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머릿속엔 서은주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서은주는 그를 위해 종종 요리를 해줬고 그가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면 옆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며 말없이 곁을 지켰다. 한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 자신이었던 그 여인을 결국 놓쳐버린 건 자신이었다.부모님은 왜 몸을 던져 서은주를 감쌌냐고, 진백현을 어리석다 했다.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그는 서은주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수없이 상처를 주고 괴롭혔기에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그녀 앞에서 한 번쯤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녀를 무사히 육강민의 곁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언젠가 서은주가 ‘진백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그래도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었다고, 그렇게 한 번쯤은 기억해 주길 바랐다. *서은주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육강민은 강정한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경찰이 뭐래요?” 서은주가 물었다.“트럭 운전자가 요독증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했고, 이미 구치소에서 나왔대.”경찰도 수상하다고 보고 있었다.요독증 환자라면 애초에 술을 마셔선 안 된다.사고는 오전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일어났고, 그는 온몸에서 술 냄새를 풍겼다. 아침부터 술을 들이키는 사람은 흔치 않다. 게다가 2차 충돌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진술했다.그는 도박을 즐겼고, 좀도둑질 전력도 있어 경찰에 여러 차례 붙잡힌 적이 있는 상습범이었다.평소에는 화물차로 물건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최근 계좌에 거액이 입금된 흔적 역시 없었다.고의 살인은 음주 운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음주 운전으로 교통사고 치사로 인정되면 도주도 없으니 보통 3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형에 그친다.게다가 중병까지 있다면, 보석 후 형집행정지나 보외치료를 신청할 여지도 충분하다.모든 계산이 끝난 뒤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서은주는 한참 말이 없었다.계속되는 장맛비에 해는 평소보다 더 빨리 저물었다. 서은주가 잠들자, 육강민은 조용히 일어나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
병실.서은주는 느긋하게 국을 떠 마시고 있었다.그 맞은편에 선 육광진은 등이 따끔거릴 만큼 식은땀이 흘렀다.노태철이 거래를 제안했을 때만 해도 그는 비웃었다.딸과 외손녀 일로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줄로만 알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사람 죽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울 리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런데 뉴스를 통해 서은주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육광진은 통쾌함은커녕,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졌다.자식들이 망가졌을 때, 복수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육가희와 진백현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보석 소난 소동에서 강정한이 직접 강씨 가문의 작은 고모의 것이라 밝힌 것과 육수린의 백일잔치에 강씨 가문 사람들이 총출동했던 장면까지, 겉으로는 육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육광진은 강씨 가문에서 이미 조용히 서은주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육광진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런 서은주를 건드릴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짓이다.게다가 노태철은 살인을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어 육광진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그래서 뉴스가 뜨자마자 곧장 강성으로 내려와 육강민에게 이 일은 전부 노태철 짓이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모든 걸 털어놓았다.훗날 일이 뒤집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는 군병원 특실로 안내되었다.그곳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서은주를 마주한 순간, 벼락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강씨 가문 역시 이미 노씨 가문을 의심하고 있었다.노태철, 그 늙은 여우는 악독하기 그지없다.육광진은 그 배에 올라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은주는 그저 팔과 허벅지에 긁히고 멍이 든 것뿐 너무나 멀쩡했다.하지만 뉴스 속 사진은 피로 범벅이었고 처참하기 그지없었다.도대체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그래서 마주치자마자,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그것이었다.“어떻게 안 죽었죠?”서은주가 그를 바라봤다.입가에 미소는 걸렸지만,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제
“하지만 환자분은 원래도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점은 가족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했습니다.”의사의 말이 끝나자,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육강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제가 한 번만 볼 수 있습니까?”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실 밖에는 육씨 가문 사람들뿐 아니라, 소식을 캐려는 기자들도 숨어 있었다.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충격에 빠졌다.잠시 후, 온몸이 흰 천으로 덮인 채 밀려 나오는 시신과 그 곁에 선 육강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눈은 붉게 충혈됐고, 초점은 흐려졌다.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확신했다.서은주는… 정말 죽은 것이다.겨우 며칠 평온한 나날을 보냈을 뿐이고 육수린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너무 가혹했다.강성 쪽 기자들은 서씨 가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누군가는 서은주가 이번에 내려온 이유가,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같은 날, 같은 교통사고.마치 기이한 윤회처럼 맞물려 있었다.사고 현장에 피로 물든 향초와 국화들까지 퍼지자, 사람들 사이에 저주가 아니냐는 둥, 부모의 죽음이 딸에게까지 이어졌다는 둥, 괴이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소식은 곧 경성에도 전해졌다.서은주의 안타까운 소식에 애도하는 이도 있었고, 기구한 운명을 탄식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그 소식에 쾌재를 부른 이도 있었다. “그 계집애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늘이 벌을 내린 거지!”양이나가 크게 웃었다.망가진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잘난 척하더니, 쌤통이야.”“양이나.”양홍철이 눈살을 찌푸렸다.“고인에 대한 예의는 지켜라.”“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년한테 예의를 차려야 해요?”양이나는 정신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상태였다.“얼굴도 망가지고, 감옥 갈 뻔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아빠는 걔가 불쌍해요?”“그래도 이미 죽은 사람이다.”양홍철은 뜻밖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마음
