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제 점심을 먹고 나면 설 명절을 지내기 위해 하나둘 조퇴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직원들이 생길 터였다.
길고 길었던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계속 먹고 자며 내가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몰두했다. 최기범도 게임 데모 버전이 안정화에 접어들자 일본 출장길에 오른 상태였다. 다른 직원들 역시 번갈아 가며 야근을 감수했고, 다들 미친 듯이 일에만 매여 지냈다.
“신하늘 씨, 퀵 배달입니다!”
그리고 차준호가 보낸 쇼핑백 역시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배달되었다.
옷과 음식, 각종 생필품 등 세심하게 챙긴 물품들을 가득 보내주었지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간결한 메모나 메시지 몇 줄만 전해올 뿐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자, 게임 개발
[췌도 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CC그룹 계열사, 대한종합병원의 독보적 기술력! 의학계 초미의 관심][심장병을 앓던 차진철 회장, 아들 차준호에게 췌도 이식 단행 후 회복 중······ 완벽한 부활 예고!][‘외조의 왕’ 차준호, 자신의 건강 악화 속에서도 신하늘의 선거 승리를 위해 전력 투구][오는 6월 1일 제22대 국회의원 임기 개시를 앞두고, 신하늘 당선인의 향후 행보에 대중의 시선 집중]세상을 거세게 들썩이게 만들었던 선거가 끝나고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언론과 세상의 뜨거운 관심은 여전히 나와 차준호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차진철 회장은 숨길 이유가 없다며, 이번 성과를 오히려 언론에 전격적으로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췌장 특화 센터 건립을 전격 선포하며 의학 발전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을 대외적으로 발표했다.“하늘아, 지병까지 회사 이미지에 기가 막히게 이용하다니. 차진철 회장님한테 진짜 한 수 크게 배우고 간다.”소파에 누워 책을 읽던 차준호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응수했다.“조용히 하려던 걸 기자들이 기사화한 거야.”녀석은 나에게 줄 딸기를 씻으러 싱크대에 서서도 연신 투덜거렸다.“잘되는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사실 차진철 회장은 이번 수술을 계기로 강진욱 박사의 수술팀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간·췌장 센터 건립을 결정했다. 국내에서 차준호처럼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해 더 깊이 연구하라며 200억 원이라는 기금까지 흔쾌히 조성해 주었다.나는 잘 씻긴 딸기 하나를 집어 차준호의 입에 넣어주며 그저 가만히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주 월요일 아침.도국이 정식으로 CH-컴퍼니에 신곡을 넘기고 계약을 마무리 지은 덕분에, 해외 스케줄을 소화 중이던 하나까지 어제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오늘 정식으로 곡을 전달받은 세나는 하나와 둘이서 듀엣 프로젝트라는 공식 일정을 시작하게 되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바로 이 휴게실에서 하나에게 뺨을 맞기도 하고 욕설을 듣기도 했던 터라, 여전히 앙금이 가슴에 깊게 남아 있었다.세나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일회용 컵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쥔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하나 역시 머뭇거리는 손길로 도국이 전달해 준 악보 뭉치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신 비서님, 진짜 끝내주신다.”악보의 첫 장을 넘기던 하나가 슬그머니 세나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세나 역시 제 앞에 놓인 도국의 악보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 도국 오빠도 저희에게 다가와 주셨네요.”도국이 선물한 곡은 그야말로 히트를 치지 않을 수 없는 명곡이었다. 세나와 하나의 음역대와 음색을 섬세하게 계산해 낸 파트 분배, 가슴 밑바닥을 서늘하게 긁어내리는 선율 구성은 완벽함 그 자체였다.게다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아련하고 깊은 사랑의 가사까지······. 악보 구석구석에는 도국의 정교함과 진심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어느덧 세나의 생각도 깊어졌다.도국이라는 남자가 그토록 아끼고 바라보던 여자. 신하늘이라는 존재는 알면 알수록 타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인물이었다.“임신까지 한 상
시간이 흐를수록 차진철의 자발 순환은 빠르게 회복(ROSC)되고 바이탈 신호 역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강진욱 박사의 지시하에 차진철 회장은 중환자실에서 VVIP 특실로 속전속결 이동되었다.나와 차준호가 머무는 병실과 바로 옆 병실로 옮겨 왔다.지독한 기계음과 서늘한 소독약 냄새가 허파를 죄어오던 중환자실 복도를 지나, 마침내 묵직한 문이 열린 특실 안은 은은하고 미약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침대 중앙, 지독했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코와 입을 덮은 산소마스크도 사라진 차진철 회장의 가슴이 작지만 분명한 생명의 박동을 그리며 오르내렸다.패여버린 뺨과 꺼칠한 피부는 그간 그가 사선에서 벌인 처절한 사투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특유의 깊고 형형한 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고미주가 차진아와 함께 병상 곁으로 다가가 왈칵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그들은 부어오른 눈으로 차진철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꺼스럭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차준호 역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끌고 병상 근처로 다가섰고, 나 역시 그의 곁에서 조용히 거리를 좁혔다.단 며칠 사이에 사람이 이토록 세월을 한꺼번에 뒤집어쓸 수도 있는 것일까.심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차진철이 오직 아들 차준호를 살려내기 위해 견뎌냈을 그 고통의 시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처절한 사투였다.강진욱이 다가와 차트를 확인한 뒤, 이제 편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좋다는 듯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료진과 함께 조용히 퇴실해 주었다.모든 고비를 극복한 차진철은 가쁘게 가슴을 부풀리며, 감격과 안도에 젖어 있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천천히, 아주 깊게 둘러보았다.오롯이 정적만이 남은 병실 안으로, 비로소 가족의 시간이 돌아왔다.***
