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나는 메신저 창을 닫고 가방을 들었다.
퇴근 뒤 10분.
일정표에 넣을 필요가 없는 약속이었다. 회의실도 잡지 않고, 참석자에게 자료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손목시계부터 봤다.
‘버릇. 그만.’
“내일 뵙겠습니다.”
규민 팀장에게 인사하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은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흔들다가, 내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들었다.
“대리님, 뒷문으로 나가세요?”
“네.”
“계단 마지막 칸이 조금 높아요. 조심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사에서는 서류 받침이 빠졌다는 것도, 계단 높이가 다르다는 것도 누군가 먼저 알려 줬다.
그건 좋았다.
뒷문 계단 앞에 전 직장 대표가 서 있다는 건 아직 판단을 미뤘다.
시환은 1층 계단 아래에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른 손은 비어 있었다.
내가 내려오자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계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 칸을 보고 발을 내디뎠다.
“여기서 말씀하시게요?”
“괜찮습니까.”
뒷문 옆에는 빈 운반 상자가 벽에 붙어 있었다. 창고 안에서는 누군가 테이프를 끊는 소리가 났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네. 10분이면요.”
시환이 손목시계를 봤다.
내가 알던 사람은 약속 시간을 남에게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정한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고쳐 걸었다.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네.”
“종이달은 작년 10월부터 온빛 인수 검토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가방 끈을 잡은 손이 멈췄다.
시환은 내 표정을 보고도 말을 끊지 않았다.
“자체 브랜드와 디자인 역량이 있습니다. 젊은 고객층도 꾸준하고요. 온빛에서 검토할 사업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런 회사였다.
대학 때부터 신제품이 나오면 찾아봤고, 이직 공고를 보기 전에도 다이어리를 샀다.
그런데 저 입에서 들으니 내가 아는 종이달과 온빛이 보는 종이달이 처음 겹쳤다.
“제가 여기 온 건 나중에 아셨고요?”
“네.”
“그런데 인수는 빨라졌어요?”
“당신이 여기 온 걸 알고 순서를 앞당긴 건 맞습니다.”
나는 시환을 봤다.
부정할 줄 알았다.
사업상 판단이었다고 말하면 그쪽을 믿을 준비도 조금은 하고 있었다.
시환은 그 길로 가지 않았다.
“둘 다 사실입니다.”
창고 안에서 테이프 끊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나는 가방 끈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잡았다.
‘아니. 둘 중 하나만 해.’
사업 이유만 있으면 이상하게 서운할 것 같았다.
내 이유만 있으면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둘 다 있다니.
어느 쪽으로 표정을 정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걸 저한테 왜 말씀하세요?”
“복도에서 한 말 때문에 다른 쪽을 빼고 생각하실 수 있으니까요.”
내가 따라온 겁니다.
빼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
파일을 저장할 때도. 컵을 씻을 때도. 퇴근 인사를 할 때도.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그럼 제가 여기 합격한 건요?”
시환의 대답은 바로 나왔다.
“종이달에서 결정했습니다.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제 업무도요?”
“종이달에서 정합니다.”
“제가 일을 못하면요?”
“그건 내가 답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처음으로 가방 끈을 놓았다.
필요했던 대답이었다.
괜찮다고 해 주는 것보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쪽이 나았다.
“저 여기 경력 공채로 왔어요.”
“압니다.”
“출시 일정이랑 거래처, 팝업을 맡기로 했고요. 그 일 배우고 제대로 하려고 온 거예요.”
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고르는 동안 끼어들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익숙해서 오히려 다음 말을 하기 어려웠다. 나는 늘 저 고개 끄덕임 뒤에 다음 일정을 보고했다.
오늘은 다른 말을 해야 했다.
“선 넘지 마세요.”
시환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넘지 않습니다. 선 바로 앞에 서 있을 겁니다. 그건 내 자유니까.”
나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 앞에 서 있는 것도 불편하다고 하면요?”
“물러납니다.”
이번에도 바로 답했다.
준비해 둔 반박이 갈 곳을 잃었다.
나는 뒷문 손잡이를 봤다. 시환은 내가 나갈 쪽을 막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문 옆에 서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제 일을 방해하지도 마시고요.”
“네.”
“직원들한테 저 때문에 뭘 해 달라고 하지 마세요.”
“하지 않습니다.”
“제 일정은 팀장님한테 물어보지 마세요.”
“원지유 씨에게 물어도 됩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니. 질문이 그렇게 오네.’
“물어보는 건요. 제가 대답 안 할 수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시환이 서류 가방을 든 손을 조금 바꿨다.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약속한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보고할 게 없는데 시간이 남는 건 낯설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오늘 첫 출근이었는데 길게 붙잡지 않겠습니다.”
시환이 문에서 한 걸음 비켰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걷다가 돌아봤다.
시환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뒷문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일도 오세요?”
묻고 나서 혀끝을 깨물었다.
확인하지 않는다며.
일정은 안 물어본다며.
“출입증 신청 때문에 잠깐 올 예정입니다.”
“출입증이요?”
“종이달 것은 아직 없습니다.”
나는 시환의 빈 셔츠 앞을 봤다.
