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장부. 유영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다. "언니, 그때 저는 너무 충동적이었고 너무 어리석었어요." "언니가 봉가에 시집가는 걸 보고 질투가 났었어요.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죠." "제가 먼저 봉 대인을 알았고, 이미 봉 대인과 은밀히 혼인을 약속까지 한 사이였잖아요." "어째서 봉 대인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언니를 아내로 맞으려고 하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런 엄청난 수모를 견딜 수 있었겠어요?" "부모님과 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제가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렸어요. "그리고… 그 당시 봉 대인을 정말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거예요." 봉 부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어릴 적부터 유영은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가장 아낌을 받고 자란 유영이 갑자기 버림받고 배신당했으니, 황당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봉 부인은 유영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잘못한 것은 바로 봉 대인이었다. 그가 자매를 망쳤다! 유영은 고개를 들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봉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언니는 항상 절 아껴주고 보호해주셨죠. 그런데 제가 언니를 끝내 배신했어요."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어요. 정말 깊이 후회하고 있어요… 언니, 제발 절 용서해주세요…""정말 딱 한 번이었어요. 단 한 번의 실수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뿐이에요." "맹세할게요. 그 이후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어요." "언니, 부디 절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봉가에 시집가려는 것도 딸 아이에게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주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예요." "만약 이게 언니와 제 사이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봉가에 시집가지 않을게요! 아니, 안 갈게요. 네? 언니가 원한다면, 딸 정희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서 다시는 언니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진
정희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이걸 어쩌죠?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런 지경에 몰아넣었나요?" "분명 질투심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이모님께 험담을 퍼뜨린 게 틀림없어요!" 유영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노련한 상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다른 사람이 아니야. 바로 황후지." "황후라고요?" 정희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우리가 황후마마께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왜 황후마마는 우리를 조사하고 다니시는 거죠?" 유영은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자신의 추측이 거의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다. "네 이모가 궁에서 나오자마자 그동안의 일을 물으셨단다. 틀림없이 황후마마께서 알려준 게야." 정희는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황후마마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겠어요?" "어머님, 그럼 이모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우리를 아예 외면해버리시겠다고 하셨나요?" 유영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난 네 이모의 친동생이야. 친정에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데, 누가 우리 사이를 그렇게 쉽게 갈라놓을 수 있겠니?" "아무도 나만큼 언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언니는 마음이 여린 편이야. 오늘 아침 내가 무릎 꿇고 눈물을 보였으니, 언니의 마음도 분명 흔들렸을 거야." 정희는 어머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한결 안도하며,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어머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럼 우리 추석 궁중 연회에는 그대로 참석할 수 있는 거죠?" 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궁중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잠시 미뤄야겠다." "오늘 네 이모가 경계를 조금 내려놓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해.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정희는 이 말을 듣고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예요, 어머니? 이번에 궁에 못 들어가면 전 대체 언제 황제 폐하를 만나고, 또 언제 그분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가요?" 유영은 딸의 입을 급히 막으며 날카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봉 부인이 마차에서 내리자 유영의 얼굴에 즉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는 서둘러 다가가 상냥하게 불렀다."언니."봉 부인은 부드러운 걸음으로 다가가 유영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마차 안, 봉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아, 황후께서는 겉으로야 엄해 보이시지만, 속정이 깊은 분이야. 우리 모두 한 가족이니만큼, 너희 모녀를 잘 보살펴 주실 거란다."유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과연 황후가 자신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단순한 시간 끌기에 불과한 걸까?만약 후자라면, 황후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속내를 감춘 인물이었다.머릿속이 복잡해진 유영은 봉 부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는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참장부.