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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빠각!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매캐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학교 뒷산 중턱에 있는 넓은 공터. 우리 학교 일진들과 옆 학교 패거리 수십 명이 뒤엉켜 패싸움을 벌이는 아수라장이었다. "야, 빵셔틀. 쫄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라. 우리 대가리가 싸우는 거 장난 아니니까." 내 목덜미를 거칠게 틀어쥔 일진 김태호가 낄낄거리며 귓가에 대고 이죽거렸다. 나는 그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끌려와, 녀석들의 가방 더미를 껴안고 벌벌 떨고 있는 처지였다. "비켜, 이 새끼들아!"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 흩날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짐승처럼 적진을 누비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상대 남학생의 턱에 발차기를 꽂아 넣고, 뒤에서 달려드는 여학생의 머리채를 틀어쥐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녀. 우리 성진고의 절대적인 존재, 이시은이었다.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흙먼지 속에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그녀의 압도적인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피던 시은이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항상 살기가 돌던 시은이의 눈동자가 순간 갈 곳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김태호!!! 미쳤어?! 저 새끼를 여기 왜 끌고 와!!!" 전장을 울리는 시은의 날카로운 비명에 태호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나를 보고 당황하여 가드가 열린 그 찰나의 순간. 옆 학교 남학생 하나가 야비하게 시은의 등 뒤로 다가와 주먹을 치켜들었다. "시, 시은아! 뒤에!" 내 다급한 외침에 시은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녀석의 주먹이 시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짧은 신음을 뱉은 시은이는 녀석의 명치에 니킥을 꽂아 단숨에 기절시켜 버렸다. 그 후로 내가 있는 나무 밑동 주변이 가장 치열한 난장판이 되었다. 옆 학교 패거리 중 하나가 짐 더미 쪽으로 밀려와 내가 질끈 눈을 감을 때면, 시은이가 자비 없이 녀석의 안면을 걷어차 버렸다. 가방 더미 뒤에 숨어 덜덜 떠는 내 머리 위로, 눈먼 주먹들이 시은이의 등과 어깨에 퍽, 퍽 꽂히는 둔탁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아, 짜증 나게! 거치적거리니까 대가리 푹 숙이고 있어!" 시은이가 뒤를 향해 신경질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불호령에 나는 맞을까 봐 겁이 나, 짐 더미에 얼굴을 콱 파묻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난투극 끝에 옆 학교 패거리들이 대부분 널브러졌을 때였다. "쓸모없는 새끼들. 비켜라." 옆 학교 패거리들 사이를 헤치고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옆 학교의 실질적인 짱이자 여학생 격투기 선수 출신이라는 '백채린'이었다. 175cm가 훌쩍 넘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웬만한 남학생들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덩치였다. "다 뒤로 빠져. 다구리 치는 거 딱 질색이니까. 저년은 내가 혼자 밟는다." 시은이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백채린의 앞으로 나섰다. "깡은 좋네, 이시은. 네 그 예쁜 얼굴, 오늘 돌바닥에 갈아줄게." 백채린의 도발과 동시에 묵직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시은이는 특유의 날렵함으로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체급 차이에서 오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결국 백채린의 커다란 주먹이 시은의 가드를 뚫고 그녀의 왼쪽 뺨에 정통으로 꽂혔다. "윽…!" 퍼억- 하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시은의 고개가 크게 꺾이며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진 시은의 하얀 뺨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고,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 주먹 좀 치네, 돼지 같은 년이." 시은이는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쓱 닦아내며 흙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에 진짜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백채린이 다시 묵직한 훅을 날리며 돌진하는 순간, 시은이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백채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백채린의 허점이 노출된 순간, 시은이의 무릎이 그녀의 명치를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백채린이 숨을 토해내며 허리가 꺾이자, 시은이는 그 탄력을 이용해 뛰어오르며 턱을 향해 하이킥을 꽂아 넣었다. 퍼어억-!!! 육중한 백채린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를 돌더니 바닥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공터에는, 피 묻은 주먹을 꽉 쥔 채 거친 숨을 내쉬는 시은이만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우리 무리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시은이의 흙투성이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흥분한 일진 녀석들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자기들끼리 뿔뿔이 흩어졌다. . 짐꾼 노릇이 끝난 나는 홀로 텅 빈 거리를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불길하게 잿빛 구름이 끼어있던 하늘이, 기어코 예고 없던 폭우를 거세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였다. "야. 윤태경." 거센 빗소리를 뚫고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순간, 찰랑이는 갈색 머리카락과 찢어진 입술을 한 시은이가 서 있었다. 170cm인 나보다 아주 살짝 더 커 보이는 그녀는, 무서운 일진 짱이라는 타이틀만 떼고 보면 길거리에서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 그 서늘하고 이질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다가가기 힘든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남색 우산을 내 가슴팍에 툭, 거칠게 던졌다. "잡아라. 