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하께서는. 자꾸 찾아오고, 자꾸 막아주고, 자꾸 신경 쓰이게 한다.그 말까지 할 수는 없었다.은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아무튼 전하께서도 저를 주시하고 계시고요.”장 내관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주시라는 말로 되겠소?”“그럼 뭐라고 할까요?”장 내관은 입을 다물었다.매화도 눈을 피했다.은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둘 다 왜 그래?”“아닙니다, 아씨.”“아무것도 아니오.”너무 동시에 부정해서 더 수상했다.은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무대였다.“장 내관님, 궁중에서 규수들이 출 수 있는 춤 중에 가장 무난한 게 뭐예요?”“부채를 들고 추는 춤이 비교적 무난하오. 손동작과 걸음새로 품격을 보일 수 있으니.”“좋아요. 부채.”“다만 아씨께서 생각하시는… 그 무대라는 것처럼 과하게 움직이시면 아니 되오.”은하가 웃었다.“과하게 안 합니다. 대신 안 잊히게 할 겁니다.”장 내관은 한숨을 쉬었다.“그 말이 가장 두렵소.”“저도 조금 두렵습니다.”“아씨도요?”“당연하죠.”은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제가 제일 잘하는 걸 하는데 실패하면, 변명할 게 없잖아요.”그 말에 처소 안의 공기가 잠시 달라졌다. 매화는 은하를 가만히 보았다. 늘 당당해 보였지만, 그 안에도 두려움이 있었다. 잘 모르는 것에서 실패하는 건 핑계가 된다.하지만 가장 잘하는 것에서 실패하면, 자기 자신이 흔들린다.은하는 그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해야 했다.“연습할 공간이 필요합니다.”장 내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전하께서 빈 연무장 하나를 비워두라 명하셨소.”은하가 멈췄다.“전하께서요?”“예. 궁녀들과 악공도 필요하면 부르라 하셨소.”“언제 그런 것까지…”“아마 아씨가 춤을 고를 거라 예상하신 듯하오.”은하는 말문이 막혔다.이혁은 자신이 춤을 고를 걸 예상했다. 왜? 그녀가 노래했고, 무대 이야기를 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다루는 데 능하다는 걸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침묵.은하는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하지만 이번엔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이혁은 아직 자기 마음의 이름도 모른다. 너무 세게 밀면 도망칠 것이다. 아니, 도망치는 게 아니라 화를 낼 것이다. 그게 그가 아는 유일한 방어니까.은하는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습니다.”이혁이 그녀를 보았다.“순순하군.”“전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이 뭔지 아니까요.”“걱정이라 한 적 없다.”“네. 업무상 염려.”“염려도 아니다.”“그럼 업무상 불쾌?”이혁은 한숨을 아주 작게 삼켰다.“너는 말을 꼭 그렇게…”“정확하게 하죠?”“성가시게 한다.”은하는 웃었다.그 웃음을 보며 이혁은 생각했다.‘내 것도 아닌데 남 주기 싫다.’그리고 이번에는 그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그날 밤, 은하는 처소로 돌아와 매화에게 연못가 대화를 일부만 전했다. 질투 이야기는 빼고, 백시윤을 조심하라는 말만 했다.매화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전하 말씀이 맞사옵니다. 백 공자님은 너무 완벽하셔서 오히려 무섭사옵니다.”“그치?”“예. 반면 전하께서는…”매화가 말을 멈췄다.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전하께서는?”“무섭사옵니다.”“끝?”매화는 아주 작게 웃었다.“그런데 아씨 앞에서는 가끔… 이상하시옵니다.”은하는 이불을 펼치다 말고 멈췄다.“어떻게 이상한데?”“전하께서 아씨를 보실 때마다, 화가 나신 듯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시는 듯하옵니다.”은하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그건 그냥 내가 수상해서…”“예. 아씨께서는 늘 그렇게 말씀하시옵니다.”매화가 조용히 웃었다.“그런데 소인은 요즘, 수상해서만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은하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때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아씨, 큰일이옵니다.”은하가 몸을 돌렸다.“또 뭐야?”궁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내일 후보들이 궁 밖 사가 부인들 앞에서 재능을 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하옵니다.”“재능이요?”“예. 