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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를 내밀자 우시환 대표의 손이 멈췄다.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 가방에 넣을 것 같아서, 책상 가운데까지 밀었다.
3월 3일 화요일 아침. 온빛타워 18층 대표실.
나는 5년 동안 이 책상에 온갖 서류를 올렸다. 일정표, 회의 자료, 출장 결재판. 그중 내 이름이 맨 위에 적힌 서류는 처음이었다.
시환은 펼쳐 놓았던 자료를 덮고 사직서를 읽었다.
소속. 이름. 퇴사 희망일.
그리고 사유.
『대표님』
세 글자였다.
개인 사정이라고 쓸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써도 됐다. 인사팀에서 좋아하는 문장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칸까지 예쁘게 정리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시환의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대표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몇 분이 지났는지 알고 있었다.
3초쯤 뒤, 시환이 고개를 들었다.
“수리합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당연히 수리해야 했다. 붙잡으면 곤란했다. 곤란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바로 끝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인수인계는 이번 달 말까지 마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3월 31일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인사팀에 전달하겠습니다.”
“원지유 씨.”
손목에서 시선을 떼었다.
시환은 사직서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늘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손목이 보였다.
“네, 대표님.”
“일정은 인사팀과 정하십시오.”
“네.”
더 기다릴 말은 없었다.
나는 결재판을 품에 붙이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을 닫은 뒤에도 손잡이를 잠깐 놓지 못했다.
‘끝. 됐다.’
손잡이를 놓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내 자리로 돌아오니 어제 수정한 일정표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3월 2일 월요일 저녁.
『맞선』
직접 적어 넣은 두 글자였다.
장소를 확인하고, 이동 시간을 비우고, 앞선 회의가 길어지지 않게 자료까지 정리했다. 그 일을 다 끝낸 뒤에야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소개받을 상대의 이름보다 저녁 일정 옆에 적힌 말이 오래 보였다.
그때 사직서를 열었다.
종이달 경력 공채 합격 안내는 이미 받아 두었다. 입사할지 묻는 연락에도 답했다. 필요한 건 제출 버튼이 아니라 대표실까지 걸어갈 용기였다.
그 용기가 하필 맞선 일정에서 나왔다.
나는 화면을 닫고 남은 인수인계 목록을 열었다.
이번에는 손이 제대로 움직였다.
▲
인사팀장은 내 사직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원본은 여기서 보관해요. 사본 필요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표님이 결재란 옆에 뭘 적으시던데.”
서류를 정리하던 인사팀장의 손이 잠깐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뭘요?”
“작게 쓰셔서. 확인하고 알려 줄까요?”
“아니요.”
너무 빨리 대답했다.
인사팀장이 나를 봤다. 나는 무릎 위 가방 손잡이를 바로 잡았다.
“수리하셨으면 됐습니다.”
사직서는 다른 서류 사이로 들어갔다. 결재란도, 그 옆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무엇이 적혔는지 보지 못했다.
3월 31일 화요일, 내 책상을 비웠다.
인수인계 자료는 회사에 남겼다. 일정 파일도, 거래처 문서도, 서랍 열쇠도. 상자에 넣은 것은 내 컵과 손목 받침, 그리고 종이달 다이어리 다섯 권이었다.
해마다 한 권씩 썼다.
회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말, 약속을 잡을 때 조심할 점, 거래처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려고 적은 특징. 내 손으로 적은 메모가 다섯 권을 채웠다.
맨 아래 다이어리의 모서리가 눌리지 않게 상자 안쪽으로 밀었다.
그 위에 검정 재킷을 접어 얹었다.
마지막으로 명패를 떼었다.
『대표이사 비서 원지유』
명패를 뒤집어 상자에 넣었다.
▲
5월 4일 월요일, 종이달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솔숲길의 3층 벽돌집은 공고에 올라왔던 사진보다 창문이 컸다. 1층 문 안쪽으로 종이 상자가 쌓여 있었고, 계단 위에서는 뭔가 끄는 소리가 났다.
물결동 집에서 걸어오니 딱 좋은 거리였다.
이제 출근길에 대표님의 아침 일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차가 막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었다.
대신 내 신발 끈이 풀렸다.
‘좋네. 내 일정부터 엉망이네.’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끈을 묶었다. 일어날 때 상자 안에서 다이어리가 움직였다. 종이 모서리끼리 부딪치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문 옆 안내판을 확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서 짧은 머리에 색 핀을 꽂은 사람이 나를 봤다.
