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교실.
어제 쏟아진 폭우의 여파로 덥고 끈적한 공기가 교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에 엎드려 있는 시은이에게로 향했다. 어제 우산 가장자리에서 비를 쫄딱 맞은 탓인지, 그녀는 평소의 그 맹수 같은 기운 없이 책상에 뺨을 댄 채 얕은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아, 더워 짜증 나게…."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시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뻣뻣한 교복 마이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러고는 땀이 차서 답답한지, 얇은 하얀 블라우스의 윗단추를 두 개쯤 거칠게 풀어 헤쳤다. "……!" 단추가 풀리며 깊게 파인 하얀 쇄골과, 옅은 미열 탓에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나른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옆얼굴은, 어제 빗속에서 내 품에 안겼을 때만큼이나 아찔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귓바퀴가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황급히 수학책으로 시선을 고정해야만 했다. . 하교 시간. 나는 매점 뒤편 후미진 구석에서 같은 학년 불량배 녀석들에게 멱살을 잡혀 있었다. 어제 패싸움에 낄 깡조차 없으면서, 평소 반에서 만만한 애들만 골라 괴롭히며 센 척하고 다니는 질 나쁜 녀석들이었다. "야, 윤태경. 너 같은 좆밥 새끼가 어제 일진 애들 따라서 패싸움도 구경 갔다며?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주머니에 있는 거 다 꺼내봐." 녀석들 중 하나가 낄낄대며 내 명치를 퍽 밀쳤다. 숨이 턱 막혀 바닥에 고꾸라지려는 찰나였다. "뭐 하냐."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갑고 짧은 한마디. 고개를 돌리자, 시은이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늘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녀석들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학교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그녀의 압도적인 살기에 기가 눌린 녀석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어, 어? 이, 이시은…. 그, 그게 아니라, 네 빵셔틀 새끼가 좀 깝치길래 우리가 교육 좀…." 퍼억-!! 녀석의 비굴한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은의 묵직한 발길질이 녀석의 복부를 정통으로 걷어찼다. "컥…!" 숨통이 막혀 바닥에 고꾸라진 녀석의 머리채를, 시은이가 무자비하게 틀어쥐고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교육? 니들이 누구 교육시킬 서열이나 되냐?" 빠각! 퍽! 반항할 틈조차 주지 않는 일방적이고 잔혹한 폭력이었다. 어제 타 학교 일진들과 싸울 때보다 훨씬 짙은, 진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동급생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곁에 있던 나조차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앞으로 쓸데없이 가오 잡으면서 애들 패고 다니지 마라. 한 번만 더 내 눈앞에서 깝치다 걸리면, 그땐 진짜 턱주가리를 부숴버릴 테니까." 시은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들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시, 시은아..." 내가 하얗게 질려 덜덜 떨며 이름을 부르자, 시은이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뭘 봐. 넌 눈 안 깔아?" 피가 튄 뺨을 한 채 서늘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림과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였다. "이시은!!! 너 또 무슨 짓이야!!!"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이 두꺼운 당구 큐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녀석들을 발견한 미친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너 이 녀석, 감히 같은 학년 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시은이는 바닥에 피 섞인 침을 툭 뱉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저 새끼들이 주제파악 못하길래 기강 좀 잡았습니다." "기강? 네가 조폭이야?! 당장 학생부실로 따라와!!" 시은이는 굳어있는 나를 향해 힐끗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미친개의 뒤를 따라 유유히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 학생부실 옆에 딸린 창고 개조 교실, 이른바 '진실의 방'. 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뒷문 틈새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밀어 넣었다. "이시은. 애들 패고 다니는 게 학생이 할 짓이냐? 너도 똑같이 좀 맞아야겠다. 양말 벗고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 꿇어." 미친개의 서늘한 명령에, 시은이는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없이 교탁 앞 맨 책상으로 다가갔다. 핏기 없는 얼굴로 슬리퍼를 벗고, 이어서 하얀 양말을 벗어 내리자 늘 투박한 신발 속에 감춰져 있던 맨발이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그녀는 차가운 나무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뒤로 가지런히 모인 두 발바닥. 거친 뒷골목을 누비며 흙먼지를 뒤집어쓰던 여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티 없이 하얗고 여린 곡선을 띤 예쁜 발이었다. 저토록 작고 무방비한 맨살 위에 뼈를 부수는 둔기가 내리쳐질 것이라 생각하니 뱃속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아직 단 한 번의 타격도 닿지 않은 그 맑은 맨발이 다가올 폭력을 예감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몇 대 맞을래." 미친개가 큐대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위협적으로 물었다. "선생님이 때리고 싶은 만큼 때리세요." 그 반항적이고 당당한 태도에 미친개의 눈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허, 이 녀석 보게. 끝까지…! 좋아. 오늘 딱 서른 대다. 숫자 크게 세라. 소리 안 내거나 자세 흐트러지면 처음부터 다시다." 서른 대. 두꺼운 당구 큐대로 뼈와 얇은 살가죽뿐인 맨발바닥을 서른 대나 맞는 것은 아무리 맷집 좋은 남학생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었다. 문틈으로 그 처절한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시작한다." 