봉안진이 막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아내 주씨가 기쁜 얼굴로 그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그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환희가 서려 있었다."서방님, 어머님께서 조만간 장주에 가신다고 들었어요."봉안진이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네? 부인, 정말입니까? 이렇게 갑자기 떠나신다고요?"주씨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황후마마의 뜻이래요."황후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무엇이든, 참장부에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봉 부인이 떠나면, 자연스럽게 그 귀찮은 이모도 발길을 끊을 터였다.주씨는 지아비가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도록 덧붙였다."서방님, 저야말로 어머님께서 오래 계셨으면 좋겠지만… 그 이모라는 분이 계속 찾아와서 집안일에 간섭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분과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봉안진은 아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다."부인, 우선 어머니를 좀 도와주세요. 먼 길을 가시려면, 필요한 짐들을 많을 겁니다."주씨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야 당연한
참장부 문 앞에서 호위병이 유영에게 서신을 건넸다."큰 마님께서 서신을 남기셨습니다."유영은 재빨리 서신을 받아 들고, 지체 없이 봉투를 뜯었다.[유영아, 일이 갑자기 결정되어 오늘 장주로 떠나게 되었다. 여정이 길어, 추석을 위해 장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지체할 수가 없어 너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궁에 가서 황후를 찾으렴. 황후께서 너와 정희를 잘 돌봐주실 거란다.]서신을 읽는 순간, 유영의 얼굴이 굳어졌다.이렇게 갑자기 떠난다고?뭔가 이상했다.마치 일부러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말이다.심지어 이 서신이 정말 봉 부인이 남긴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하지만 유영은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호위병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이제 내가 누군지 잘 알겠지? 언니 방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어가야겠다."그러나 호위병의 태도는 단호했다."주인 어르신의 허락 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마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유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게 빛났다.잠시 후, 보고를 마친 하인이 돌아와 말했다."작은 마님께서 지금 추석 연회 준비로 바쁘셔서 손님을 맞이할 여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남기신 물건이 있으시면, 큰 마님께서 돌아오신 후 찾아오시든지, 아니면 어떤 물건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시녀를 시켜 찾아 드린다고 하십니다."유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이 주씨라는 여인, 정말 독하구나. 언니가 없다고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건가?’‘산중에 호랑이가 없으니 원숭이가 왕 노릇을 하는구나!’겨우 한낱 며느리에 불과한 주씨 따위가 감히 그녀의 길을 막는단 말인가?그녀가 참장부에 들어가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봉 부인이 정말 장주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확인할 길이 막혀버렸다.유영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어미가 불쾌함을 느
"어머니!"정희가 가게 밖에서 손을 흔들며 유영을 불렀다.그러나 유영은 어딘가 신경이 곤두선 듯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정희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니, 이모님은요? 오늘 같이 오신다고 하셨잖아요!"그러나 유영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자."정희는 당황했다."하지만…!"그녀의 시선이 금류의로 향했다.이렇게까지 애써 찾아온 옷을 그냥 포기하라고?정희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꽉 붙잡으며 애원했다."어머니! 가기 전에 저 주인장한테 말씀 좀 해 주세요.""이 주인장이 우리가 황후마마와 가족 관계라는 걸 믿질 않아요. 저에게 저 금류의를 팔지 않겠대요!"유영은 딸이 이 옷을 왜 사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추석 연회에서 황후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였다.그리고 그녀도 딸에게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누가 알았겠는가?봉 부인이 갑자기 장주로 떠나 버릴 줄은 말이다!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유영은 순간적으로 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었다."내 말 들으렴, 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자."정희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어머니, 이모님은 대체 어디 계세요?"유영은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네 이모는 여기에 오지 않는단다.""뭐라고요?!"정희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이모가 이 곳에 오지 않는다고?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때, 가게 주인이 조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짝!손이 올라갔다.정희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가게 주인의 뺨을 후려쳤다."건방지게 어디서 말대답이야?!"갑작스러운 따귀에 가게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때릴 수가 있는 거죠?!"정희는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 말을 못 믿겠
