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답장 칸에 감사하다고 썼다가 지웠다.
잘 보셨다는 말에 감사하면 됐다. 틀린 답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획자라는 글자를 다시 읽고 나니 손이 멈췄다.
나는 화면을 끄고 가방 안에 넣었다. 걸음을 떼자 바로 다시 울렸다.
은채였다.
『김은채: 대리님, 새 명함 신청했어요. 이번에는 이름 맞아요. 제가 세 번 봤어요.』
나는 골목 한쪽에 서서 답장을 썼다.
『원지유: 감사합니다. 저도 받으면 세 번 볼게요.』
이건 금방 보냈다.
‘명함은 쉽네. 명함부터 하자.’
▲
5월 11일 월요일, 내 책상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은채가 의자를 밀고 왔다.
“열어 보세요.”
“제 거예요?”
“대리님 이름이잖아요.”
상자 옆면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원지유.
일단 겉은 맞았다.
뚜껑을 열자 흰 명함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맨 위의 한 장을 꺼냈다.
『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유』
나는 이름부터 읽었다. 직함을 보고, 회사 이름을 보고, 다시 이름을 봤다.
은채가 내 손을 살폈다.
“세 번 보셨어요?”
“네. 이번엔 저네요.”
“다행이다.”
은채는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먼저 받은 명함은 원지한이었다. 그때 수정액을 들고 달려온 사람이 이번에는 제대로 찍힌 글자를 내 손끝까지 따라 읽었다.
“틀린 건 제가 회수했어요. 혹시 남아 있으면 주세요.”
“서랍에 있어요.”
나는 서랍을 열어 이전 명함을 건넸다. 은채는 빈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지한 씨는 퇴사 처리할게요.”
“입사도 못 하셨는데요.”
“이름만 출근하셨잖아요.”
나는 웃다가 새 명함을 내려다봤다.
온빛에서는 회사 이름 아래 대표이사 비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명함을 내밀면 상대는 거의 늘 비슷한 질문을 했다.
대표님은 언제 오세요.
대표님 일정은 어떻습니까.
대표님께 전달해 주세요.
이번 명함에는 내가 맡은 팀과 내 직함이 있었다.
나는 한 장을 지갑에 넣고 나머지는 명함집에 옮겼다.
은채가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오늘 가져가실 거죠?”
“네. 처음 쓰겠네요.”
“그러니까 더 확인했어요. 첫 외근인데 다른 이름으로 가시면 안 되잖아요.”
규민 팀장이 자료를 들고 다가왔다.
“글벗문구에는 제가 먼저 연락해 뒀어요. 대리님이 거래처 담당하고, 은채 씨가 디자인 설명 맡는다고요.”
나는 자료를 받았다.
“선주문 수량은 아직 정해진 게 없는 거죠?”
“네. 견본 일정하고 입고 조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오늘 바로 확답 안 하셔도 됩니다.”
“보류된 항목은 따로 적어 오겠습니다.”
규민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채는 자기 가방을 열었다. 표지 색상 자료와 제품 소개서를 꺼내더니 나란히 놓고 다시 확인했다.
“이건 설명용이에요. 실물 색 확정은 아니라고 말씀드릴게요.”
“좋아요. 견본 전달일도 확인받은 날짜만 안내하고요.”
“네.”
창가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 시환은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보는 걸 알았는지 눈을 들었다.
“외근 가십니까.”
“네. 글벗문구요.”
“잘 다녀오십시오.”
그게 전부였다.
어디까지 보고할지, 돌아와서 무엇을 먼저 할지 묻지 않았다.
나는 명함집을 가방에 넣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은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손목시계를 보려다 소매를 도로 내렸다.
시간은 이미 확인했다.
이번에는 누구를 모시고 나가는 게 아니었다.
▲
버스에 앉자 은채가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 올렸다.
“대리님, 명함 처음 받았을 때 어땠어요?”
“방금 받았을 때요?”
“아뇨. 진짜 처음이요.”
“이름이 맞는지 봤어요.”
은채가 나를 봤다.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때는 한 번만요.”
은채는 가방 끈을 접어 넣었다.
“저는 회사 이름이 더 신기했어요. 맨날 쓰던 다이어리에 있는 이름이 제 명함에 있으니까.”
“종이달 쓰셨어요?”
“네. 대학 때부터요. 대리님도 쓰셨죠?”
“저는 대학 1학년 때 처음 샀어요.”
은채의 고개가 바로 돌아왔다.
“그럼 처음 나온 거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지금 것보다 조금 작았고, 뒤에 빈 종이가 많았어요.”
나는 가방 안의 다이어리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처음 산 다이어리는 집에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서 이제는 펼칠 때도 조심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까워서 못 썼어요.”
“알아요. 첫 장부터 잘 쓰고 싶잖아요.”
