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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作者: 진이이

제1화

作者: 진이이
“결혼한 지 2년 동안, 오빠랑 나 666번 잤어.”

“오빠, 하설 언니가 알까?”

달뜬 목소리가 사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심하설은 온몸의 피가 식으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배문교의 사무실을 찾았다

드디어 자신의 귀가 들린다고, 남편에게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설이 듣게 된 것은 남편의 외도였다.

상대는 낯선 여자가 아니었다.

남편의 명목상의 여동생.

하설의 남동생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원흉이었던 윤채아였다.

하설은 눈을 내리깔았다.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아픈 거였구나.’

안쪽에서는 끊길 듯 이어지는 숨소리와 나지막한 말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채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오빠, 결혼한 지 벌써 2년이나 됐잖아. 그런데도 매일 밤 나한테 오면서, 왜 하설 언니랑은 대충이라도 지내보지 않는 거야?”

오래도록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대답했다.

어릴 적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매혹적이고 성숙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더러워.”

채아가 나른하게 웃었다.

“맞아. 언니는 돈 많은 늙은 남자랑 결혼했던 적도 있잖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겠지.”

하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반지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에서부터 팔을 타고 뼛속까지 번졌다.

‘더럽다?’

‘나를 더럽다고 생각했구나.’

하설은 입술을 벌려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설이 자신을 팔아 마련한 10억 원으로 배문교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하설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떨리는 손끝으로 핸드폰을 꺼낸 하설은 동영상을 켜고 문틈 사이로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곧바로 남편의 외도를 증명할 영상이 찍혔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하설은 그대로 돌아서서 떠났다.

...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하설은, 턱밑까지 차오른 울음을 꾹꾹 참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오혜정이 다그쳤다.

[보청기 꼈지? 문교 옆에 있어? 민 대표한테 약속한 2차 투자금, 언제 들어오는지 물어봐. 그 회사는 지금 그 돈만 기다리고 있어.]

하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혜정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요즘 병원에는 갔어? 유준이 생명 유지 장비 임대료도 내야 해. 문교한테 꼭 말해서 잊어버리지 않게 해. 1분만 멈춰도 네 동생 목숨이 위험해지는 거 알잖아.]

하설은 눈을 감았다.

남동생 심유준이 식물인간이 된 지 2년.

지금껏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교가 해외의 첨단 바이오 연구소에서 독점 장비를 빌려 왔기 때문이었다. 특허를 낸 장비라 연간 임대료만 해도 20억 원 가까이 됐다.

하설이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자, 오혜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하나. 며칠 전에 사모님들이랑 쇼핑 갔는데, 누가 문교가 웬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다더라.]

하설은 코끝을 훔쳤다.

“엄마, 만약에... 만약에 배문교가 정말 바람을 피운 거라면, 나 이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혜정이 퍼부었다.

[하설이야, 정신 나갔니? 너 같은 청각장애인이 배씨 집안 며느리가 된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몰라? 남들은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 자리야. 그걸 네 손으로 밀어내겠다고?]

[외도? 그 여자가 배가 불러서 집 앞에 오더라도, 넌 얌전히 산후조리까지 해 줘야 할 판이야.]

[배문교 아내 자리만 지키면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어. 네가 문교하고 이혼하면 유준이, 너, 나, 민 대표도 다 굶어 죽게 돼!]

오혜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택시 안까지 울렸다.

기사가 백미러로 하설을 힐끔 쳐다봤다. 눈빛에는 동정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하설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 죽으면 되겠네.”

그리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하설은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고 다른 번호를 눌렀다.

“제가 결혼 전에 배문교 대표랑 작성했던 혼전계약서, 변호사님이 보관 중이시죠? 이혼합의서도 하나 준비해서 내일 같이 가져다주세요.”

상대는 곧 하설의 요구에 응했다.

하설은 씁쓸하게 웃었다.

‘배문교... 잊은 모양이네.’

결혼 전, 문교는 하설에게 충성을 증명하겠다며 기어이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문교가 결혼 생활 중에 외도할 경우, 본인 명의의 모든 재산은 하설에게 귀속된다.

문교는 한 푼도 갖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것이다.

...

하설은 새벽 2시까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문교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어둑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아내를 보자 문교는 놀란 듯이 다가왔다.

“왜 아직 안 잤어? 오늘 야근한다고 했잖아.”

길고 고운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설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아버지 심국경은 문교를 구하려다 세상을 떠났고, 하설은 그 충격으로 청력을 잃었다.