“혹시 원지유 대리님?”
“네. 오늘부터 출근하는 원지유입니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김은채예요. 상자 무겁죠? 이쪽으로 주세요.”
은채가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어디에 놓으면 될까요?”
“안쪽 책상요. 제가 길을 먼저 치울게요.”
은채는 발밑에 놓인 포장재를 옆으로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프린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화로 납기일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펼친 종이 위에 손바닥을 대고 색을 비교했다.
내 책상에는 빈 서류 받침과 새 명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여기가 대리님 자리예요. 의자 높이 안 맞으면 말씀하세요. 밑에 손잡이가 좀 뻑뻑해서.”
“감사합니다.”
상자를 내려놓자 은채가 명함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미리 준비했어요. 첫날부터 명함 받는 사람 별로 없는데.”
뚜껑을 연 은채의 입이 멈췄다.
나는 명함보다 은채를 먼저 봤다.
“왜요?”
“어떡하지.”
은채가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한』
직급도, 부서도 맞았다.
이름이 나를 빼고 맞았다.
‘첫 출근. 새 직장. 새 사람.’
너무 새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최종 파일을 제대로 못 봤어요. 인쇄 전에 확인했어야 했는데.”
은채는 곧바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랍을 열더니 수정액을 들고 왔다.
나는 수정액과 명함을 번갈아 봤다.
은채도 자기 손을 봤다.
“이걸로 고칠 건 아니고요. 저도 왜 이걸 집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웃음이 났다.
“한 글자 차이로 다른 사람이 됐네요.”
“다시 신청할게요. 이건 외부에 쓰지 마세요.”
“네. 오늘은 원지유라고 직접 인사하죠.”
은채는 수정액을 내려놓고 명함 상자를 챙겼다. 대충 고쳐 쓰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 주문 파일을 열고,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원. 지. 유. 이번에는 대리님도 같이 확인해 주세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예요.”
은채가 그제야 어깨를 내렸다.
나는 상자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섯 권을 책상 옆에 세우자 높이가 조금씩 달랐다. 많이 펼친 책은 등 부분이 벌어져 있었다.
“전부 우리 거네요?”
은채의 눈이 다이어리로 갔다.
“네. 쓰던 것들이에요.”
“이걸 다 채우셨어요?”
“빈칸도 있어요.”
“저는 앞부분만 예쁘게 쓰고 뒤는 거의 비어 있거든요.”
“앞부분이라도 예쁘면 됐죠.”
“제 것보다 대리님 게 훨씬 열심히 산 것 같아요.”
나는 가장 두꺼운 다이어리를 안쪽으로 밀었다.
열심히는 썼다. 한 사람의 일정에 맞춰서.
이번 책상에서는 다른 걸 적을 생각이었다.
▲
“지유 씨 왔어요?”
곱슬 단발의 여자가 종이를 든 채 다가왔다. 작업복 앞에 작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면접에서 봤던 채보경 대표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인사부터 하고 나서 속으로 멈칫했다.
‘다른 대표님. 괜찮아. 흔한 호칭이야.’
채 대표는 내 책상과 옆에 세운 다이어리를 살피더니 웃었다.
“오자마자 우리 제품 검사하는 줄 알았네. 은채 씨가 자리 잘 알려 줬죠?”
“네. 명함도 확인했습니다.”
은채가 뒤에서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덧붙였다.
“수정해서 새로 신청해 주신다고 했어요.”
“어떡해. 이름 틀렸어요?”
“네. 제가 마지막에 놓쳤어요. 새 파일은 대리님이랑 같이 확인했어요.”
“그럼 됐어요. 이번에는 제대로 나오게 해요.”
채 대표는 내게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출시 일정 자료예요. 규민 팀장님이 설명해 줄 거예요. 오늘은 읽어 보고, 이해 안 되는 것부터 물어봐요.”
나는 종이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우린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맡는 일이 딱 나뉘지는 않아요. 그래도 지유 씨는 브랜드팀이에요. 대표 옆에 붙어 있을 필요 없어요.”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 대표는 이미 다른 책상의 시안을 보고 있었다.
“은채 씨, 이 색은 실물로도 보여 줘요. 우리 거 예쁘잖아. 사진이 못 따라오면 아깝지.”
“대표님, 그래서 지금 뽑고 있었어요.”
둘의 말이 오가는 동안 나는 받은 종이 맨 위를 읽었다.
출시 일정. 거래처 진행 현황. 팝업 준비.
