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제8화 불협화음의 침입자(2)
"하지만 우리 메인 홀에 걸기엔 너무 날것이더군요. 색채를 조금 누르고, 구도를 안정적으로 수정한다면……."
"그래서, 내 그림을 당신들 입맛에 맞게 '수정'해서 걸어주겠다?"
이안이 서아의 말을 툭 끊어먹었다.
"그게 큐레이터의 역할이니까요. 원석을 다듬어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 그것이 상품 가치를 높이는 길입니다."
"상품 가치."
이안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소파의 가죽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서아의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큰 체구가 다가올수록 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이안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아의 시야
제10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2)서아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차갑게 대꾸했다.자신이 뿜어내던 완벽한 큐레이터로서의 위엄이, 이 비좁고 냄새나는 지하실에서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이안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벅벅 닦아내더니, 발로 툭 차서 철제 의자 하나를 서아 쪽으로 밀어주었다."앉아. 차는 없어. 냉장고에 먹다 남은 맥주 정도는 있는데.""됐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까."서아는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그 더러운 의자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결벽증이야?""위생 관념이 철저한 편이죠. 특히 이런…… 통제되지 않은 공간에서는 더더욱.""통제?"이안이 픽 웃으며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치이익-.탁한 탄산 소리와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고 침을 삼켰다."당신은 참 피곤하게 사네. 그 잘난 통제 때문에 목구멍까지 단추를 꽉꽉 채우고 있으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내 표정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죠. 나는 오늘 큐레이터로서 당신의 원화들을 확인하러 온 겁니다."서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시선을 돌렸다. 벽에 기대어 있는 거대한 캔버스들로 향했다.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은 훨씬 더 기괴하고 폭력적이었다.핏빛 붉은색과 심연의 검은색. 캔버스 위에서 색채들이 마치 서로를 뜯어먹고 있는 듯한 형상."그림들이…… 전부 공격적이네요.""공격적이라."이안이 남은 맥주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으며 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85화 완벽한 포식자, 그리고 구걸하는 짐승(1)삐빅.철컥-.굳게 닫혀 있던 견고한 철문이 무겁고 서늘한 파열음을 내며 열렸다."이 씨발년아! 당장 안 기어 나와?!"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이었다.만취한 이안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현관 안으로 거칠게 몸을 들이밀었다.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윤서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이 바닥에 질질 끌어다 놓은 다음, 그녀의 완벽한 남편 앞에서 모든 진실을 까발려 그 알량한 가정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하지만."어쿠."현관문 턱에 발이 걸린 이안의 몸이 흉하게 앞으로 쏠렸다.알코올에 절여진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 했다.그 순간, 단정하고 길쭉한 두 손이 불쑥 뻗어 나와 이안의 양어깨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조심하셔야죠. 대리석 바닥이라 머리 깨지기 십상입니다."서늘하고 차분한, 고급스러운 바리톤의 음성."……어?"이안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윤서아가 아니었다.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사내였다.고급스러운 다크 네이비 실크 가운을 걸치고, 흐트러짐 없는 머리칼 아래로 무테안경을 쓴 남자. 강도진이었다."뭐, 뭐야. 놔, 이 새끼야!"이안은 화들짝 놀라며 도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도진은 순순히 손을 거두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주 흥미로운 벌레를 관찰하는 표정으로 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싸구려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늘어난 티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그리고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알코올 냄새와 테레빈유의 쩐내.'이런 게 내 완벽한 아내의 내연남이라니.'도진은 속으로 실소
제9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1)오후 4시 20분.마포구 연남동의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서아의 매끄러운 흰색 벤츠 세단이 불법 주차된 트럭과 전봇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었다.빠지직-.타이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깨진 소주병 조각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불쾌하게 신경을 긁었다."하아……."서아는 운전대에 얹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죽을 두드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붉은색 점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녀가 아는 세계와는 너무도 달랐다.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빌라들, 얽히고설킨 시커먼 전깃줄, 그리고 골목 구석에 쌓인 쓰레기봉투들.최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한남동의 자택과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는 청담동의 갤러리만을 오가던 서아에게, 이곳은 흡사 다른 차원의 빈민가처럼 느껴졌다.'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지.'서아는 조수석에 던져둔 구겨진 명함을 곁눈질했다.[마포구 연남동 128-4, 지하 1층]그 무례하고 오만한 남자, 이안이 남기고 간 종이 쪼가리.어제 갤러리에서 그 수모를 겪고도 결국 이 불결한 골목까지 차를 몰고 온 스스로가 서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냥 확인만 하는 거야. 그 그림들이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 갤러리에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원석인지. 수석 큐레이터로서의 의무일 뿐이야.'서아는 애써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동을 껐다.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훅 하고 미지근하고 습한 공기가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정제되지 않은 매연 냄새와 하수구 냄새가 뒤섞인, 도무지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냄새.또각.10센티미터
