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환의 시선이 내 앞에 놓인 자료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나는 구겨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펴는 건 포기했다. 더 구기지만 않으면 됐다.
“이쪽에 앉으세요.”
채 대표가 자기 옆의 빈 의자를 당겼다. 시환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온빛 대표실에서 보던 그 셔츠였다. 소매는 걷혀 있었고, 손목에는 익숙한 시계가 있었다.
다른 것은 책상이었다.
여기 회의실 책상은 가운데에 종이 색을 비교하다 생긴 얼룩이 있었다. 시환은 그 얼룩 옆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왜 저렇게 자연스럽지.’
나는 첫날부터 명함 이름도 틀렸는데.
저 사람은 남의 회사에 들어와 의자부터 맞았다.
“온빛 대표이사 우시환입니다.”
시환이 사람들을 둘러봤다.
“오늘부터 온빛이 종이달 지분 70퍼센트를 보유합니다. 인수 금액은 48억 원입니다.”
옆자리에서 누군가 숨을 작게 들이켰다. 맞은편 사람은 자료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나는 숫자보다 이름을 보고 있었다.
회의실 앞에 놓인 문서에도, 채 대표 옆에 앉은 사람에게도 온빛이 붙어 있었다.
종이달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그런데 전 직장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대표는 채보경 대표님이 계속 맡습니다.”
시환이 말을 이었다.
“제품 개발과 운영 방식도 종이달이 결정합니다. 이번 인수를 이유로 한 직원 구조조정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움직였다. 멈췄던 자료가 다시 넘어갔다.
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계약할 때부터 확인했어요. 우리 제품은 우리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니까요.”
뒤쪽에 앉은 직원이 손을 들었다.
“거래처에 보내는 계약서도 대표님 이름으로 나가는 건가요?”
“네. 기존대로 제 이름으로 나가요.”
채 대표가 답한 뒤 시환을 봤다.
시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달의 계약과 업무 결재는 기존 체계를 유지합니다. 온빛에서 건별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제야 앞에 놓인 안내 자료를 제대로 읽었다.
대주주 변경. 대표이사 유임. 운영 체계 유지.
내가 방금 들은 말이 짧게 적혀 있었다.
“그럼 우 대표님은 여기서 어떤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다른 직원이 물었다.
나는 자료에서 시선을 떼었다.
알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다만 첫날부터 내가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사회 의장을 맡습니다.”
시환이 답했다.
“대표이사직은 맡지 않습니다. 온빛과의 사업 협력에 필요한 사항을 살피겠습니다.”
은채가 내 옆에서 안내 자료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작은 글씨로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사회 의장 우시환』
나는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대표가 아니라 의장.
호칭 하나가 바뀌었다고 저 얼굴이 낯설어지지는 않았다.
채 대표는 직원들이 자료를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누군가 계약 조건을 물으면 해당 쪽을 펼쳤고, 바로 답하기 어려운 내용은 확인해서 공유하겠다고 했다.
내가 온빛에서 보던 인수 보고와 달랐다.
여기서는 새 주주의 이름보다 다음 달에도 지금 책상에 그대로 앉는지가 먼저였다.
시환은 질문이 끝날 때마다 짧게 답했다. 필요하면 서류를 펼쳤다. 시선이 내 쪽으로 올 때마다 나는 자료를 봤다.
‘읽어. 읽으면 돼.’
덕분에 대표이사 유임이라는 문장은 거의 외웠다.
▲
전체 설명이 끝난 뒤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 대표가 남은 서류를 모으며 말했다.
“마지막 확인 서류에 서명만 하고 마칠게요. 브랜드팀은 배포 자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규민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의자를 안으로 당기고 앉아 있었다.
시환은 가방을 열었다.
서류철이 나올 줄 알았다.
먼저 나온 것은 작은 플라스틱 통이었다.
빨간 인덱스 탭.
뚜껑 모서리를 보고 내 손이 멈췄다. 온빛에서 내가 쓰던 바로 그 모양이었다. 단단한 통에 들어 있어서 가방에 넣어도 구겨지지 않던 종류.
나는 중요한 조항에만 빨간 것을 붙였다.
회의 시간이 밀렸을 때도, 계약서 페이지가 섞였을 때도 눈에 잘 들어와서였다.
시환이 통을 열었다.
안에 남은 탭은 많지 않았다.
‘저걸 직접 쓴다고?’
온빛에서는 내가 표시해서 올렸다.
시환은 읽고, 질문하고, 서명했다. 필요한 쪽을 찾는 일은 거의 내 몫이었다.
지금은 시환의 손끝이 얇은 탭 하나를 떼어 냈다.
그 손이 내가 보고 있는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나는 괜히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조항입니다.”
시환이 표시한 부분을 채 대표 앞으로 돌렸다.
“운영 권한 유지에 관한 문구는 최종본과 같습니다.”
