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시환이 남겨 둔 자리로 지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2층으로 가는 소리였다.
‘출근. 진짜 출근.’
사무실에 들어서자 은채가 고개를 들었다.
“의장님, 출입증 책상 위에 놨어요.”
“감사합니다.”
시환은 창가로 갔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당겼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
저쪽에서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고, 이쪽에서는 거래처 메일을 열었다.
모니터 위로 고개를 내밀면 바로 보이는 거리였다.
나는 화면의 글자 크기를 키웠다.
‘일해. 글자 봐.’
▲
목요일 아침, 규민 팀장이 내 책상 앞에 자료를 내려놓았다.
“오늘 첫 브랜드팀 회의예요. 하반기 다이어리 출시 일정부터 볼게요.”
종이 위에는 날짜가 빽빽했다. 지워진 날짜 옆에 새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시 화살표가 있었다.
“어느 게 최신이에요?”
“파일은 이게 최신인데요.”
규민 팀장이 맨 아래를 짚었다.
“어제 인쇄소에서 연락이 와서 여기만 바뀌었어요. 아직 반영을 못 했습니다.”
나는 안경을 썼다.
디자인 최종본 전달일과 종이 입고일 사이가 좁았다. 인쇄 시작일 옆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거래처에 보낸 일정도 이거예요?”
“거래처마다 조금 달라요. 필요한 날짜가 다르거든요.”
규민 팀장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 한번 맞추려고요.”
나는 자료를 모아 들었다.
한번 맞춘다는 말은 쉬웠다.
한번에 맞을지는 종이를 봐야 알았다.
은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컵을 세었다.
“대표님, 커피 드시죠?”
“응. 진하게.”
채 대표는 작업복 앞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고 회의 자리로 왔다. 은채는 규민 팀장과 나를 보고 손가락을 접더니 창가 쪽을 봤다.
“의장님도 커피 드세요?”
시환은 펼쳐 놓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옥수수차 있으면 그걸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안 마신다.
커피는 안 마신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낯설었다.
“옥수수차가 어디 있어요.”
은채가 탕비실 쪽을 올려다봤다.
“녹차는 있는데. 한번 찾아볼게요.”
“없으면 물이면 됩니다.”
시환이 말했지만 은채는 이미 컵을 들고 계단으로 갔다.
나는 가방을 봤다.
옆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됐다. 위치까지 알았다.
넣어 둔 사람이 나였으니까.
‘이걸 왜 아직 들고 다니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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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비실에 올라갔을 때 은채는 찬장 아래 칸을 열고 있었다.
“대리님, 혹시 여기서 옥수수차 보셨어요?”
“여기 말고요.”
나는 가방에서 티백을 꺼냈다.
은채의 손이 찬장 문을 잡은 채 멈췄다.
“가지고 다니세요?”
“전 직장에서요.”
“아.”
그 한마디 뒤에 질문이 더 붙을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컵 옆에 티백을 놓았다.
“커피 말고 다른 걸 드시는 분이 있어서요.”
“대리님은 커피 드시잖아요.”
“네.”
말이 아주 짧게 끝났다.
은채는 티백을 집어 포장을 살폈다.
“그럼 이거 의장님 취향이에요?”
나는 찬장 문을 닫았다.
“회의 시작하겠어요.”
은채는 입술을 한번 다물었다. 웃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물은 제가 부을게요. 대리님은 커피 가져가세요.”
나는 컵 두 개를 들었다.
온빛에서는 내가 차를 준비하고, 내가 들고 들어가고, 내가 빈 컵을 가져왔다. 여기서는 티백을 건네자 일이 끝났다.
나쁘지 않았다.
손이 조금 남는 것도.
은채가 찻잔을 따로 받침에 올렸다.
“의장님은 커피를 아예 안 드세요?”
“제가 있는 동안은 안 드셨어요.”
“속이 안 좋으신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5년 동안 종류와 진하기는 알았다.
이유는 몰랐다.
물을 붓는 소리가 잠깐 커졌다. 나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다봤다.
커피 표면이 흔들렸다.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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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2층 사무실에서 했다.