문교는 서툴게 수어를 독학했다. 밤을 새워가며 배웠고, 한 달 만에 능숙해졌다.

하설과 동생 유준에게도 알려 주었다.

그때 문교는 말했다. 평생 하설에게 잘하겠다고.

고개를 든 하설은 문교의 목덜미 안쪽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았다.

“피곤해?”

문교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웃었다.

하설의 손가락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마술처럼 팔찌 하나를 꺼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결혼 2년 동안 문교가 하설에게 준 666번째 선물이었다.

문교가 직접 팔찌를 채워 주었다.

“잘 어울린다. 예뻐.”

문교의 눈빛은 다정했다.

하설의 눈가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설은 그것을 666번 반복된 사랑이라고 믿었었다.

알고 보니 666번의 외도 뒤에 따라온 죄책감과 보상이었다.

하설은 손을 빼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사흘 뒤가 무슨 날인지 기억해?”

문교는 차분하게 손을 움직였다.

“회사 상장일. 시가 총액도 크게 오를 거야. 또 우리 결혼 2주년이고. 그날 선물 줄게.”

하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우리 남편을 위해 서프라이즈 준비했어.”

‘바로 자유를...’

더 이상 몰래 채아를 찾아가서 잠자리를 갖지 않아도 될 자유라는 선물.

문교는 하설의 손등을 토닥였다.

“일찍 자. 내일은 장인어른 기일이잖아. 같이 성묘 가야지.”

...

다음 날.

눈이 거세게 내렸다.

묘지로 가는 길에 문교의 핸드폰이 울렸다.

하설은 문교와 있을 때면 보통 보청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교는 거리낌 없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잔뜩 겁에 질린 채아의 목소리는 몹시 위태로웠다.

[오빠, 그 술 취한 옆집 남자가 또 문을 두드려. 너무 무서워. 와 줄 수 있어?]

문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양 비서 보내서 처리하라고 할게.”

채아의 말투에는 살짝 실망이 묻어났다.

[응... 알았어, 오빠.]

통화가 끊어졌다.

하설은 옷자락을 꽉 쥔 채 씁쓸하게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에게 고마운 마음은 남아 있는 모양이지.’

차가 다시 움직인 지 2분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또 울리자, 문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또 채아였다.

목소리는 한층 가늘고 부드러웠다.

[오빠, 무서워. 그 남자가 문을 따려고 해...]

문교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하설은 몸이 크게 앞으로 쏠리면서, 하마터면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

차가 멈추자, 안전벨트에 막혔던 몸이 다시 뒤로 튕겼다.

심한 흔들림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설은 눈썹을 곧추세우면서 평온한 눈빛으로 문교를 쳐다보았다.

표정을 누그러뜨린 문교가 수어로 말했다.

“미안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오늘 같이 성묘 못 갈 것 같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묘지로 갈게.”

하설의 마음은 이미 새카맣게 타서 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온순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일 보러 가.”

문교의 얼굴에 얼핏 죄책감이 떠오르더니, 손으로 하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설은 손길을 피하자, 문교의 손은 허공에 멈췄다.

텅 빈 손처럼... 문교의 마음도 이상하게 텅 빈 듯했다.

하지만 문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차문을 열어 주었다.

하설이 차에서 내리자, 문교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

하설이 손을 뻗었다.

“저기...”

외투를 그만 차 안에 두고 내린 것이다.

차가운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하설은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택시를 타고 아버지 묘지에 도착한 하설은 잡초를 뽑고 향을 피운 뒤 국화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지친 몸으로 묘소 앞에 앉아서 아버지에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나서야 하설은 뒤를 돌아보았다.

“변호사님, 부탁드린 서류 가져오셨어요?”

임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설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보더니, 서둘러 서류가방을 열고 계약서를 건넸다.

두 손으로 계약서를 받는 하설의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사합니다.”

휘성은 핸드폰에 글자를 써서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자 하설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말씀하셔도 돼요. 이제는 들려요.”

휘성은 놀랐다.

“소리가 들리십니까?”

하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휘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먼저 말했다.

“서영준 회장님은 제게 은인이셨습니다. 회장님의 아이를 지금 사모님께서 키우고 계시니, 저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변호사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하설은 고개를 들었다. 인형처럼 예쁜 작은 얼굴에는 슬픔이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하설의 막막한 심정을 읽은 듯 휘성이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를 신앙처럼 여기면, 신앙이 무너진 뒤에는 길을 잃게 됩니다.”

‘신앙...’

‘맞네.’

문교는 늘 하설의 신앙이었고, 삶이었다.