채 대표는 서류를 가까이 당겨 읽었다.
“네. 제가 확인한 그대로네요.”
“이쪽은 직원 고용 유지입니다.”
시환이 다음 서류를 펼쳤다.
채 대표는 앞뒤 쪽을 함께 확인했다. 시환은 기다렸다.
급한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나는 저 기다리는 자세를 알고 있었다. 손을 서류 위에 얹고, 상대가 읽을 때 말을 붙이지 않는 것.
다만 나를 기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 기다리는 사람은 채 대표인데.
‘아니. 거기까지 가지 마.’
시환이 서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채 대표가 서명할 곳을 찾다가 손을 봤다.
“저분 버릇인가.”
작은 목소리였는데 가까운 자리에서는 들렸다.
시환의 손이 멈췄다.
채 대표는 웃으며 서류 아래를 짚었다.
“아, 여기네요. 제가 자꾸 날짜 칸을 놓쳐서.”
시환은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조금 더 돌려 줬다.
나는 내 손을 무릎으로 내렸다.
온빛에서도 저 소리를 자주 들었다. 결재하기 전, 자료를 읽고 난 뒤, 내가 문 앞에서 다음 말을 기다릴 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빨리 넘기라는 뜻도 아니었고, 틀렸다는 뜻도 아니었다. 저 소리 뒤에 반려된 서류도, 바로 통과한 서류도 있었다.
그냥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채 대표가 서명을 마쳤다. 시환도 자기 앞의 문서에 서명했다.
직원들에게 배포할 자료가 책상 끝에 남아 있었다.
시환이 한 부를 집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받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원지유 씨 자료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받았다.
종이 아래를 잡는 순간 시환의 손끝이 내 검지 끝에 짧게 닿았다. 나는 서류를 당겼고, 시환은 곧바로 손을 뗐다.
손가락이 따뜻했다.
나는 차가웠다. 아침부터 서류만 만졌는데 그걸 이제 알았다.
“감사합니다.”
종이를 내려놓고 손끝을 엄지로 눌렀다.
시환은 빈손을 가방 쪽으로 돌렸다.
빨간 탭 통이 다시 들어갔다.
내가 보던 그 통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려 했지만 가방이 먼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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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계단 쪽으로 몰렸다.
규민 팀장은 채 대표와 남은 자료를 정리했고, 은채는 출력물을 들고 먼저 내려갔다.
나도 자료를 품에 붙이고 문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 시환이 직원 한 명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나는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지유 씨.”
발이 멈췄다.
몸보다 먼저 돌아갈 뻔한 대답을 삼켰다.
네, 대표님.
그 말부터 하는 건 오늘 그만하고 싶었다.
직원이 계단을 내려갔다. 열린 회의실 안에서 종이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는 나와 시환만 남았다.
시환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문 옆에서 나를 봤다.
“첫 출근은 어떻습니까.”
나는 품에 안은 자료를 내려다봤다.
지금 묻기에는 꽤 어려운 질문이었다.
명함 오타까지는 괜찮았다.
전 직장 대표가 새 직장 대주주로 나타난 것부터는 첫 출근 감상에 넣기 힘들었다.
“아직 오전이라서요.”
“그렇군요.”
시환은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내가 말하게 했다.
“저 여기 브랜드팀 대리예요.”
“압니다.”
“비서 아니에요.”
자료 위에 놓인 내 손가락이 벌어졌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채 대표도 소개했고, 내 앞 자료에도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하지 않으면 다시 내가 일정을 확인하고 서류를 챙길 것 같았다.
“돌아오라는 말 아닙니다.”
시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따라온 겁니다.”
복도 아래에서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출력물을 빼 달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잠깐.’
들었다. 정확히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시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방금 인수 금액을 말할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당신 상사가 아닙니다.”
내 시선이 시환의 손으로 내려갔다.
빈손이었다. 내게 맡길 결재판도, 수정할 일정표도 없었다.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자료를 조금 느슨하게 안았다.
그러다 다시 힘을 줬다.
회사 복도였다. 첫 출근 날이었다. 내가 할 일은 2층 책상 위에 기다리고 있었다.
말 하나로 그걸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여기서 제 일을 하러 왔어요.”
“압니다.”
“대표님 일정을 확인하지 않을 거예요.”
“확인하지 마십시오.”
너무 바로 답했다.
내가 준비한 다음 말이 없어졌다.
‘좋아. 그건 확인.’
나는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열었다.
“지금은 내려가 봐야 해요. 인계받을 게 남아서요.”
시환이 계단 쪽에서 반걸음 물러났다.
“네.”
정말 비켜 줬다.
붙잡지도, 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시환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세 번째 계단쯤에서 속도가 빨라지는 걸 알고 다시 늦췄다.
넘어지면 곤란했다.
첫날부터 전 직장 대표 앞에서 넘어지는 건 더 곤란했다.