황궁.봉구안은 추석 연회 전에 장공주의 혼처를 정하기로 했다.이것은 황제 소욱이 직접 그녀에게 맡긴 일이었다.이를 위해 봉구안은 자녕궁을 찾아 태후와 논의하기로 했다.태후 역시 딸이 다시 혼인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일찍이 혼인을 하고, 후사를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그렇지 않다면, 홀로 지내는 세월이 너무도 외롭지 않겠는가.하지만 봉구안은 태후의 말에 단호하게 반박했다."장공주께서는 거느리는 시녀와 하인들도 많고, 사교성이 좋아 벗도 널리 두고 계십니다.""결코 외롭지 않으실 것입니다."태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이 아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그야말로 다 외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 이들이 어찌 진정으로 공주를 위할 수 있단 말이냐..."그때, 계 상궁이 다가와 공손히 알렸다."태후마마, 황후마마, 장공주께서 오셨습니다."자신의 혼인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공주는 지체 없이 황궁으로 달려왔다.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늦으면, 황제가 제멋대로 혼인을 정해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장공주는 천천히 전각으로 들어서며,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어머니, 평안하셨습니까? 황후도 계셨군요."태후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잘 왔다. 마침 황후와 네 혼인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단다."이때, 계 상궁이 나서서 덧붙였다."공주마마,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공주님의 혼처를 신중히 정하기 위해, 궁중에서 특별히 아집을 열어 배필을 고르기로 하셨습니다."그러나 장공주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나는 그런 갓 쓰고 글만 읽는 남자들 전혀 취향이 아니다."태후는 혀를 찼다."너는 이 나라의 공주다. 순종적이고 예의 바른 부마가 가장 좋단다.""그런데 검과 창을 휘두르는 무관이라도 골랐다가, 혹여 너를 다치게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장공주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어머니, 만약 정말 그런 사내가 있다면, 저는 오히려 더
봉구안은 어머니에게 유영 모녀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그렇기에 유영이 봉 부인의 서신을 들고 찾아왔을 때, 그녀는 내칠 수 없었다.그녀는 시종 오백에게 명령했다."두 사람을 영화궁으로 데려오도록 해라."오백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답했다."명 받들겠습니다!"유영 모녀에게는 이번이 첫 궁궐 방문이었다.성벽만 보아도 압도될 만큼 웅장한 황궁. 그러나 성문을 넘어서니, 더욱 광활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규칙적으로 배치된 궁전들,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과 정원, 곳곳에서 어른거리는 금빛 장식들…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길을 잃을 것 같은 미궁과도 같았다.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는 내시를 따라, 모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강주에서 살던 시절, 돈만큼은 부족함이 없던 유영이었다.그녀가 머물던 저택은 그 지역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정원이며 누각이며 온갖 명장들이 정성을 다해 조각한 곳이었다.하지만… 이곳, 황궁과 비교하면 그녀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정희는 자연스레 주눅이 들었다.그녀의 두 눈은 놀라움과 동경으로 가득 찼다.‘왜 다들 궁에 들어가길 원하는지 알 것 같아…’이곳은 마치 구름 위의 천궁과도 같았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이 분명했다.그녀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그러려면… 황자를 낳아야만 했다.머릿속으로 야망을 키우던 정희는, 조심스레 어머니에게 속삭였다."어머니,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신가요?"유영은 즉시 눈매를 날카롭게 바꾸며 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 입을 좀 다물거라. 궁 안에서는 항상 입을 조심해야 된다는 걸 잊은 게냐?’눈빛 하나로 경고를 보내는 그녀였다.궁중은 규율이 엄격한 곳이다. 감히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그렇게 모녀가 길을 따라가던 중,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그중에서도 단연 화려한 장신구로 장식된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그녀의 뒤에는 수많은 시녀와 내시들이 따라붙어 있었다.내시가 발걸음을 멈추며 조
영화궁.유영 모녀뿐만이 아니었다. 봉 대인 역시 황후가 갑자기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하지만 궁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러다 영화궁 안에서 유영과 정희를 마주한 순간, 그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두 모녀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을 데려올 걸 그랬나? 누가 그 대신 뺨이라도 맞아줘야 할 텐데 말이다!!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디까지나 자신은 황후의 친부이다. 황후가 아무리 거침없는 성격이라도, 친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터. 그는 서둘러 몸을 숙였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예를 면하십시오."몸을 일으키자마자, 봉 대인은 본능적으로 유영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그는 분노 섞인 표정으로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저 여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유영 역시 봉 대인의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비웃었다.'황후가 그를 부른 목적이 뻔하지 않은가.'하지만 그녀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오랜 상업 경험으로 단련된 그녀에게, 위기란 그저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었다.남제의 율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설령 황후라도 자신에게 사적인 처벌을 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봉구안에게 서신을 내밀었다."황후마마, 이건 언니께서 제게 남긴 서신입니다.""아직 읽어보시지 못했을 텐데, 먼저 확인해보시는 게 어떠신지요?"궁녀 만추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유씨 부인이라는 자, 고작 서신 한 장으로 마마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황후를 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봉구안은 서신을 볼 생각조차 없는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만추는 다시 시선을 바로 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봉구안은 그저 찻잔 뚜껑을 살짝 열어 찻잎을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내가 듣기로, 봉가의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