시, 글, 그림, 악기, 춤 중 하나를 보여야 한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질문을 던진 규수는 웃고 있었지만, 그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은하와 백시윤을 엮고, 동시에 이혁 앞에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백시윤의 눈빛이 흥미롭게 번뜩였다.이혁의 얼굴은 무표정해졌다.은하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좋아. 이건 위험하다.’하지만 위험한 질문일수록, 제대로 넘기면 크게 남는다.은하는 고개를 들고 답했다.“백 공자님과는 말이 부드럽게 흐릅니다.”누각이 조용해졌다.이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은하는 이어 말했다.“그러나 전하와의 대화는 가끔 칼 위를 걷는 듯합니다.”규수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왕과의 대화를 칼 위라 표현하다니. 하지만 은하는 멈추지 않았다.“다만 칼 위를 걸을 때는 발끝을 더 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왜 하는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그녀는 이혁을 보았다.“그러니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 편하다는 뜻이라면 백 공자님일 수 있으나, 저를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분은 전하이십니다.”정적. 진짜 정적이었다.이혁의 눈빛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백시윤의 미소가 처음으로 조금 옅어졌다.대비마마는 부채 뒤에서 은하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매번 위험한 말을 한다. 그런데 매번 그 위험한 말 끝에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진심을 붙인다.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열 수 없었다.‘저를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분은 전하이십니다.’그 말이 너무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너무 깊게 들어왔다.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아, 이거… 좀 세게 말했나?’그러나 이미 늦었다.이혁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그 답은.”모두가 숨을 멈췄다.“나쁘지 않다.”은하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대비마마가 웃었다.“주상께서 오늘도 윤설화에게 후하십니다.”이혁의 표정이 굳었다.“평가일 뿐입니다.”은하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업무상, 평가, 감시. 이혁은 참으로 핑계가 많았다.문답 과제가 끝난
오후의 사교 문답은 궁중 정원 옆 누각에서 열렸다. 후보들은 둥근 자리에 앉아 서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대비마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고, 이혁은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은하는 그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이혁이 없으면 덜 긴장될 것 같았다. 물론 백시윤은 있었다. 영의정 가문의 후계자로 오늘 자리의 진행을 돕는다는 명목이었다.정말 성실하게도 자주 나타나는 남자였다.은하는 자리에 앉으며 매화에게 낮게 속삭였다.“저 공자님도 출석률 장난 아니네.”“출석률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좋은 뜻은 아닌 듯하옵니다.”“정확해.”문답은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규수들은 서로를 칭찬하는 척 질문을 던졌고, 그 안에는 날이 숨어 있었다.“윤 아씨께서는 갑작스레 간택에 오르셨다 들었습니다. 준비가 부족하실 텐데, 두렵지는 않으신지요?”은하는 웃었다.“두렵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배우는 속도가 빠르시다니 부럽습니다.”“살고자 하면 사람이 좀 빨라지더군요.”질문한 규수는 말문이 막혔다. 주변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다른 규수가 물었다.“아씨께서는 너무 눈에 띄십니다. 중전의 자리는 조용하고 묵직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은하는 찻잔을 들었다.“눈에 띄는 것과 가벼운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등불도 눈에 띄지만, 밤길을 밝히지 않습니까.”대비마마의 눈이 흥미롭게 움직였다.백시윤은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세 번째 질문은 더 날카로웠다.“왕의 마음을 얻고 싶으십니까?”드디어 나왔다.은하는 속으로 이혁을 떠올렸다.왕의 마음보다 신뢰가 먼저.그가 던진 질문, 자신이 고른 답.은하는 차분히 대답했다.“왕의 마음을 얻는 것은 감히 제가 말할 일이 아닙니다.”잠시 멈춘 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다만 전하의 신뢰를 얻고 싶습니다. 마음은 바람처럼 흔들릴 수 있으나, 신뢰는 오래 쌓이는 것이라 생각하니까요.”누각이 조용해졌다.대비마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백시윤의