온빛에서는 누구도 저 사람에게 출입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신청부터 해야 했다.
“아.”
그 말만 나왔다.
시환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나는 손을 들려다 가방 끈을 잡았다.
“네.”
집까지 걸어서 15분이었다.
중간에 손목시계를 봤다가 팔을 내렸다.
이제 확인할 일정은 없었다.
그래도 내일 출입증을 신청하러 온다는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
화요일은 어린이날이었다. 출시 일정이 밀린 브랜드팀은 오전만 나오기로 했다. 사무실 절반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날 아침, 은채가 내 책상 앞으로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대리님, 잠깐만 자리 봐 주실래요?”
나는 안경을 쓰고 있던 손을 내렸다.
“제 자리요?”
“옆이요. 의장님 쓰실 자리 정하신대요.”
은채가 가리킨 곳은 창가였다.
벽 쪽에 붙어 있던 책상에는 종이 견본 묶음과 빈 파일꽂이가 올라가 있었다. 햇빛이 책상 끝까지 들어왔다.
“저건 어디로 옮겨요?”
“견본은 회의실 보관장으로요. 채 대표님이 아까 정리하셨어요. 파일꽂이는 제가 가져가려고요.”
은채가 책상 위 종이를 내려다봤다.
칸 하나가 비어 있었다.
“직함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의장님이라고 적으면 되나.”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온빛에서라면 종이부터 받아 읽었을 것이다. 필요한 칸을 채우고 대표실로 가져갔을 것이다.
대신 은채가 든 종이의 맨 위만 봤다.
『출입증 발급 신청서』
“신청하시는 분한테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죠?”
은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대리님한테 물어보고 있지. 제가.”
“아실 것 같았겠죠.”
“네. 너무 자연스럽게 들고 왔어요.”
은채는 웃으며 종이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도 웃었다.
종이를 받지 않은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메일에는 전날 확인하지 못한 거래처 답장이 와 있었다. 첨부한 일정과 메일 본문에 적힌 날짜를 나란히 띄웠다.
이번에는 바뀐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규민 팀장에게 물을 내용을 적었다.
그때 계단 쪽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났다.
“의장님, 여기 작성해 주시면 돼요.”
시환이 은채 앞에 섰다.
어제와 같은 서류 가방이었다. 셔츠 소매도 걷혀 있었다.
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의장님.”
호칭을 말하기 직전 아주 잠깐 멈췄다.
시환이 나를 봤다.
“안녕하세요, 원지유 씨.”
틀리지 않았다.
내 쪽도. 저쪽도.
그런데 혼자 작은 시험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시환은 은채가 가리킨 빈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은채가 옆에 서서 물었다.
“소속은 온빛으로 넣을까요?”
“네.”
“직함은요?”
시환이 해당 칸을 짚었다.
“출입 구분은 외부 이사입니다. 직함은 이사회 의장으로 적겠습니다.”
나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부 이사.
출입증에도 내가 부르는 호칭에도 대표라는 말이 빠졌다.
시환이 작성한 종이를 건넸다.
은채가 내용을 확인하다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상시 출입을 신청하시는 거예요?”
“네. 승인되는 시간 안에서 쓰겠습니다.”
“그건 대표님께 확인받을게요.”
“알겠습니다.”
은채는 종이를 들고 채 대표 자리로 갔다.
시환은 빈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두 날짜가 다른 메일을 다시 읽었다. 어느 쪽이 최신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 발신자에게 답장을 썼다.
시환이 내 책상 옆을 지나갈 때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받는 사람 주소를 한 번 더 봤다.
두 번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세 번 봤다.
‘보내. 그냥 보내.’
메일을 보낸 뒤에야 어깨가 내려갔다.
▲
채 대표는 출입 신청서를 읽고 은채에게 돌려줬다.
“기존 기준대로 발급하면 되겠네요. 의장님은 이쪽 쓰시면 돼요.”
창가 책상을 가리키자 시환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콘센트가 아래 있어서 허리 좀 숙이셔야 해요. 책상이 오래돼서 서랍은 끝까지 당기면 빠지고요.”
시환은 책상 아래를 봤다가 서랍 손잡이를 봤다.
“주의하겠습니다.”
대표실을 배정받는 사람의 대답치고는 성실했다.
은채가 의자를 밀어 넣어 보더니 책상 다리를 확인했다.
“여기는 괜찮아요. 흔들리는 건 회의실 쪽이니까.”
나는 안경을 조금 올렸다.
‘의장 책상 안내. 콘센트. 서랍. 흔들림 없음.’
온빛에서라면 안내 자료로 만들었을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세 사람이 서서 확인하면 끝났다.
채 대표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큰 화분을 책상 옆으로 당겼다.
초록 잎 사이에 작은 토마토가 달려 있었다. 흙이 든 화분 아래로 받침이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의장님 책상에도 뭔가 살아 있어야죠.”
채 대표는 낮은 서랍에서 작은 화분을 꺼냈다.
나는 메일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쪽을 봤다.
“이걸 나눠 주시게요?”
“네. 곁가지 잘라서 심으면 돼요.”
