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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3 11:01:04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에너지는 때로 천박함으로 흐르기 쉬우니까요. 정제되고 다듬어진 미학이야말로 오래 살아남는 법입니다.'

남편의 그 매끄럽고 서늘한 목소리.

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강도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술이든 삶이든, 통제되고 다듬어진 것만이 이 상류층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지루해……."

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

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

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정보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이름 석 자와 연락처 하나가 전부였다.

[ 권이안 ]

"권이안……? 이름이랑 번호만 달랑?"

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성의 없는 포장에 기가 찼다. 이런 식으로 지원 서류를 보내는 인간은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아마추어니까.

쓰레기통에 바로 던져버리려던 찰나,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너무 가지런히 정돈된 서류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구겨져 있는 그 봉투가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얼마나 대단한 천재이길래 이런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내."

서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

투박하게 스테이플러로 찍힌 A4 용지 뭉치가 튀어나왔다. 자기소개서나 별도의 작업 노트는 없었다. 작품 사진 아래에는 재료와 크기, 한두 줄짜리 짧은 설명만 무성의하게 적혀 있었다.

서아는 첫 번째 장을 넘겼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

순간, 갤러리의 차가운 공기가 증발해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인쇄된 종이일 뿐인데, 그림에서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사진은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화였다. 아니, 인물화라고 부르기엔 형태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둡고 탁한 배경 위로,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과 심연 같은 검은색이 폭력적으로 엉켜 있었다. 붓으로 그렸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물감이 두껍게 짓이겨져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손톱으로 캔버스를 할퀴어 낸 듯한 거칠고 파괴적인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고통, 혹은 욕정, 아니면 그 두 가지가 뒤섞인 어떤 짐승의 절규 같았다.

"이게…… 뭐지."

서아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음 장을 넘겼다.

타다닥. 종이 넘어가는 소리조차 신경을 긁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인간의 신체, 폭발하듯 흩뿌려진 색채, 금기시되는 감정들을 가감 없이 발가벗겨 놓은 듯한 노골적인 구도.

그것은 서아가 지금껏 갤러리에 걸어왔던 그 어떤 '안전한' 예술과도 달랐다.

우아하지도, 교양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박하고, 기괴하며, 노골적이었다. 도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제되지 않은 천박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

서아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귓가에 자신의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울렸다.

그림 속의 붉은 물감이 마치 진짜 피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종이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끈적한 물감의 촉감과 진동하는 살냄새가 묻어날 것만 같은 지독한 생동감.

"미쳤어……."

그것은 이안이라는 작가의 그림을 향한 욕인지, 아니면 그림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향한 욕인지 알 수 없었다.

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실크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정확히 맞춰진 에어컨 온도에도 불구하고 목덜미에 뜨거운 땀이 맺히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지금껏 수천 점의 그림을 봐왔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머리로는 '불쾌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토록 폭력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그림은 갤러리 도아의 고상한 벽면에 걸릴 자격이 없다고. 상류층 컬렉터들은 이런 날것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하지만 본능은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갈증.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채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미친 듯한 갈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저 붉은 색채가, 위선과 교양으로 꽁꽁 싸매어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심장을 쥐어흔드는 것 같았다.

"이안."

서아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입술 위로 굴려 보았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일종의 경외, 혹은 두려움이 섞인 떨림이었다.

이름과 연락처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는 남자.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어떤 지옥을 뒹굴었기에 이토록 처절하고 관능적인 붓을 휘두를 수 있는 걸까.

서아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혹은 어둠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의 뒷모습. 거친 나이프 자국이 남자의 척추를 따라 붉게 파여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서아는 알 수 없는 압도감에 휩싸여 종이를 쥔 손을 잘게 떨었다.

그 뒷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쓰고 있는 그 완벽한 가면을 벗겨주겠어.'

덜컥.

그녀가 5년 가까이 단 한 번도 금이 간 적 없던 완벽한 유리성에, 처음으로 치명적인 균열이 가는 소리였다.

"관장님."

갑자기 열린 문 틈으로 윤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뒤집어엎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은밀한 불륜의 증거라도 감추듯이.

"왜요? 무슨 일이죠?"

서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스스로도 당황할 만큼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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