서은주와 진백현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전화를 받은 육강민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늘 침착하던 육강민은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눈빛이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고 현장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두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육강민은 그들 앞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누구라도 도와줬을 겁니다. 가해 운전자가 술에 취해 신호를 어겼어요. 거의 미친 사람 같았죠. 차에서 끌어낼 때도 술 냄새가 진동했어요.”목격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그는 대략 상황을 파악했다.하지만 지금은 겨우 오전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아침부터 음주?게다가 2차 충돌까지 있었다고 했다.이건 단순 사고가 아니다.사고를 가장한 살인일 가능성이 컸다.그는 즉시 강씨 가문에 연락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차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소식을 듣는 순간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서은주는 현재 수술 중이고 생사가 불분명했다.강씨 가문에서 그동안 서은주와 공개적으로 혈연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사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그 배후가 예전에 작은 고모를 죽인 자일 가능성은?”강정한의 목소리가 잠겼다.주먹을 쥔 육강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 교통사고고, 시점도 비슷한 건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상대는 이미 그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상대가 언제 칼을 빼 들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게다가 그들이 이토록 대범하게 일을 벌일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출동한 경찰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화물차가 들이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다고 했다.“차량이 워낙 견고해서 버틴 겁니다. 2차 충돌까지 있었는데, 차체가 약했다면 그대로 전복됐거나 두 분 다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가해 운전자는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울며불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생긴 단순 음주 사고일 뿐이라고 했다.“단순 음주 사고라고요?”육강민의 목소리는 낮
“물건 찾으러 나왔어요. 이제 돌아갈게요.” 서은주가 말했다.“왜 안 깨웠어. 같이 갔을 텐데.”“괜찮아요. 백현이랑 같이 있어요.”“진백현?”서은주는 휴대전화를 스피커로 돌리자, 진백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형수님 어디로 데려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곧 무사히 모셔다드릴게요.”“네가 유혹해도 은주는 넘어가지 않을 거야.”육강민의 확신에 찬 한마디에 진백현은 말문이 막혔다.‘그래, 너 잘났다. 너가 제일 대단해. 둘 사이 좋은 거 다 아니까 그만 좀 하지!’전화를 끊고 신호 대기 중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서은주, 네 남편 좀 말려라. 말이 너무 세.”서은주는 웃으며 말했다.“그거 유전이야. 큰형님도 그래. 못 고쳐.”“넌 어떻게 참고 살아.”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록불이 켜졌다.진백현이 엑셀을 밟았다.교차로를 막 통과하려는 그때, 오른쪽에서 대형 화물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신호를 무시한 채, 곧장 그들에게 돌진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진백현이 급히 핸들을 꺾었지만, 화물차는 이미 차량 뒤쪽 측면을 들이받았다.차는 몇 미터나 밀려났고, 타이어가 길을 긁는 소리가 귀를 찢듯 울렸다.서은주의 몸이 거칠게 한쪽으로 쏠리고 차체에 부딪힌 반신은 순식간에 감각을 잃었다. 이어 에어백이 터지며 얼굴과 머리를 감쌌다.진백현 역시 충격에 정신이 아찔했다.귀에서는 이명이 울렸고, 머리가 윙윙거렸다.하지만 정신을 가다듬으며 백미러로 뒤쪽을 확인했다.그런데 화물차는 멈추지 않았고, 그들을 향해 재차 돌진해 오고 있었다.“젠장!”진백현은 욕설을 내뱉었다.차는 충격과 진동으로 시동은 완전히 꺼진 상태였고 아무리 키를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그는 이를 악문 채 서은주의 안전벨트를 풀었다.“내려! 빨리 내려!”하지만 차 문은 충격으로 뒤틀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은주는 다시 달려드는 화물차를 보았다.“엎드려!”진백현이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그리고 운전석에서 몸을 던지듯 넘어와 그녀를 완
강지택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예정됐던 일정은 미뤄졌다.며칠째 이어진 장대비로 항공편까지 줄줄이 결항됐다.결국 육강민과 서은주는 하루 먼저 차로 이동하기로 했고, 강씨 가문은 기일 당일에 도착하기로 했다.경성을 벗어나자,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좌우로 흔들렸다.빗물에 번진 풍경은 또렷해졌다가, 이내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앞 휴게소에서 제가 바꿔 줄게요.”서은주는 고개를 돌려 육강민을 살폈다.요즘 비가 계속 오면서 그의 오래된 허리 통증이 다시 도졌다.게다가 장거리 운전은 요추에 가장 무리가 가는 법이었다.“괜찮아. 요즘 외할아버지 때문에 너도 제대로 못 잤으니, 좀 자둬. 강성 도착하면 깨울게.”“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바로 말해요.”“알겠어.”서은주는 피곤이 몰려왔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꿈속에서, 한 소년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환하게 웃으며 탄산음료를 하나 건넸다. 그리고 뚜껑을 따는 순간,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던 그날로 바뀌었다. 숨이 막히는 굉음과 함께 꿈속이 뒤틀렸다.서은주는 잠든 채로 불안하게 몸을 뒤척였다.누군가 얼굴을 어루만지는 감촉에 번쩍 눈을 떴다.차는 이미 멈춰 있었다.육강민이 다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은주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안전벨트가 그녀를 다시 잡아당겼다. 잠시 멍하니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육강민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운전석을 뒤로 젖힌 뒤 그녀를 조심스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조용히 끌어안았다.서은주는 말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나, 부모님 꿈꿨어요.”육강민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내일 가서 인사드리자.”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더 기대어 있다가 물었다.“강성에 도착했어요?”“응. 도착했어.”차는 이미 위미든에 멈춰 있었다.두 사람이 한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