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칼리안의 서늘한 손길이 엘로라의 턱을 거쳐 가느다란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엘로라의 맥박이 두려움으로 미치듯 뛰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칼리안은 만족스러운 듯 나지막하게 웃으며, 엘로라의 목덜미를 감싼 손에 점차 힘을 주어 조여 가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엘로라가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칼리안의 눈빛이 돌변하며 품에서 또 다른 서늘한 단도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도망의 대가가 이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단도가 번뜩이는 섬뜩한 빛을 내뿜으며 엘로라의 목전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별로 없었다. 그 대신 앞으로 이어질 삶이 더 짙은 어둠 속에 잠긴 것 같았다. “…” 엘로라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해.” “……” 그의 요구를 무시하자 부메랑처럼 말이 돌아왔다. “대답하라고.” “네, 네에…” 이것은 자비가 아니었다. 그녀를 평생 놓아주지 않겠다는, 가장 잔인한 협박이었다. 봄은 따뜻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엘로라의 봄은 전혀 따스하지 않았다. 그렇게 뻐꾸기 황녀의 서늘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엘로라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방문 앞에는 낯선 기사 둘이 위압적인 자세로 지키고 서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정원에도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삼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벌써 처분이 내려진 걸까.'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 살려주겠다던 중저음의 목소리. 그게 밝은 햇살 아래서는 오히려 더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황녀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시녀의 목소리에 엘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는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유모 로웰이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아주 낮게 속삭였다. "아가씨, 제발 침착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피하시면 안 됩니다." "응... 알고 있어, 유모." 대답은 했지만, 정작 발걸음은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회랑을 지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엘로라의 등 뒤에 화살처럼 꽂혔다. '다들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도망치다 붙잡혔다는 걸.'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그녀는 마침내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안쪽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힌 칼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칠흑 같은 흑발이 덧창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칼리안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짓으로 제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네? 하지만 거기는..." "앉으라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엘로라는 영문도 모른 채 엉거주춤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그날 하루. 칼리안은 그녀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옆에 앉혀놓은 채 정무를 처리했다. 신하들이 들어올 때마다 경악 섞인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펜을 굴렸다. 엘로라는 견디다 못해 입술을 깨물며 작게 물었다. "저, 폐하. 제가 왜 여기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칼리안은 서류에서 잠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적안이 너무나 담담해서, 엘로라는 오히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가 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하죠! 갑자기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곁에 붙잡아 두시고..." "살려준 게 마음에 안 드나 보군.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끌고 갈까?" "그, 그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요." "그럼 됐어. 짐이 원하니 앉아 있는 거다. 그게 이유야." 칼리안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대화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 회의 시간이 되자 그는 엘로라를 데리고 아예 회의장까지 향했다. 대신들의 수군거림이 폭풍처럼 엘로라의 귓가를 스쳤다. "저게 대체 무슨 일인가?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왜 황녀님을 저렇게..." 엘로라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의 카펫 무늬만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황궁의 집무실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책상 너머로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칼리안은 펜을 쥔 채 엘로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정무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시선이 너무 뜨거웠다.엘로라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칼리안, 일 안 하세요?”“하고 있다.”“나만 보고 계시잖아요.”“너를 보는 게 내 일이다.”칼리안이 뻔뻔하게 대꾸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커다란 그림자가 엘로라를 덮쳤다.칼리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로이센의 잔당들이 아직 수도에 숨어 있다.”“기사들이 잡고 있잖아요.”“부족해. 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단 말이다.”그의 손가락이 엘로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지독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엘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기댔다.“저 도망 안 가요. 이제 제 집은 여기니까요.”“입으로만 하는 약속은 믿지 않아.”칼리안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차라리 너를 내 몸에 묶어두고 싶군.”말뿐이 아니었다.그의 눈에는 정말로 그럴 것 같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엘로라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느껴져요? 뛰고 있잖아요. 당신 곁에서.”칼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숨이 막힐 듯한 입맞춤이었다.*다음 날, 황궁 정원은 연회 준비로 분주했다.엘로라가 정식 황후로 인