자료를 바로 열어 봐야 해서 각자 의자를 돌려 가운데 책상에 모였다. 창가의 시환도 고개를 돌렸지만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다.
채 대표가 먼저 말했다.
“의장님은 참관만 하세요. 일정은 우리가 정하고요.”
“네.”
짧은 대답 뒤에 시환은 컵을 받았다.
은채가 내 쪽을 한번 봤다.
나는 자료를 넘겼다.
‘말하지 마. 넘겨.’
규민 팀장은 출시 일정표를 가운데 놓았다.
“디자인 수정이 조금 밀렸고, 종이 입고도 공급처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인쇄소는 다른 작업이 잡혀 있어서 우리가 늦으면 순서가 뒤로 가고요.”
은채가 자기 자료를 펼쳤다.
“수정본은 예정대로 보내요. 다만 표지 색 확인은 실물로 해야 해요. 화면에서 확정하면 안 돼요.”
“그건 맞아.”
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화면에서는 괜찮았는데 찍고 보니까 달랐잖아.”
규민 팀장이 인쇄소 일정 옆에 표시했다.
나는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브랜드팀 일정.
인쇄소 일정.
거래처 납기 요청.
날짜는 모두 있었다.
서로 만나지만 않았다.
“팀장님, 여기 거래처에 전달하기로 한 견본은 실물인가요?”
“네. 매장 진열 검토용이요.”
“그런데 견본 발송이 표지 색 확인보다 먼저예요.”
규민 팀장이 자기 자료를 당겼다.
은채도 의자를 가까이 붙였다.
“그건 수정 전 일정일 거예요. 제가 색 확인을 뒤로 옮겼거든요.”
“거래처 쪽에는 아직 안 옮겨졌네요.”
규민 팀장이 메일을 열었다. 잠깐 읽더니 안경을 올렸다.
“맞아요. 견본을 먼저 보내 달라고 해서 그 날짜만 남겨 뒀네요.”
“먼저 보낼 수 있는 견본이 따로 있어요?”
내가 묻자 채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작년 건 있어도 이번 건 없죠.”
나는 견본 발송일 옆에 표시했다.
규민 팀장이 다른 자료를 넘겼다.
“그럼 이쪽도 바꿔야겠네요. 이 거래처는 견본 보고 수량을 정한다고 했어요.”
은채가 종이 입고일을 짚었다.
“그런데 견본 만들 종이는 이때 와요.”
잠깐 조용해졌다.
채 대표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떡해.”
처음 듣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자료를 보고 그 말을 할 뻔했다.
‘아니. 날짜가 다 있는데. 되는 날짜가 없어.’
나는 빈 종이를 꺼냈다.
“한 장에 같이 적어 봐도 될까요?”
규민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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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출시일부터 적지 않았다.
종이가 들어오는 날부터 적었다.
온빛에서는 대표 일정이 바뀌면 그 앞뒤를 같이 봤다. 회의가 끝나야 차가 출발하고, 이동이 끝나야 다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종이도 먼저 와야 했다.
그다음에 찍고.
확인하고.
다시 찍었다.
“종이 입고는 확정인가요?”
“공급처 답은 받았어요.”
“인쇄소에 전달한 날짜와 맞는지 확인할게요.”
규민 팀장이 메일을 돌려 보여 줬다. 나는 첨부 파일의 날짜와 일정표를 대조했다.
달랐다.
바뀐 일정은 브랜드팀에 왔고, 인쇄소에는 이전 일정이 남아 있었다.
“인쇄소가 시간을 비워 둔 날에는 종이가 없네요.”
규민 팀장이 입술을 눌렀다.
“제가 공급처 답을 기다리다가 전달을 놓쳤어요.”
“그럼 작업 순서를 다시 잡아야겠어요.”
나는 아직 확정하지 않은 칸을 비워 뒀다.
은채가 디자인 파일 전달일을 알려 줬다. 채 대표는 실물 색 확인에 필요한 작업을 말했다. 규민 팀장은 거래처마다 먼저 받아야 하는 자료를 골랐다.
나는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전부 완성된 견본이 필요한 건 아니네요?”
“네. 어떤 곳은 제품 소개 자료만 먼저 받아도 돼요.”