미친개가 헛기침을 하더니, 체중을 완벽하게 실어 두꺼운 당구 큐대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나를 대신해 기꺼이 지옥을 뒤집어쓴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문틈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이 비참한 굉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쉬이익-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묵직한 큐대가 시은의 맑고 하얀 맨발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당장 데뷔해도 되는 게 아니라… 데뷔할 뻔했지."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전학 오기 전에 나 기획사 연습생이었거든." "여, 연습생?! 네가?" "어. 근데… 내가 사고 쳐서 짤렸어." 건조하게 툭 던진 그 말끝에, 평소의 독기 대신 묘하고도 깊은 씁쓸함이 묻어났다. "사고? 무슨 사고를 쳤는데?"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더 묻자, 시은이는 미간을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몰라. 갑자기 머리 아프다. 숙취가 아직 덜 깼나 봐." 그녀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몸을 돌려, 펴져 있던 얇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어젯밤의 그 슬픈 노래와, 방금 전 씁쓸하게 내뱉은 '사고'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게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용히 빈 그릇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쳤다.돌아보니, 시은이는 어느새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낡은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고 앉아 컴퓨터를 켰다. 웹서핑을 하며 화면을 넘기다, 스피커 볼륨을 완전히 음소거로 돌려놓고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평소 혼자 하던 컴퓨터 게임을 실행했다. 마우스 딸깍거리는 소리조차 낼 수 없어, 오직 키보드 방향키만 조심스럽게 누르며 화면 속 캐릭터를 움직여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재밌냐?" "헉!"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온 잠긴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뒤를
"너… 어디 가."취기에 잔뜩 혀가 꼬여 웅얼거리는 목소리.내 셔츠 끝자락을 꽉 쥔 그녀의 손길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더듬거렸다."나, 나? 어… 침대가 좁으니까 난 바닥에서 자려고." "야… 청승맞게 바닥에서 뭐 해. 좁아터졌으니까… 그냥 기어 올라와."내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그녀는 쥐고 있던 내 옷자락을 제 쪽으로 훅 잡아당겼다.중심을 잃은 나는 얼떨결에 침대 가장자리에 엉거주춤하게 걸터앉듯 눕게 되었다.싱글 침대는 성인 두 명이 눕기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내 등 뒤로 그녀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가 만들어졌다.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등 뒤에서 들려오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조심스럽게 돌려 시은이 쪽을 바라보았다."……."시은이는 자고 있지 않았다.어두운 방 안, 창밖에서 스며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어… 안 졸려?"내가 당황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시은이는 말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었다.늘 가시를 세우고 있던 평소와 달리, 알코올 기운에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 한없이 부드럽고 무방비한 웃음이었다."윤태경."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나른했다."…너 진짜 멍청해.""어…?""내가 뭐라고. 왜 자꾸 내 옆에서 알짱거리냐, 바보같이."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7월의 끈적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토요일 밤. 좁은 자취방 안은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후끈한 알코올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소시지를 굽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서는 태호, 진수, 대철이 늘어지게 누워 맥주 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아, 심심한데. 대가리 부를까." 태호가 폴더폰을 열어 단축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시은아. 어디냐? 우리 윤태경 방에서 술 까고 있는데 올래?" 스피커 너머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잔뜩 피곤함이 묻어나는 시은이의 건조한 목소리가 수화기 틈새로 툭 새어 나왔다. [공부하는 애 좀 냅둬라. 방해하지 말고.] 퉁명스럽게 툭 던지는 그 한마디에, 가스레인지 앞에서 소시지를 뒤집던 내 손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태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대며 억지를 부렸다. "에이, 공부는 무슨. 윤태경도 같이 놀고 싶어 해. 빨리 와라, 안주 다 식는다." […알았어. 금방 가.] 전화가 끊기고 20분쯤 지났을 무렵. 창밖으로 고막을 찢는 듯한 오토바이 굉음이 들리더니, 곧 현관문이 열리고 시은이가 들어왔다. 넉넉한 회색 반팔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 차림. 오늘따라 화장기가 짙은 하얀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피로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 왔냐. 일은 잘하고 왔어?" 진수가 묻자, 시은이는 대답 대신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피곤해 죽겠네 진짜…." 그녀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더니 단숨에 반 캔을 넘게 비워냈