회의가 끝난 뒤, 집무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의 시간이 찾아왔다.칼리안은 의자를 당겨 엘로라에게 바짝 다가앉았다.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엘로라는 피하는 대신 그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어 숨을 골랐다.“엘로라.”“네?”“이제 아무도 너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그가 이어서 말했다.“가짜니, 뻐꾸기니 하는 그따위 상스러운 말들은 내 제국에서 영원히 지워버렸으니까.”칼리안의 적안이 형형하게 빛났다.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건 맹세였다.엘로라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저도 이제 제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아니까요.”그녀는 더 이상 뱁새의 알을 밀어내는 비정한 새가 아니었다.어머니 헬레네가 남긴 힘으로 제국을 지키고, 칼리안의 곁에서 당당히 빛나는 태양의 반려였다.칼리안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미소를 지었다.*오후에는 황궁 대정원을 산책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정원에는 엘로라가 좋아하는 은방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칼리안은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칼리안, 저기 봐요.”“올해는 유난히 꽃이 빨리 폈네요.”“네가 좋아하니 꽃들도 서두른 모양이지.”칼리안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엘로라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울 때마다, 칼리안은 기꺼이 다시 한번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이 평화를 깨뜨리는 자가 있다면, 제국 전체를 불태워서라도 그녀를 지키고 말 거야.’휘이잉-그때 바람이 한 차례 세게 불었다.그는 잠시 멈춰 서더니 엘로라의 머리카락에 붙은 작은 꽃잎을 떼어내 주었다.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그러자 엘로라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칼리안은 엘로라의 앞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전쟁을 하시려는 건가요?” 엘로라가 묻자 칼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그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들이 너를 가짜라고 불렀어.” “저는 신경 안 써요. 당신만 옆에 있다면요.” “나는 신경 쓰이는데 어떡하지. 너를 모욕하는 모든 혀를 잘라내고, 너를 부정하는 모든 땅을 불태울 거다.” 그는 엘로라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의 집착은 이제 제국을 삼킬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엘로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럼 제가 보는 앞에서만 하세요. 당신이 괴물이 되는 걸 저만 볼 수 있게.” 칼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서늘하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너는 참으로 잔인하구나.”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폭군은 황후를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고, 황후는 폭군을 제 둥지 안에 가두려 했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칼리안은 그녀의 체온을 온전히 느끼며 생각했다. 이 손에 쥔 세계가 부서진다 한들 그녀가 제 곁에 머문다면 그 어떤 파멸조차 두렵지 않았다. *
황궁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의 집착은 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정무를 볼 때도 엘로라를 제 집무실 소파에 앉혀두었다. 시야에서 한순간이라도 사라지면 그는 폭주했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시종의 소리에도 칼리안은 검자루를 잡았다. 그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엘로라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는 척했다. 하지만 페이지는 한참 전부터 넘기지 못했다. 칼리안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서류를 보다가도 수시로 고개를 들어 엘로라를 확인했다. 그녀가 그곳에 있는지. 자신을 떠나지 않았는지. “칼리안, 저기 있어요.” 엘로라가 결국 책을 덮으며 말했다. 칼리안은 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여전히 핏빛으로 젖어 있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계속 보세요? 정무에 집중하셔야죠.” “네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어야 집중이 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황제가 한낱 사생아 출신 황녀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엘로라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너를 로이센에서 데려온 뒤로, 잠을 잘 수가 없어.” “…….” “눈을 감으면 다시 그 푸른 안개가 나타날 것 같아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칼리안, 저들의 말은…”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엘로라가 아닌, 렌 옆의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소녀가 가진 마력의 파동. 그것은 칼리안이 평생 찾아 헤맸던 헬레네의 진정한 힘과 닮아 있었다. 칼리안의 손이 엘로라의 어깨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엘로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칼리안……?” 칼리안이 검을 내리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엘로라, 물러서 있어라.”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는 엘로라를 지키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눈앞의 ‘진짜’에게 매료된 것일까. 렌 로이센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폐하, 이제 둥지의 진짜 주인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안개가 다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엘로라는 어둠 속에서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둥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유일한 안식처가.그렇게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칼리안의 등이 멀게 느껴졌다.심장이 시리게 가라앉았다.역시 나는 가짜였나.뱁새의 둥지에 잘못 떨어진 뻐꾸기 알.그것이 나의 태생이었다.언젠가는 진짜 알에게 밀려날 운명.유모 로웰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칼리안은 소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그의 검 끝이 바닥을 느릿하게 긁었다.
사절단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엘로라는 긴 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어깨의 긴장이 탁 풀렸다. 칼리안이 그런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전쟁터의 살기가 무색할 만큼 따뜻했다. “멋졌어, 엘로라.” 칼리안이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며 속삭였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엘로라가 그의 옷자락을 꽉 쥐며 대답했다. 칼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곳에 남은 희미한 낙인 자국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지독한 애정이 전해졌다. “이제 정말 끝이군.” 칼리안이 다정하게 읊조렸다. “너를 괴롭히던 과거의 망령도, 출생의 굴레도.” 그는 엘로라를 제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게 했다. 세상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안식처였다. “이제는 정말 우리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야.” 창밖으로 부서지는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했다. 뻐꾸기가 찾아낸 둥지는 대륙에서 가장 견고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의 제국은 이제 막 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