“그래서 앞은 비워 놓고 뒤부터 봤는데, 손글씨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은채가 눈을 크게 떴다.
“제품 안에요?”
“네. 뒷장에요.”
작은 글씨였다.
인쇄된 줄 알았다가 글자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른 걸 보고 손으로 쓴 걸 알았다.
나는 기억나는 문장을 입으로 옮겼다.
“이 다이어리를 끝까지 쓰는 사람이 되기를.”
은채는 가방 위에 올린 손을 가만히 뒀다.
“그거 좋네요.”
“저도 그 말이 좋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첫 장에 수업 시간을 적었다. 다음 장에는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잘못 적은 날에는 줄을 긋고 옆에 다시 썼다.
그렇게 끝까지 쓴 첫 다이어리였다.
“누가 썼대요?”
“몰라요. 이름은 없었어요.”
“저는 그런 거 못 받았는데.”
은채가 잠깐 입술을 내밀었다.
“한 회사 다니는데 대리님만 받으셨네.”
“제가 먼저 샀으니까요.”
“그건 그렇네요. 오래된 팬 우대.”
“그때는 제가 오래된 팬이 아니었죠.”
“이제 오래되셨잖아요.”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네. 오래됐네. 사람도 명함도.’
은채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나는 가방에서 오늘 가져온 다이어리를 꺼냈다. 미팅 날짜가 적힌 장을 펴자 확인할 항목들이 나왔다.
은채도 자료를 꺼내 무릎 위에 놓았다.
“이건 말씀드려도 되죠? 표지 안쪽까지 한 색으로 맞춘 거.”
“네. 대신 제작 일정은 제가 설명할게요.”
“좋아요. 제가 날짜 말하면 꼭 하루씩 틀려요.”
“날짜는 제가 보고 있을게요.”
은채는 제품 소개서의 끝을 반듯하게 맞췄다.
내릴 정류장 안내가 나오자 나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오래된 편지 이야기는 그 안에 넣어 두고, 오늘 물을 항목을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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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벗문구 본사 미팅 자리에는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나는 자료를 나눠 놓고 명함집을 열었다. 은채가 내 옆에서 표지 자료의 방향을 맞췄다.
잠시 뒤 추만철 구매부장이 들어왔다.
온빛에서 본 얼굴이었다.
납품 관련 회의가 있던 날, 회의실 앞에서 대표 일정이 밀렸다고 안내했었다. 그때 추 부장은 내 명함을 받지 않고 대표가 몇 시에 오느냐고 물었다.
추 부장도 나를 알아봤다.
“온빛 우 대표 비서 아니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유입니다.”
새 명함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추 부장은 명함을 받아 이름보다 회사 쪽을 먼저 봤다.
“비서 하던 분이 왜 이런 작은 데를.”
은채의 손이 옆에서 멈췄다.
나는 웃은 채 명함에서 손을 뗐다.
“종이달 브랜드팀으로 이직했습니다. 출시 일정하고 거래처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온빛이 인수했다면서요. 그래서 오신 건가?”
“경력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추 부장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 명함도 자료 옆에 놓였다.
나는 따라 앉으며 다이어리를 폈다. 은채가 내 쪽을 봤지만 눈을 마주치는 대신 제품 소개서를 가운데로 밀었다.
“오늘은 하반기 다이어리 선주문에 필요한 견본 일정과 입고 조건을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그건 팀장하고 얘기했는데.”
“네. 전달받았습니다. 확정된 내용과 확인이 필요한 내용을 나눠 왔습니다.”
나는 첫 장을 펼쳤다.
추 부장의 시선이 자료로 내려왔다.
“견본은 언제 볼 수 있어요?”
나는 인쇄소와 확인한 날짜를 짚었다.
“이날 전달할 예정입니다. 표지 색 확인을 마친 실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좀 더 빨리는 안 되고요?”
“소개 자료는 먼저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실물은 이 일정으로 확인받았습니다.”
은채가 준비해 온 색상 자료를 꺼냈다.
“이건 디자인 설명용입니다. 실제 인쇄 색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추 부장은 자료를 당겨 살폈다.
“색이 너무 얌전한 거 아닌가. 매장에서는 눈에 띄어야 하는데.”
“표지 안쪽도 같은 색으로 맞췄습니다. 펼쳐 놓는 진열까지 보고 정했습니다.”
은채가 해당 면을 보여 줬다.
추 부장은 손끝으로 표지와 안쪽 자료를 번갈아 짚었다.
“이렇게 들어간다는 거죠?”
“네. 실물 견본에서도 같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질문이 제품 쪽으로 옮겨 갔다.
나는 추 부장이 묻는 순서대로 표시했다. 진열용 소개 자료, 견본 확인, 수량 결정, 매장 입고.
말이 빠를수록 날짜는 천천히 적었다.
추 부장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매장별로 나눠 보내는 건 할 수 있어요?”