“그쪽은 자료부터 보내고, 실물은 가능한 날짜를 따로 안내하면 어떨까요?”
규민 팀장이 거래처 목록을 살폈다.
“그렇게 나눌 수 있어요.”
은채가 바로 자기 화면을 돌렸다.
“소개 자료는 제품 사진 들어갈 자리만 비어 있어요. 나머지는 먼저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사진 촬영일은 실물 확인 뒤로 둘게요. 앞에 적힌 날짜는 지우고요.”
채 대표가 빈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그러면 수정할 시간이 남아요?”
나는 색 확인과 최종 전달 사이를 가리켰다.
“이 사이에는 다른 작업을 넣지 않으려고요. 확인하자마자 최종본을 보내는 일정이면 한 번만 수정해도 다 밀려요.”
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은 있어야 해요. 예쁘게 나와야 하니까.”
규민 팀장은 내 옆에서 바뀐 내용을 파일에 옮겼다.
나는 거래처 요청을 옆에 적었다.
요청한 날과 약속한 날을 구분했다.
두 날짜를 한 칸에 넣어 놓으니, 부탁이 어느새 확정이 되어 있었다.
“이건 아직 수락 답장을 안 보내신 거죠?”
“네. 가능 여부 확인한다고만 했어요.”
“그럼 내부 일정부터 정하고 답하면 되겠네요.”
규민 팀장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러네요. 계속 그 날짜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빈칸을 하나 남겼다.
인쇄소에서 확인받아야 할 자리였다.
종이를 건네려다 창가 쪽이 보였다.
시환은 컵을 내려놓고 우리가 만든 표를 보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눈을 돌리자 시환도 자기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규민 팀장에게 종이를 건넸다.
“이걸로 인쇄소에 여쭤봐도 될까요?”
“네. 같이 통화해요.”
허락을 받을 사람은 여기 있었다.
내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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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 팀장이 솔숲인쇄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옆에서 바뀐 종이 입고일을 짚었다. 팀장이 그 내용을 전하자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모덕규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날로 바뀌었어요? 그럼 먼저 걸어 둔 시간은 못 써요.”
“네. 전달이 늦었습니다.”
“뒤 작업하고 맞춰 봐야겠네.”
나는 종이 위에 적은 순서를 규민 팀장 쪽으로 밀었다.
팀장이 견본 작업과 본인쇄를 나눠 확인했다. 나는 들리는 답에 맞춰 칸을 채웠다.
가능한 것.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
우리가 먼저 보내야 하는 것.
통화가 끝났을 때 종이에는 빈칸이 하나 남아 있었다.
“본인쇄 시간은 사장님이 확인하고 답 주신대요.”
규민 팀장이 말했다.
“그 칸은 확정 전이라고 적을게요. 거래처에는 아직 완료일 약속하지 않고요.”
나는 아래에 확인할 사람을 적었다.
채 대표는 색 확인.
은채는 디자인 자료.
규민 팀장은 인쇄소 작업 시간.
나는 거래처 안내와 변경 일정 정리.
채 대표가 자기 이름 옆을 보고 웃었다.
“이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보이네요.”
은채도 종이를 들여다봤다.
“저도요. 아까는 전부 급했는데.”
“급한 건 맞아요.”
내가 말하자 은채가 입을 벌렸다.
나는 디자인 전달일을 짚었다.
“대신 이거 먼저 하시면 돼요.”
“그 말이 더 좋아요.”
은채는 자기 자료를 챙겨 자리로 돌아갔다.
규민 팀장은 완성된 표를 한동안 봤다. 지워진 화살표가 아니라 작업 순서대로 내려가는 칸이었다.
“대리님, 전 직장이 뭐였죠?”
나는 펜 뚜껑을 닫았다.
“온빛이요.”
“아니, 회사 말고요. 이런 일정 정리를 맡으셨어요?”
“대표 일정 정리했어요.”
규민 팀장이 창가를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저분 일정이요?”
“네.”
“쉽지 않았겠네요.”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물을 마셨다.
창가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참관만. 아주 잘하시네.’
규민 팀장은 표 맨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걸 기준으로 쓰죠. 파일도 하나로 합치고요. 변경되면 날짜만 바꾸지 말고, 뒤 작업까지 같이 확인하는 걸로.”