“짧게 받겠습니다.”“어찌.”“과찬이십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정도로요.”“무난하군.”“전하께서 길게 말하지 말라 하셨잖아요.”“잘 들었군.”“제가 원래 선생님 말은 잘 듣습니다.”이혁은 그녀를 보았다.“방금 나를 선생이라 한 것이냐.”은하가 웃음을 참았다.“문답 선생님.”“왕이다.”“왕도 가르치면 선생님이죠.”장 내관이 문밖에서 아주 낮게 “아씨…” 하고 신음했다. 이혁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돌렸다.은하는 그 틈을 또 봤다.‘참는다. 지금 웃는 거 참는다.’진짜 큰일이었다. 이혁의 표정을 읽는 일이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연습이 끝날 무렵, 이혁은 은하에게 새 질문을 던졌다.“만약 누군가 네게 왕의 마음을 얻고 싶으냐 묻는다면?”은하의 손끝이 멈췄다.“그런 질문도 나옵니까?”“나올 수 있다.”“너무 직설적인데요.”“궁에서는 직설을 가장한 함정이 많다.”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마음을 얻고 싶으냐. 간택 후보라면 당연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질문 같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답하면 욕망이 된다. 아니라고 하면 간택에 참여한 이유가 흐려진다.어렵다.은하는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왕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왕의 신뢰를 얻는 것이 먼저라 답하겠습니다.”이혁의 눈빛이 멈췄다.은하는 이어 말했다.“마음은 변할 수 있지만, 신뢰는 쌓아야 하는 것이니까요.”“너는 내 신뢰를 얻고 싶으냐.”또 갑자기 들어왔다.은하는 잠시 그를 보았다.이 질문은 연습일까.아니면 진짜일까.그녀는 이번엔 장난치지 않았다.“네.”짧은 대답에 이혁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은하는 차분히 덧붙였다.“전하께서 저를 믿어주셔야 제가 이 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살아남기 위해서만?”은하의 숨이 살짝 멈췄다.그 질문은 생각보다 깊었다.살아남기 위해서만. 그럼 다른 이유도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은하는 대답을 피하려고 했다.
“귀여워?”이혁의 목소리는 낮았다.낮은데, 이상하게 조금 늦게 나왔다. 평소의 이혁이라면 은하가 선을 넘는 순간 바로 칼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짧은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이 문제였다. 은하는 그 공백을 보았고, 장 내관은 문밖에서 느꼈고, 이혁 자신도 알아차렸다.서고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실감했다. 전하가 귀엽다. 조선의 폭군에게, 그것도 왕의 서고에서, 그것도 문답 연습을 하러 온 첫마디로.‘강은하, 너 진짜 미쳤냐.’그런데 이미 엎질러진 말이었다. 수습해야 했다. 빠르게. 아주 빠르게.은하는 고개를 숙였다.“송구합니다, 전하. 귀엽다는 말은 그러니까…”“계속해라.”“예?”이혁은 책상 앞에 앉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얼굴은 차가웠다. 그러나 은하는 이미 봤다. 귀 끝이 아주 조금 붉어진 것을. 그것이 촛불 때문인지, 아침빛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당황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봤다.보고 나니 더 큰일이었다.폭군이 귀여워 보이는 순간, 생존 본능과 로코 본능이 싸우기 시작했다.은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귀엽다는 건… 그러니까 꼭 어린아이처럼 귀엽다는 뜻이 아니라요.”“그럼 무엇이지.”“예상보다 인간적인 빈틈이 보였다는 뜻에 가깝습니다.”장 내관이 문밖에서 낮게 숨을 들이켰다.망했다. 수습이 수습이 아니었다.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빈틈.”“좋은 뜻입니다.”“왕에게 빈틈이 좋은 뜻일 리 없지.”“사람에게는 좋은 뜻일 수 있습니다.”“또 왕도 사람이라 할 셈이냐.”은하는 입을 다물었다.이혁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여기서 또 한마디가 튀어나왔을 텐데, 오늘은 멈췄다. 아마 스스로도 방금 말을 골랐다는 걸 알 것이다. 그 사실이 묘하게 보였다.그는 천천히 말했다.“네가 보는 나는 빈틈이 많은가.”은하는 놀라 그를 보았다.질문이 이상하게 낮았다. 화를 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