인 것 같았다.여기서 이성을 잃는 순간, 그동안 쌓아온 모든 방어벽은 무너질 터였다.“그러게. 내가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차준호의 낮고 진득한 목소리에 신하늘의 눈을 동그랗게 떠졌다.순간,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당황과 호기심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머쓱한지 배시시 웃으며 제 방을 향해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지척에 손을 뻗으면 닿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무너뜨릴 수 있는 거리였다.머릿속이 복잡하게 갈등으로 엉켜갈 때
아스팔트 위로 지독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한여름 8월의 삼복더위가 막 열리고 있었다.밤이 깊어도 열대야 때문에 곳곳에서 덥다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강소희는 드라마 촬영 짬을 내어 테헤란로에서 촬영을 하다 서둘러 CH-컴퍼니 본사를 찾았다. 오늘 그녀의 착장은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붉은색 민소매 원피스였다.옛날에 최기범이 차준호는 원피스를 입어야 진짜 공주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진 이후로 항상 강소희는 원피스만 즐겨 입었다.“안녕하세요, 허기찬 실장님. 우리 준호 안에 있어요?”높은 하이힐 소리를 짓개며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류를 검토하던 허기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갑작스러운 강소희의 등장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허기찬은 이내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 강소희 씨. 대표님께서는 지금 일본 출장 중이십니다.”“출장이요?”그 순간, 소희의 시선이 차준호의 방 옆, 단정하게 정돈되어 비어 있는 비서 책상으로 향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소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어머, 그러고 보니 그 토끼 비서님은요?”허기찬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더니, 입꼬리를 씰룩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신 비서요? 대표님이랑 같이 갔습니다.”강소희의 예쁜 입매가 단숨에 험악하게 비틀어졌다. 설마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자, 그녀의 입에서 절로 아연실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설마, 말도 안 돼. 둘이서 벌써 그런 사이가 되었다니.”강소희는 히스테릭하게 이마를 짚고 서둘러 비서실을 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비어 있는 신하늘 자리를 노려보았다.기분
나는 졸지에 CH-컴퍼니의 숨은 유능한 전략가가 된 셈이었다.차준호가 테이블 너머로 내민 것은 어젯밤 나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정통 RPG를 직접 플레이한 유저의 관점에서 본 '가치 소비'와 '연출 퀄리티'에 대한 보고서였다.단순히 수치만 나열된 차가운 데이터가 아니라, 게임을 진심으로 애정해 온 진성 유저의 시각이 담긴 생생하고도 직관적인 프리젠테이션이었다.대체 언제 이걸 다 정리해서, 그 중요한 비즈니스 회의에 나와 나눈 사담을 최상의 무기로 내놓은 걸까.일본 파트너사의 총괄 디렉터가 자료를 넘겨보더니 깊은 인상을 받은 듯 눈을 번쩍였다.“차 대표님, 게임에 대한 아주 뛰어난 감각과 깊은 직관을 가지셨군요.”“내가 뽑은 직원이 워낙 유능해서 말입니다.”내가 뭘 했다고. 나는 그저 어제 그와 와인을 기울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뿐이고, 지금도 그저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인데.하지만 그 한마디를 시발점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물살을 탔다. 굳어 있던 임원들의 얼굴이 풀어지며 편안하게 게임의 본질을 논하기 시작했고, 차준호는 중간중간 슬쩍 고개를 숙여 내게 의견을 물었다.귓속말로 조심스레 건네는 나의 소소한 조언들이 차준호의 묵직한 입을 거쳐 완벽한 비즈니스 언어로 다듬어져 나갔다. 밀도 높은 교감이 회의실 안을 팽팽하게 채웠다.척박했던 환경 속에서 내 유일한 안식처는 게임이었고, 제지할 부모도 없는 데다 든든한 파티원들과 함께 상위 길드를 독차지했던 그 치열한 경험들이 여기서 빛을 발한 것이다.길고 긴 마라톤 협상 끝에, 계약은 우리가 제시했던 최상의 조건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빌딩을 나서는 길에 차준호는 짐짓 무심한 척 걸음을 옮겼지만 입꼬리 끝에 옅은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그는 치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