채 대표가 잎이 갈라진 곳을 살폈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위로 가지 하나를 잘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분 받침을 가져갔다.
“받침은 여기 있어요.”
“아, 고마워요. 흙 떨어지면 은채 씨가 또 청소해야 하니까.”
“대표님이 아시면 조금만 떨어뜨려 주세요.”
은채가 책상 너머에서 말했다.
채 대표는 웃으며 작은 화분에 흙을 채웠다. 가지 아래쪽 잎을 떼고 줄기를 심었다.
시환은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물은 얼마나 줍니까.”
“오늘은 제가 줬으니까 됐고요. 겉흙 마르면 보세요. 아래로 조금 흐를 만큼 주면 돼요.”
“이 받침까지 내려오면 됩니까.”
“네. 대신 고인 물은 비우고요.”
시환이 받침을 확인했다.
채 대표는 화분 가장자리에 붙은 흙을 손가락으로 털었다.
“햇빛도 잘 들고. 잘 살겠네.”
그 말 뒤에 작은 화분이 시환에게 넘어갔다.
시환은 서류 가방을 먼저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분을 두 손으로 받았다.
나는 빈 받침을 하나 더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저 사람이 화분을 든다. 5년 동안 커피잔도 안 들던 사람이.’
가느다란 잎이 시환의 셔츠 소매에 닿았다.
시환은 손을 조금 벌려 잎이 눌리지 않게 했다.
별일 아니었다.
종이달에서는 대표가 흙을 만지고, 의장이 토마토를 받았다.
그런데 나는 저 손을 계속 보고 있었다.
서류를 들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여기에 놓으면 되겠습니까.”
시환이 창가 책상 끝을 가리켰다.
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창문 열 때만 안 건드리면 돼요.”
시환은 화분을 내려놓고 받침 가운데로 맞췄다.
은채가 옆에서 잎을 살폈다.
“의장님, 이거 크면 따서 드셔도 돼요.”
“먼저 키우겠습니다.”
“그건 맞네요.”
은채는 납득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책상으로 돌아왔다.
메일에 답장이 와 있었다. 인쇄소에서 받은 일정이 이전 자료라는 설명과 수정된 파일이 붙어 있었다.
나는 새 파일을 저장했다.
창가에서는 시환이 의자 위치를 조금 당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변경된 날짜를 적었다.
이번에는 한 번만 확인했다.
▲
오후에 은채가 출입증을 가져왔다.
시환은 이미 온빛으로 돌아간 뒤였다.
“내일 오시면 드리면 되겠죠?”
은채가 채 대표에게 묻고 출입증을 빈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거래처별 자료를 정리하다가 잠깐 그쪽을 봤다.
작은 화분 옆에 출입증이 있었다.
가느다란 토마토 가지와 딱딱한 카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시환의 이름이 제대로 적혀 있었다.
내 명함은 아직 새로 오는 중이었다.
‘나보다 빨라. 출입증도.’
은채가 화분 받침 밑에 흙이 묻었는지 손으로 확인했다.
“대리님, 의장님 식물 키워 보셨대요?”
“그건 모르겠어요.”
“전 직장에 화분 없었어요?”
“있었죠.”
“그럼 좀 해 보셨겠네요.”
“관리는 다른 분이 했어요.”
내가 봤던 시환은 결재 서류를 읽었고, 나는 그 앞에서 일정표를 펼쳤다.
물을 주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못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은채는 작은 가지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시면 되죠. 처음엔 다 몰라요.”
나는 책상에 놓인 거래처 자료를 봤다.
“그렇죠.”
은채가 돌아간 뒤 남은 메일을 열었다.
모르는 것은 물었다.
확인한 것은 적었다.
내가 받은 일을 끝내고 가방을 들 때까지 창가 책상은 비어 있었다.
화분과 출입증만 남아 있었다.
▲
수요일 아침에는 집을 조금 일찍 나왔다.
솔숲길로 접어들자 종이달 벽돌집이 보였다.
주차장 한쪽에 익숙한 차가 있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려 했다.
이미 늦어졌다.
차 옆에 시환이 서 있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걷힌 소매 아래로 손목시계가 보였다.
나는 내 시계를 보는 척했다.
8시 40분.
정확했다.
시환이 나를 보고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원지유 씨.”
“안녕하세요.”
어제 발급된 출입증이 떠올랐다. 작은 화분 옆에 놓여 있던 카드.
나는 건물 쪽을 가리켰다.
“출입증은 책상 위에 있어요.”
“네. 받으러 왔습니다.”
“그것만요?”
시환이 서류 가방을 조금 들어 보였다.
“출근 시간 맞춰 왔습니다. 의장 첫 출근.”
나는 주차장 입구에 선 채 시환을 봤다.
‘아니. 잠깐.’
신청서는 상시 출입이었다.
책상도 정했다.
토마토까지 받았다.
그걸 다 봤는데 이제야 다음 순서를 알아들었다.
“의장은 출근 안 해요.”
시환이 건물 입구를 향해 한 걸음 옮겼다.
내가 지나갈 자리는 남겨 뒀다.
“이 회사는 합니다. 오늘부터.”
(3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