그리고 똑바로 씌워." "어, 어?" "내 어깨에 빗방울 하나라도 떨어지면 네 뺨에 구멍 날 줄 알아." 얼음장 같은 목소리와 쏘아보는 눈빛에 나는 허둥지둥 우산을 들었다. 우산 속에서 그녀와 나란히 걷는 내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행여나 그녀가 비를 맞을까 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산을 씌우려 했지만, 시은이는 미간을 팍 구기며 내 어깨를 퍽 밀쳐냈다. "야, 너 교복에서 흙먼지 냄새나. 떨어져."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나를 우산 한가운데로 밀어붙이고는, 자신은 가장자리로 훌쩍 떨어져 걸었다. 나는 맞을까 봐 겁이 나서 차마 우산을 그녀 쪽으로 더 기울이지도 못한 채, 바짝 얼어붙어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좁은 골목길 코너를 거칠게 돌던 배달 오토바이가 흙탕물을 튀기며 돌진해 왔다. "어, 엇!"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빗물에 젖은 진흙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였다. 불쑥 뻗어 나온 시은의 억센 손아귀가 내 교복 셔츠 앞섶을 꽉 틀어쥐고는, 확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찰박-! 거친 물보라와 함께, 우산을 쥔 내 몸이 시은 쪽으로 완전히 쏠리며 빈틈없이 부딪쳤다. 중심을 잡기 위해 허우적대던 내 손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얇은 허리를 짚었다. 훅 끼쳐오는 비 냄새와 그녀 특유의 은은한 샴푸 향. 가까스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숨을 헉 하고 집어삼키고 말았다. 내 멱살을 쥔 채 바짝 밀착된 그녀의 젖은 앞머리 아래로, 나를 빤히 응시하는 무심하고 서늘한 눈동자가 얽혀들었다. 무엇보다 빗물에 젖어 반투명해진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짙은 색의 속옷 끈과 뽀얀 쇄골 선이 아슬아슬하게 비쳐 보였다. 내 심장이 고막을 찢을 듯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앞섶을 쥔 채, 특유의 시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눈 안 깔아? 어디다 손을 대." 서늘한 그 한마디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시은이는 귀찮다는 듯 내 멱살을 탁 놓아주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시선을 거두었다. . 어느새 내 자취방 앞 처마 밑에 다다랐다. 처마 아래로 들어선 나는 조심스럽게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 내일 봐…." 시은이는 내 인사에 대꾸도 없이 우산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빨리 들어가기나 해. 냄새나니까." 그녀는 살벌한 핀잔을 남기고는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순간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나를 밀어내며 우산 가장자리로 걷던 그녀의 왼쪽 어깨와 얇은 교복 바지가, 물을 짤 수 있을 정도로 새카맣게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서, 빗속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젖은 뒷모습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방금 전 내 팔뚝에 닿았던 그녀의 서늘하고 젖은 허리의 감촉이 손끝에 지독하게 남아 있었다."읏…."마지막 유리 조각이 살갗을 빠져나오자, 시은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꽉 깨물었다.나는 피 묻은 파편을 은색 트레이에 내려놓고, 소독약을 적신 거즈로 시은이의 발바닥을 꾹 눌렀다. 하얀 거즈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상처가 깊어.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야."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지만, 시은이는 대답이 없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소파에 기대앉은 시은이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멍하게 흩어져 있었다.10년 전,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박유나를 그 눅눅한 지하실에서 마주한 충격이 여전히 시은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박유나."시은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기집애, 뼈만 남아서 덜덜 떨고 있더라. 초점도 다 풀려서 나를 보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시은이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잘게 경련했다."내 10년을 망친 년인데… 막상 약에 쩔어서 바닥을 기는 꼴을 보니까,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아."시은이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그녀는 갑자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붕대가 감긴 발을 억지로 바닥에 디디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나 지금 다시 가봐야겠어.""뭐? 어딜 가. 지금 걷지도 못하잖아!""그 지하실 놈들 대가리, 오늘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대체 누구한테 약을 받은 건지, 왜 유나가 저기서 저 꼴로 있는지 다 토해내게 만들 거야!"시은이가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뗐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은이의 앞을 가로막고, 겉옷을 쥔 그녀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비켜, 윤태경.""못 비켜.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찌는 듯한 한여름의 늦은 밤.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자취방 창밖으로,거친 오토바이 배기음이 다가와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땀과 흙먼지, 그리고 옅은 피비린내를 달고 들어온 시은이가 현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은아! 너 꼴이 왜 그래. 다친 데는? 일은 어떻게 됐어?""아… 물 좀 줘. 갈 길이 한참 멀다." 내가 다급히 건넨 차가운 생수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워낸 시은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터진 입술이 열리고, 오늘 밤 벌어진 위장 수사의 전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미끼를 완전히 물었어." 시은이가 툭 던진 첫마디였다. 