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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3)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4 11:00:23

윤지수는 흠칫 놀라며 문가에 멈춰 섰다.

"아, 그…… 서류가 하나 누락된 게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너무 붉으신데요."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온도가 좀 높아서요. 서류는 거기 두고 나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지수가 서류를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서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떨리는 손으로 뒤집어 놓았던 크라프트지 봉투를 다시 가져왔다.

자신의 삶은 강도진이라는 남자가 만들어 놓은 정교하고 우아한 소설 같았다. 그 안에서 자신은 오차 없이 움직이는 완벽한 아내이자, 지성적인 큐레이터라는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불쾌하고 통제 불능인 포트폴리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이 갤러리의 룰이었고, 서아의 룰이었다.

하지만 서아의 손은 쓰레기통이 아닌, 포트폴리오의 겉면으로 향했다.

사각, 사각.

펜촉이 거친 크라프트지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관장실의 정적을 갈랐다.

그녀는 '권이안'이라는 이름 옆에, 붉은색 잉크로 선명하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쳤다. 추가 검토를 의미하는 개인 표시였다.

"만나봐야겠어."

서아는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 지독한 그림을 그린 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잠시 뒤 다른 심사 담당자들이 관장실로 들어왔다. 서아는 심사표를 처음부터 넘겼다. 작품성, 시장성, 전시 공간 적합성, 작가의 지속 가능성. 갤러리 도아가 신진 작가를 고를 때 사용하는 네 개 항목은 수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각 항목에 점수를 매겼고, 점수는 대개 자신의 첫인상을 배신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안의 작품이었다.

기술 점수만 놓고 보면 최고점이 아니었다. 시장성은 오히려 낮았다. 붉은 색면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인물의 몸은 수집가의 거실에 걸어두기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인 긴장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아의 연필은 탈락 칸으로 가지 못했다.

"관장님, 이 작품은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옆자리의 큐레이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유는요?"

"강하긴 한데…… 불편합니다. 전시 전체 톤하고도 안 맞고요."

서아는 그림을 다시 보았다. ‘불편하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런데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다른 작품들이 갑자기 장식품처럼 보였다.

"나머지 작품하고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빼면, 공모전이 아니라 기존 전시 복제가 되겠죠."

그녀는 이안의 서류 위에 보류 표시를 했다.

"이 사람은 직접 봅시다. 작품 수정 가능 범위와 전시 조건을 확인한 다음 결정하죠."

직원들이 눈을 마주쳤다. 서아가 점수가 애매한 작가에게 직접 미팅 기회를 주는 일은 드물었다.

"연락해 둘까요?"

"오늘 안으로요."

대답한 뒤 서아는 손끝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다. 자신은 단지 검증 절차를 한 단계 더 추가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일을 덮고도 붉은 그림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심사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심사하는 그림처럼 느껴졌다.

회의가 끝난 뒤 서아는 이안의 작품 이미지만 따로 출력하게 했다. 모니터로 볼 때와 종이로 볼 때 붉은색의 밀도가 달랐다. 그녀는 작품 설명문을 다시 읽었다. 설명은 놀랄 만큼 짧았고, 자신의 작품을 친절하게 해석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서아는 그 무성의를 감점 사유로 적었다가 선을 그어 지웠다.

"관장님, 정말 직접 보실 거예요?"

비서가 물었다.

"확인할 게 있으니까요."

"다른 심사위원들은 탈락 쪽이던데요."

"그래서 더 확인하는 겁니다."

서아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단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비서가 나간 뒤에는 출력물을 서랍에 넣지 못했다. 흰 책상 위에 붉은 그림만 남겨 두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녀의 업무 공간에 계획표로 설명되지 않는 물건이 남았다.

서아는 심사표 최종본에서 이안의 이름 옆에 별표를 하나 남겼다. 공식 기호가 아니어서 회의록에는 들어가지 않을 표시였다.

그 별표가 마음에 걸려 지우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림이 좋은지 싫은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수십 장 가운데 유일하게 다시 보고 싶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서아는 그것만으로 직접 미팅을 잡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결론 내렸다. 업무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편리한 언어였다.

서아는 출력물을 다시 파일 안에 넣으면서도 이안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맨 위로 옮겼다.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사람이 자료를 펼치면 가장 먼저 그 붉은 그림을 보게 될 위치였다. 그녀는 다시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자신의 이 고상하고 죽어 있는 세계를 뒤흔든 이 붉은 물감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것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첫 번째 단추라는 사실을, 서아는 그 순간 전혀 알지 못했다.

서아는 이안의 봉투를 옆으로 밀어놓고도 곧바로 다시 집지 않았다. 대신 이미 통과권에 올려둔 두 작가의 점수표를 펼쳤다. 기술, 시장성, 전시 안정성, 컬렉터 반응 예상치. 모든 칸이 고르게 높았다. 흠잡을 데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두 포트폴리오를 번갈아 보자 어느 쪽을 먼저 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서아는 연필 끝으로 ‘완성도 우수’라는 문장을 두 번 밑줄 쳤다가 멈췄다.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과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무심코 구겨진 크라프트 봉투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점수표 밖에 있는 물건이 오히려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업무적 호기심이라고 이름 붙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한 뒤에야 서아는 이안의 연락처와 작업실 주소가 적힌 접수 정보를 따로 표시했다.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던 일상에, 치명적인 불씨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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