JW엔터테인먼트 대표 주원형의 숙소 거실은 지나치게 정적이었다.강소희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휴대폰 화면을 쓸어 올렸다.반쯤 처진 커튼 사이로 봄햇살이 가늘게 쏟아졌지만, 그 빛은 그녀의 무릎 언저리에서 서늘하게 멈췄다.거실 안까지 침범하지 못한 빛이라 그런가. 마치 이 공간만은 여전히 겨울에 갇혀 있는 듯했다.화면 위로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기사가 쏟아져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강소희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행간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 무섭게 탐독했다.한때 '서쪽 동네 초라한 공주님'에 불과하다며 얕잡아 보았던 여자가 끝내 대한민국 정치계의 역사를 고쳐 쓰다니.신하늘. 그 이름 석 자가 국회의원 배지와 나란히 놓인 세상을 보며 강소희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그것은 밑바닥에서 시작한 누군가가 기어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 느껴지는 경외감에 가까운 생경한 감각이었다.그리고 생각의 끝은 결국 차준호에게로 수렴되었다.'기어이 준호도 토끼 비서님이 살렸나 보네.'대신 주원형이 은밀히 전해준 정보대로 공여를 대신한 차진철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강소희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거렸다.시간은 자꾸만 작년 12월 31일, 그 시린 겨울날로 되돌아갔다.차준호에게 몸의 일부를 주겠다고 서 있던 강원도 어느 대형 병원의 그 냄새가 지금도 코끝을 스쳤다.아이만 없었다면 그대로 자신의 장기를 이식을 해 주고 차준호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새겨졌을 텐데.강소희는 천천히 손을 배 위로 가져갔다. 아직은 매끄럽고 평평했지만, 기분 탓인지 손바닥을 대면 미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있었다.주원형은 이 아이
그날 오후.회진을 돌던 의료진이 VIP병실로 와서 나와 차준호에게 단단히 경고를 내리고 떠났다.[차 대표님, 대수술을 받은 지 겨우 사흘째입니다. 아무리 휠체어로 이동하시더라도 복부에 힘이 들어가면 봉합한 수술 부위가 터질 수 있어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신하늘 님도 수액이 다 들어가기 전까진 안정을 취하셔야 하고요.]하지만 정작 우리 중 그 누구도 제 몸 하나 가눌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억지로 미음 몇 숟가락을 삼키고 자리를 옮겼다.강진욱이 마지막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서늘한 선고를 내린 직후라, 중환자실 앞 복도에 앉아 있던 차진아와 고미주 여사의 눈은 이미 붉게 퉁퉁 부어 있었다.중환자실의 육중한 자동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차가운 복도 너머로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오열과 둔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차준호를 시작으로 고미주 여사, 그리고 차진아까지⋯. 각자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무균병동 문턱을 넘었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왔을 때,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삶의 의지나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납빛이었다.그리고 마침내, 내가 그 문턱을 넘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서늘한 멸균 비닐 무균복을 덧입고, 마스크와 위생 장갑, 헤어캡까지 꼼꼼히 갖추었다.전신을 감싸는 알코올 소독액의 서늘하고 찌릿한 감각을 두른 채, 나는 마침내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처럼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공간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중환자실 무균병동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삭막했다.천장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수많은 기계 배선과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규칙적이지만 위태롭게 울리는 전자음들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L그룹 회장 취임식을 단 며칠 앞둔 이아준의 회장실은 상당히 분주했다.요 며칠 자신도 신하늘의 선거 운동을 따라다니고, 병원을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일은 밀렸고, 수십 조가 오가는 사업을 결정하고 쇄신하는 브리핑이 이어지자 뒷골이 당겨와 쓰러질 것만 같았다.통유리창 너머 한강의 물결은 봄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임원단들과 L그룹의 각종 지표가 띄워진 대형 모니터 화면은 전부 퍼렇게 내리막만 꽂아대고 있었다.하지만 그 모니터를 띄워 놓고도 이아준의 노트북 옆쪽에는 작은 헤드라인으로 정치 뉴스가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있었다.[‘임신’ 사실 숨긴 채 총선 레이스를 완주한 신하늘, 득표율 압승으로 국회 입성][임신을 무기로 삼지 않은 그녀, 오직 공약과 정책으로 승부한 신하늘 당선인의 저력은 K정치의 새 지표를 열다][외신도 주목한 신하늘의 행보⋯ 한국 정치가 나아갈 새로운 지평이 되다][차준호 CH컴퍼니 대표, 아내의 곁에서 묵묵한 외조 후 탈진, 온 가족이 입원 중으로 알려져]기사의 댓글 창에는 그녀를 향한 전 세계적 갈채와 찬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기존 정치인들처럼 동정표를 구하거나 네거티브 프레임도 거부한 신하늘이었다. 특히 개인의 신상 이슈를 프레임으로 활용하지 않고, 오롯이 정직하게 정면 돌파해 낸 신하늘의 행보에 사람들은 환호했다.화면을 천천히 시선으로 쓸어내리던 이아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승전가와 신화에 열광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아는 그로서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려왔다.‘하늘아⋯ 아이를 갖고도 그 지옥 같은 선거판을 버텨내다니. 게다가 차준호에게 이식까지 하려 한 건 너무했잖아. 대체⋯ 얼마나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