그동안 학교에서 3학년 MZ조폭 끄나풀 녀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둔 결실이었다. 오늘 하교 시간, 3학년 무리의 우두머리가 민재를 은밀히 불러냈다. '오늘 밤 변두리 폐당구장 쪽으로 물건 하나 배달 갈 건데, 그 깡다구 좋은 전학생 년도 데려와라. 입 무거워 보이니까 잔심부름이나 좀 시키게.' 통을 좁게 줄인 낡은 교복 바지에,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는 폼새. 시은이는 완벽한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민재와 함께 폐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시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걸친 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를 확인한 녀석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야, 넌 꼴랑 쇼핑백이나 나를 와꾸가 아닌데?" 녀석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5월의 끝자락. 초여름의 끈적한 열기가 교정에 내려앉은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구관 복도를 순찰하던 내 곁으로, 아이들과 매점을 다녀오던 시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녀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까만 눈동자.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분리수거 하는 날." 내 건조한 대답에 시은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셔츠 소매를 꼬집듯 틀어쥐었다. "그래, 분리수거나 실컷 해라, 윤태경.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아." 시은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휙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 [시은아, 나 오늘 교무실에 급한 업무가 좀 남아서. 도어록 비밀번호 치고 먼저 들어가 있어.] 시은이에게 거짓말 문자를 남겨둔 나는, 지금 내 자취방 한가운데서 앞치마를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광등은 끄고 구석의 노란 스탠드 조명들만 켜두어 방 안을 제법 그럴싸한 무드로 꾸며놓은 참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아침부터 푹 끓인 미역국과 갈비찜 냄새가 달큰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단맛이 적고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레드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열어두고, 얇고 유려한 곡선의 크리스털 와인잔 두 개를 나란히 세팅했다. 평소 같으면 늘어난 반바지에 티셔츠 차
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고등학교 시절의 꽃, 수학여행. 목적지는 탁 트인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였다. 숙소인 해변가 리조트에 짐을 풀고 백사장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늘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은이는 28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은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민재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호랑이 쌤 덮쳐!!" 시은이의 외침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 야, 너희들 뭐 하는… 으아악!" 반항할 새도 없이 녀석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나는 그대로 얕은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짠물이 코로 훅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기가 막혀 허우적거리자, 내 코앞에서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 바닷물 시원하죠?!"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시은이는 내 물세례를 피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쫓으며 원 없이 웃었다. 선생의 체면 같은 건 이미 파도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 문제는 저녁 장기자랑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때 터졌다. "아악!" 리조트 로비 계단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내려 오던 민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 출근길, 평소라면 무거운 공기만 감돌았을 교무실 복도였지만 오늘만큼은 내 발걸음도 미세하게 가벼웠다. 하지만 그 소박한 기대는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이지안!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남의 학교 애들을 패고 다녀?!" 복도 한가운데서 생활지도부장 김 선생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코피가 터진 채 훌쩍이는 민재, 잔뜩 겁에 질려 눈물을 훔치는 수아, 그리고 짝다리를 짚고 선 시은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은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찢어진 셔츠와 긁힌 뺨.하지만 빳빳하게 든 그녀의 고개엔 일말의 반성 대신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김 선생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가 앞을 막아서자, 김 선생이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 선생 마침 잘 왔소. 이 전학생 녀석이 등굣길 골목에서 옆 학교 애들 셋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어!놈들 다 구급차 실려 가게 생겼다고!" "선생님, 아니에요!" 김 선생의 호통에 수아가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 새끼들이 먼저 민재 때리고 제 머리채까지 잡았단 말이에요!지나가던 3학년 선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안이가 뛰어들어서 저희 살려준 거예요!" 수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 시은에게 담배를 건넸던 3학년 무리가 창틀에 기대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시은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짧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이유가 어찌 됐든 폭력은 폭력이야! 당장 징계위원회 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