물푸레나무 회초리 열 대. 그 서늘했던 징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주말 아침이었다. 밀린 잠을 청하며 낡은 자취방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던 내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시은' 세 글자에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어, 시은아."[1시간 뒤에 화서역 앞으로 튀어 와. 늦으면 뒤진다.]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뚜- 뚜- 하고 전화가 끊겼다. 주말 아침부터 역으로 호출이라니. 혹시 또 다른 학교 일진 녀석들과 시비가 붙어서 가방을 들어줄 셔틀이 필요한 건가?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허둥지둥 세수를 하고 약속 장소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화서역 앞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실루엣이 보였다. 언제나 낡은 교복 바지나 가죽 재킷을 걸치고 서늘한 포스를 뿜어내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길게 늘어뜨린 갈색 생머리에 넉넉한 핏의 하얀색 후드티,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연청색 치마. 언제나 짝짝 씹어대던 껌도 없었다. 주말의 화창한 햇살 아래 선 그녀는, 무시무시한 일진짱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예쁘장한 또래 여고생 같았다. "뭘 멍청하게 서서 쳐다봐. 빨리 안 와?"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며 나를 불렀다. 나는 잔뜩 쫄아붙은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 오토바이는 어쩌고 웬일로 전철역에서 봐? 혹시 어디 싸우러… 가는 건 아니지?"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작은 백팩을 내 가슴팍으로 툭 던졌다. "싸우긴 무슨. 아직 발바닥도 욱신거리고, 오토바이 타기 피
드르륵- 쾅!진실의 방 앞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미친개를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부장님. 큐대 내려놓으시지요."차분하지만 날 선 목소리. 우리 반 담임인 40대 중반의 정인숙 선생님이었다.안경 너머로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들어온 정 쌤은 큐대를 치켜든 미친개와 책상 위의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미친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제 반 아이들입니다. 훈육은 담임인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평소 원리원칙이 확실하고 깐깐해 학교 내에서도 입지가 높고 존경받는 정 쌤의 개입에, 미친개는 미간을 팍 구기며 헛기침을 했다."…이시은 저 녀석이 이번엔 아주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정 선생이 알아서 엄하게 교육시키세요."미친개는 마지못해 큐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진실의 방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자, 정 쌤은 바닥에 뒹구는 큐대를 한쪽으로 치워놓고는 우리를 가만히 응시했다."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나는 어제 하굣길에 있었던 납치부터,녀석들이 나를 인질로 시은이를 꿇어앉히고 구타했던 일,그리고 나를 구하기 위해 시은이가 어쩔 수 없이 주먹을 휘둘렀던 과정까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필사적으로 설명했다.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정 쌤의 시선이 책상 위에 꿇어앉은 시은이에게 향했다."이시은. 네가 생각은 어때. 억울하니?""…제가 먼저 시비 건 적 없습니다. 제 친구 지키려고 싸운 거라 후회 안 합니다."시은이는 입술을 꽉 깨물며 꼿꼿하게 대답했다.정 쌤은 굳은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너희들 말 믿는다. 친구를 구하려다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알아."그 한마디에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긴장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하지만 정 쌤은 이내 교탁 밑에서 가늘고 매끈한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당구 큐대처럼 뼈를 부수는 둔기는 아니었지만, 살갗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매였다."하지만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이유가 어찌 됐든 네가 사람을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다치게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자, 나는 들고 있던 폰을 떨어뜨리고 다리가 풀려 시멘트 바닥에 고꾸라졌다. "시… 시은아…." 나는 무릎이 까지는 것도 모른 채, 먼지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시은이를 향해 기어갔다. 하얗던 얼굴은 터진 입술과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엉망이었고, 교복 셔츠는 흙먼지 투성이였다. 행여나 내 손길이 닿으면 상처가 덧날까 봐 차마 건드리지도 못한 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시은아, 눈 좀 떠봐…" 내 목소리에 시은이의 몸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그녀가 힘겹게 기침을 하며 반쯤 눈을 떴다. 초점이 흐려진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고꾸라진 나를 향했다. 무자비한 린치를 당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찢어진 입술이 달싹이며 내뱉은 첫마디는 내 숨통을 막히게 했다. "너… 팔은. 안 부러졌냐…?" "……!" 내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 팔이 문제가 아니잖아…! 도대체 왜 그랬어… 나 같은 놈 때문에 왜 네가 무릎을 꿇어…!"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하아... 질질 짜지 좀 마라." 그녀의 가쁜 숨결이 차가운 바닥을 타고 흩어졌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교복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흙 묻은 옷깃 끝을 떨리는 손으로 살포시 움켜쥐었다. "난 팔 괜찮아... 너, 넌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나의 다급한 울먹임에, 시은이의 굳어있던 턱관절이 스르르 풀리며 옅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봐…." 시은이는 그제야 간신히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은 듯, 고개를 떨구고 내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씨발… 존나 아프네, 진짜…." 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아내며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 앓는 소리에, 나는 다친 곳에 손이 닿을까 봐 섣불리 그녀를 안지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헝클어진 뒷머리만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