▲
내 책상에는 메일로 받은 자료 목록이 열려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첫 파일을 눌렀다.
규민 팀장이 잠시 뒤 내려왔다.
“많이 놀라셨죠?”
마우스 위의 손이 멈췄다.
팀장은 자기 의자를 당겨 앉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첫날부터 대주주 변경 설명까지 들어서요. 미리 충분히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투자 이야기는 들었어요.”
“최종 안내는 오늘 같이 하기로 해서요. 우선 업무는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팀장이 내가 펼친 자료를 봤다.
“지금은 거래처별 진행 상황부터 보시면 됩니다.”
나는 의자를 책상 가까이 당겼다.
그 말이 필요했다.
따라온 사람이 있다는 말보다, 내가 볼 자료가 정해져 있다는 말.
“메일에 적힌 납기와 이 표의 날짜가 다른 건 변경 이력이 따로 있나요?”
“그건 뒤에 공유한 메일에 있을 겁니다. 같이 볼까요?”
팀장이 화면을 가리켰다.
나는 해당 메일을 열었다. 날짜가 바뀐 이유와 확인한 사람이 적혀 있었다.
새 파일을 만들기보다 우선 받은 자료에 표시했다. 어디까지 확인했고, 무엇을 더 물어야 하는지.
손이 움직이니 복도에서 들은 말이 조금 멀어졌다.
한 번에 멀어지지는 않았다.
파일을 저장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따라온 겁니다.
‘저장. 일단 저장.’
파일 이름을 확인하고 버튼을 눌렀다.
그때 화면 아래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김은채: 저분이랑 아는 사이예요? 눈이 대리님한테만 가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은채는 자기 자리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출력물로 입을 가렸다.
회의실에서 내 얼굴을 보더니, 질문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답을 적었다.
『원지유: 전 직장 대표님이에요.』
보내고 창을 닫았다.
곧 옆자리 의자가 조금 움직였다.
은채가 출력물을 내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해요?”
“저도 아직.”
대답하다 멈췄다.
은채가 내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는 의장님이라고 하면 되겠죠?”
“네.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대리님은요?”
나는 자료 맨 위의 이름을 봤다.
이사회 의장 우시환.
“저도 그렇게 부르면 되죠.”
말하고 나니 이상했다.
대표님은 입에서 바로 나오는데, 의장님은 한 번 확인해야 나왔다.
은채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내 책상 옆에 있는 빈 받침을 가리켰다.
“거기 서류 넣으시면 앞으로 쏟아져요.”
“네?”
“뒤에 받치는 게 빠졌어요. 제가 아침에 자리 정리하면서 못 봤네요.”
은채가 자기 책상 아래에서 작은 부품을 꺼냈다.
나는 자료를 들어 줬고, 은채는 받침 뒤에 부품을 끼웠다. 한 번 흔들어 본 뒤 손을 뗐다.
“이제 괜찮아요.”
서류를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똑바로 섰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름도 받침도 자꾸 빠지네요.”
“이름은 새로 만들어 주신다면서요.”
“그건 확실하게 넣어 드릴게요.”
나는 웃으며 맨 위 자료를 다시 펼쳤다.
은채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후에는 짧은 전화가 여러 번 왔다. 내가 바로 답할 수 없는 것은 규민 팀장에게 확인하고 메일에 남겼다.
누군가 대표님을 찾는 전화도 있었다.
나는 잠깐 멈춘 뒤 채 대표 자리로 연결했다.
그동안 내 손은 온빛 대표실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아침에 받은 자료를 종류별로 나눴다.
출시 일정은 위에.
거래처 진행 상황은 그 아래.
아직 확인하지 못한 내용은 따로 뒀다. 내일 규민 팀장에게 물어볼 순서도 정했다.
잘못 나온 명함은 은채가 가져갔으니 책상에는 내 이름이 적힌 것이 많지 않았다.
대신 메일 계정과 메신저에는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
원지유. 브랜드팀 대리.
나는 화면에 뜬 부서를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컵을 씻고 돌아오니 시계가 퇴근 10분 전을 가리켰다.
시환이 어디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정을 확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첫날에는 지켜야 했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펼쳐 둔 다이어리를 덮으려는데 화면 아래에 새 알림이 떴다.
보낸 사람 이름부터 알아봤다.
우시환 대표이사.
메신저에는 아직 온빛 직함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알림을 누르지 않고 잠깐 손을 뒀다. 미리 보기만으로도 문장이 전부 보였다.
퇴근 뒤 10분.
그 아래에는 업무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거절해도 되는 부탁인지부터 확인하려던 손이 멈췄다.
아까 복도에서 내가 내려가겠다고 하자 비켜 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고 알림을 눌렀다.
‘업무 아니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우시환 대표이사: 퇴근 뒤 10분. 업무 아닙니다.』
(2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