“출고 방식 확인이 필요합니다. 보내실 매장 목록과 수량 기준을 주시면 물류비까지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여기서 바로 답해 줘야지.”
나는 다이어리 옆에 자료를 놓았다.
“가능 여부와 비용이 같이 정해져야 해서요. 할 수 있다고만 말씀드리고 나중에 조건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추 부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깐 말이 없었다.
은채가 자료를 넘기려다 내 손을 보고 멈췄다.
나는 추 부장이 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그것도 확인해서 보내요.”
“네. 매장 목록은 어느 쪽으로 요청드리면 될까요?”
추 부장은 내 명함을 집어 들었다.
“이 메일로 보내면 되죠?”
“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명함이 추 부장의 자료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그걸 본 다음에야 다음 항목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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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문 조건은 확정되지 않았다.
추 부장은 견본을 보고 수량을 정하겠다고 했다. 출고 방식도 내부에서 확인한 뒤 전달하겠다고 했다.
나는 빈칸을 그대로 남겼다.
확정되지 않은 칸을 채워 돌아가는 것보다, 누구에게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가는 편이 나았다.
“그럼 견본 확인 전까지 수량은 보류로 적겠습니다.”
“네. 조건도 같이 보죠.”
“오늘 확인한 내용은 정리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자료를 챙기자 추 부장이 내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봤다.
“기록은 꼼꼼하게 하시네. 비서 하셔서 그런가.”
나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네. 지금 맡은 일에도 도움이 됩니다.”
은채가 나보다 먼저 가방을 들었다.
나는 남은 자료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 부장에게 인사한 뒤 회의 공간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은채가 숨을 길게 뱉었다.
“저 아저씨 뭐예요.”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목소리 조금만 낮춰요.”
은채가 입을 다물었다가 작게 다시 말했다.
“비서 하던 분이 왜 작은 데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전에 맡은 일하고 여기 규모를 말한 거죠.”
“좋게 말해 주지 마세요.”
“좋게 말한 건 아니에요.”
나는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었다.
“대답을 거기까지만 한 거예요.”
은채는 닫힌 문을 한번 돌아봤다.
“대리님이 일정 다 정리한 건 모르면서.”
“자료는 가져가셨어요.”
“그래도요.”
“명함도 가져가셨고요.”
은채의 눈이 내 명함집으로 내려왔다.
나는 뚜껑을 닫았다.
“다음에 연락 오면 제 이름으로 받을 거예요.”
은채는 잠깐 입을 다물고 걷다가 내 옆으로 붙었다.
“그럼 제가 아까 설명한 건 잘했어요?”
“네. 실물 색은 확정이 아니라고 먼저 말씀드린 것도 좋았어요.”
“제가 말 길어질까 봐 중간에 끊으신 줄 알았어요.”
“날짜는 제가 설명하기로 했잖아요.”
“맞다.”
은채는 가방에서 접힌 소개서 한 장을 꺼냈다. 추 부장이 끝을 오래 눌러 둬서 한쪽이 접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펴도 자국은 남았다.
내가 가방을 열어 남은 자료를 꺼내자 은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볼 거예요.”
은채는 접힌 장을 자기 파일 맨 뒤에 넣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오늘 같이 온 사람은 내 편.’
▲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은채가 버스 정류장 방향을 확인했다.
나는 규민 팀장에게 전화해 미팅이 끝났다고 알렸다.
“견본 확인 전까지 선주문 수량은 보류입니다. 매장별 출고 조건은 목록 받은 뒤에 확인하기로 했고요.”
팀장은 알겠다고 했다. 돌아오면 같이 정리하자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은채가 건너편을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대리님.”
“왜요?”
“저분.”
카페 창가에 시환이 앉아 있었다.
가방은 옆 의자에 있었다. 앞에는 서류와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나는 휴대폰를 가방에 넣지 못한 채 창가를 봤다.
시환이 눈을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류를 덮었다.
‘아니. 창가 자리가 또 있네.’
은채는 나와 창가를 번갈아 봤다.
“의장님 외근도 여기예요?”
“제가 의장님 일정을 몰라요.”
말하고 나니 조금 낯설었다.
정말 몰랐다.
카페 문이 열렸다. 시환이 가방을 들고 나와 길 건너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은채와 함께 건물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미팅 끝났습니까.”
“네.”
나는 시환의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
시환도 내 시선을 따라 아래를 봤다.
“온빛 거래처 미팅이 근처에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셨군요.”
내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시환은 카페 쪽을 짧게 돌아봤다.
“외근 감시 아닙니다. 차 마시러.”
은채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나는 카페 유리창 안을 봤다. 조금 전 시환이 앉았던 자리에는 빈 유리컵만 남아 있었다.
“옥수수차 파는 카페가 어디 있어요.”
시환은 잠깐 나를 봤다.
“없어서 물만 마셨습니다.”
(5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