내가 맡을 일이 적혀 있었다.
온빛에서는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다음 말이 비슷했다. 대표님 일정, 대표님 자료, 대표님 손님.
여기서는 내 앞에 제품명이 놓였다.
“원지유 대리님.”
고개를 들었다.
둥근 안경을 쓴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브랜드팀장 전규민입니다. 면접 때 뵀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우선 자리에 필요한 게 있는지부터 확인하시고요. 자료는 같이 보죠.”
규민 팀장이 옆에 의자를 당겼다. 나는 안경을 꺼내 쓰고 서류를 펼쳤다.
팀장은 내가 담당할 칸을 손끝으로 짚었다.
“출시 일정 관리하고, 거래처 연락하고, 팝업 준비하는 일까지요. 오늘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만 보시면 됩니다.”
“거래처 쪽은 인계받을 연락 내용도 있나요?”
“있습니다. 관련 메일도 공유해 드릴게요.”
나는 서류 여백에 표시했다. 연락이 필요한 일과 내부에서 먼저 확인할 일을 나눴다.
규민 팀장이 내가 짚은 칸을 봤다.
“그건 오전 회의 끝나고 같이 확인해요.”
“네.”
당장 잘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알아야 할 것을 물었다. 누구에게 확인해야 하는지, 변경된 일정은 어디에 남기는지. 팀장은 하나씩 답했고, 모르는 것은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서류를 넘길수록 출근했다는 실감이 났다.
면접에 붙었다는 안내보다, 책상에 앉아 질문하는 지금이 더 확실했다.
연봉은 4,200만 원에서 3,900만 원이 됐다. 계약서를 쓸 때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잘못 읽은 게 아니었고, 그래도 서명했다.
명함에는 이름까지 잘못 나왔지만.
‘괜찮아. 그건 고칠 수 있어.’
나는 명함이 있던 자리에 출시 일정 자료를 놓았다.
▲
오전 회의는 3층이었다.
은채가 자료를 챙기면서 내 쪽을 봤다.
“대리님, 컵 들고 올라가세요. 오늘은 회의가 조금 길 수도 있대요.”
“첫날부터요?”
“대표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요. 저도 뭔지는 몰라요.”
나는 빈손으로 일어나려다가 책상 위 자료를 챙겼다.
습관대로 회의 참석자를 먼저 세려다 그만뒀다. 내가 자리를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대표가 앉을 방향도 정하지 않아도 됐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자료만 다시 확인했다.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종이달은 나까지 직원 28명이었다. 서로 자리를 조금씩 당겨 주며 앉았고, 늦게 들어온 사람은 벽 쪽 의자를 가져왔다.
나도 문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은채가 옆으로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제대로 찍힌 명함 나오면 제가 제일 먼저 드릴게요.”
“이번엔 원지유 맞죠?”
“네. 다른 사람 안 만들게요.”
나는 웃으며 자료를 펼쳤다.
채 대표가 들어와 앞에 섰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우선 새로 오신 분 소개할게요. 브랜드팀 원지유 대리님이에요.”
의자를 조금 밀고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원지유입니다. 출시 일정과 거래처 업무를 잘 익혀서 도움이 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인사가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비서 경력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누구를 모셨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자 채 대표는 손에 든 서류를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오늘 꼭 말씀드릴 게 있어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우리 대주주가 바뀌었어요.”
나는 펼친 자료에서 손을 뗐다.
면접 때 투자 이야기를 들었다. 유통망을 넓히려면 자금과 협력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새 투자자가 들어온다는 말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채 대표가 말을 이었다.
“온빛이에요.”
서류 끝을 다시 잡았다.
엄지로 누른 곳이 조금 구겨졌다.
‘온빛.’
서울에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문구를 파는 곳도, 유통하는 곳도 많았다. 꼭 내가 나온 회사일 필요는 없었다.
은채가 내 쪽을 잠깐 봤다.
나는 고개를 숙여 구겨진 모서리를 폈다.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채 대표가 문 쪽을 확인했다.
“오늘 오셔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로 했어요.”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려다 손을 내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 버릇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온빛이라고 모두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직원만 410명이었다.
투자 담당자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임원일 수도 있었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걷어 올린 셔츠 소매가 먼저 보였다.
그다음에는 내가 5년 동안 아침마다 확인했던 얼굴.
우시환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그 눈이 회의실을 한 바퀴 돌다 내게서 멈췄다.
‘아니. 아니지. 왜.’
(1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