“공유 폴더에 올릴게요.”
“거래처 답장 보내기 전에 저한테도 보여 주세요.”
“네, 팀장님.”
그 말은 어렵지 않았다.
말하고 나서도 손목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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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은채가 내 책상에 빈 찻잔을 놓았다.
“이거 대리님께 드리면 안 되죠?”
나는 컵과 은채를 번갈아 봤다.
은채가 바로 컵을 들었다.
“의장님 취향 아셔서 저도 모르게요. 제가 씻을게요.”
“제 컵도 같이 가져가실 거예요?”
“네. 주세요.”
나는 컵을 건넸다.
은채는 양손에 컵을 나눠 들고 계단으로 갔다. 잠깐 뒤에 규민 팀장이 일어나 뒤따랐다.
“혼자 다 들고 올라가면 위험해요. 반은 주세요.”
나는 두 사람을 보고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다.
회의록을 새로 열었다.
『하반기 다이어리 출시 일정 조정 회의록』
참석자를 적고, 결정한 일과 확인 중인 일을 나눴다.
회의에서 나온 말을 전부 쓰지는 않았다.
거래처에 어디까지 안내할지.
누가 무엇을 확인할지.
확인 뒤에 어떤 날짜를 바꿀지.
마지막 칸에는 확정 전인 본인쇄 일정을 남겼다.
오후에 솔숲인쇄의 답이 오자 규민 팀장과 다시 맞췄다. 은채도 자기 작업일을 확인했다. 채 대표가 색 확인 시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빈칸을 채웠다.
규민 팀장이 내 화면을 보고 말했다.
“이대로 공유해 주세요. 대표님이랑 의장님도 같이요.”
나는 받는 사람을 확인했다.
채보경.
전규민.
김은채.
우시환.
마지막 이름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예전에는 저 이름 하나를 위해 회의록을 썼다. 이번에는 우리가 정한 일을 공유하는 목록 끝에 있었다.
나는 파일을 붙이고 전송했다.
곧 은채가 고개를 내밀었다.
“대리님, 수정한 자료도 그 폴더에 넣으면 되죠?”
“네. 이전 자료는 따로 옮겨 둘게요.”
“좋아요. 저 아까 옛날 파일 열었다가 또 헷갈렸어요.”
나는 파일 이름 앞에 붙은 최종이라는 글자를 지웠다.
최종.
진짜 최종.
마지막 최종.
그중 어느 것도 오늘 일정과 같지 않았다.
은채가 내 화면을 보고 작게 웃었다.
“저 이름 붙인 건 제가 아니에요.”
“아직 아무 말씀 안 드렸는데요.”
“미리요.”
나는 날짜가 적힌 파일 하나만 남겼다.
확인.
이제 내일 열어도 헷갈릴 자료가 없었다.
▲
퇴근할 때 시환은 창가 책상에 없었다.
차를 마신 컵도, 펼쳐 둔 서류도 치워져 있었다. 작은 화분 옆에 의자만 들어가 있었다.
나는 가방의 옆주머니를 닫았다.
티백이 하나 줄어 있었다.
5년 동안 이유를 묻지 않고 챙긴 차였다. 오늘도 물을 기회는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 안에서 티백을 꺼내 줬다.
‘습관도 참. 성실해.’
규민 팀장에게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뒷문 마지막 칸에서 발을 한번 확인했다. 밖으로 나가자 골목 끝 인쇄소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가방 안에서 휴대폰가 울렸다.
사내 메신저 알림이었다.
화면을 켜자 보낸 사람과 회의록이라는 글자가 먼저 보였다. 이어 뜬 문장을 읽다가 걸음이 느려졌다.
비서가 아니라 기획자.
나는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니, 회의록을 왜 의장이 보는데.’
같이 보내 달라고 한 건 규민 팀장이었다.
내가 보냈다.
아주 정확하게 보냈다.
그런데 답장 칸을 누르고도 한동안 아무 글자도 쓰지 못했다.
『우시환 대표이사: 회의록 잘 봤습니다. 비서가 아니라 기획자네요.』
(4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