제8화 불협화음의 침입자(2)"하지만 우리 메인 홀에 걸기엔 너무 날것이더군요. 색채를 조금 누르고, 구도를 안정적으로 수정한다면…….""그래서, 내 그림을 당신들 입맛에 맞게 '수정'해서 걸어주겠다?"이안이 서아의 말을 툭 끊어먹었다."그게 큐레이터의 역할이니까요. 원석을 다듬어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 그것이 상품 가치를 높이는 길입니다.""상품 가치."이안이 낮게 읊조렸다.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소파의 가죽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그는 서아의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큰 체구가 다가올수록 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이안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서아의 시야에 이안의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지워지지 않은 붉은 물감 자국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테레빈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숨이 막힐 듯한 압도감."똑똑히 들어, 수석 큐레이터님."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눈동자를 정확히 꿰뚫었다."내 그림은 당신들 벽에 걸라고 그린 예쁜 쓰레기가 아니야.""말조심하시죠.""말조심? 당신이야말로 똑바로 봐."이안이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거칠게 펼쳤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엉켜 울부짖는 듯한 그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게 상품으로 보여? 당신네 그 고상한 사모님들 거실에 걸어놓고 커피 마시면서 구경할 수 있는 그림 같냐고.""예술은 결국 관람객과 소통해야 의미가…….""지랄하네."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완벽한 세계에서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천박한 단어를 쓴 적이 없었다. 남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수석님……."문가에 서 있던 윤지수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요?""네. 포트폴리오 봉투에 적혀 있던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옵니다. 아무래도 오늘 안 올 것 같은데……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실까요?"서아는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혔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약속을 취소하고 그 보잘것없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파쇄기에 넣어버리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서아가 평생을 지켜온 규칙이었다.하지만.서아의 시선이 책상 한쪽에 놓인 이안의 포트폴리오로 향했다.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색채. 어제 처음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등골을 타고 오르던 서늘한 전율이 아직도 생생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죠.""네? 하지만 30분이나 지났…….""기다려요."서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지수는 입을 다물었다.그때였다.쾅-!노크도 없이 수석 큐레이터실의 육중한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앗!"문 앞에 서 있던 윤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름만 달랑?"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성의 없는 포장에 기가 찼다. 이런 식으로 지원 서류를 보내는 인간은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아마추어니까.쓰레기통에 바로 던져버리려던 찰나,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너무 완벽하게 정돈된 서류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구겨져 있는 그 봉투가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얼마나 대단한 천재 길래 이런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내."서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투박하게 스테이플러로 찍힌 A4 용지 뭉치가 튀어나왔다. 자기소개서나 작업 노트 같은 건 없었다. 오직 그림을 찍은 사진들만이 날것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서아는 첫 번째 장을 넘겼다.그리고, 숨을 멈췄다."……!"순간, 갤러리의 차가운 공기가 일순간 증발해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인쇄된 종이일 뿐인데, 그림에서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첫 번째 사진은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화였다. 아니, 인물화라고 부르기엔 형태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어둡고 탁한 배경 위로,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과 심연 같은 검은색이 폭력적으로 엉켜 있었다. 붓으로 그렸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물감이 두껍게 짓이겨져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손톱으로 캔버스를 할퀴어 낸 듯한 거칠고 파괴적인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고통, 혹은 욕정, 아니면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