그때, 바로 지금 하설이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문교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땅 위에 한 글자씩 쓰며 맹세했다.

[설아, 아저씨 목숨 빚은 내가 평생 갚을게. 내 목숨은 네 거야.]

하설은 문교의 목숨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교는 하설의 반쪽 목숨을 가져가 버렸다.

핸드폰이 울리자 하설은 화면을 봤다.

문교의 메시지였다.

[채아 집에 일이 생겨서 집으로 데려왔어. 며칠 우리 집에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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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30화

    수술실 문이 다시 닫혔고 붉은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하설은 곁에 선 우건을 바라보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 감사합니다. 할머니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하설을 바라보는 우건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 먼저...”하지만 말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하설은 계속 가슴을 눌러 오던 뜨거운 뭔가를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며칠째 이어진 정신적 압박과 쌓인 감정에, 몸의 한계가 모두 피 속으로 몰려든 듯했다.“콜록, 콜록...”하설의 안색이 바뀌었다. 몸을 숙이고 격렬하게 기침을 하더니, 예고도 없이 검붉은 피가 입에서 튀어나왔다.눈앞의 모든 것이 일그러지면서, 귀에 들리던 소리도 천천히 멀어졌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하면서, 하설의 몸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아래로 무너졌다.하지만 바닥에 부딪치는 아픔은 전해지지 않았다.하설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남자가 강한 팔로 몸을 받쳤다.두 눈을 꼭 감은 하설의 몸은 차가웠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우건이 하설을 안아 들고서 급히 응급실로 향했다....“설아, 드디어 깼구나.”익숙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하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어떻게 당신이 있어?”문교는 조심스럽게 하설의 손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 아직 수액 맞고 있잖아. 할머니 수술은 아직 안 끝났어. 별말이 없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이야.”“의사가 말하길, 너는 요즘 감정 기복도 크고 정신적 압박이 심해서, 스트레스로 위장의 혈관이 파열됐대.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하설은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문교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묻어났다.“할머니가 그렇게 심하게 다치신 줄 몰랐어. 그때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네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할머니가 깨어나시면 내가 직접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할게.”문교를 바라보는 하설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9화

    말을 마치자 문교는 전화를 끊었다.“여보세요, 여보세요...!!”핸드폰에서는 차가운 통화 종료음만 흘렀다.핸드폰을 든 하설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귀 안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울렸다.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찬바람이 거침없이 밀려들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하지만 하설은 슬퍼할 시간도, 분노할 시간도 없었다. 할머니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하설이 버텨야 했다. 할머니를 살려야 했다.이 세상에서 하설에게 차고 따뜻한 것을 물어봐 줄 혈육은 할머니뿐이었다.‘누구를 찾아야 할까?’‘한소영 여사!’하설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소영에게 전화했다.“여사님, 제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병원에서는 도현민 선생님이 직접 집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소영 여사님,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한소영은 조금 놀란 듯했다.[널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라, 도씨 집안은 대대로 진씨 집안을 배경으로 삼은 의료계 명문 집안이야.] [보통 사람이 친분을 만들 수 있는 집안이 아니야. 나도 도 선생 어머니를 한 번 본 게 전부야.]하설은 맥이 빠진 목소리로 폐를 끼쳤다고 말한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도씨 집안은 진씨 집안을 배경으로 삼은 의료계 명문 집안...’‘진씨 집안...’‘진우건?!’한 손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하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감정을 억눌렀다. 우건의 번호를 찾아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의 연결음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무너져 가는 신경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제발... 전화를 받아 주세요...’통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자동으로 끊기기 직전에 비로소 전화가 연결됐다.나지막하고 안정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하설은 눈물이 다시 쏟아질 뻔했다.“회장님, 저예요. 심하설입니다. 죄송해요, 방해해서... 제 할머니가 병원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데, 당장 수술이 필요해요...”“병원에서는 도현민 선생님만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8화

    쿵!묵직하고 둔탁한 소리.두개골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끔찍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할머니!”하설은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갔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축 늘어진 할머니를 끌어안았다.“할머니, 괜찮아요? 저 좀 봐요!!”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핸드폰!! 내 핸드폰이 어디 있지?!’당장 119에 신고해야 했다.주머니를 뒤진 하설은 핸드폰을 꺼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119를 눌렀다.“로온힐스 1단지예요. 어르신이 계단에서 떨어져 의식이 없어요.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빨리요...”채아의 몸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렸다.두 손은 난간을 꽉 잡은 채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피어났다.‘저 늙은이, 설마 죽지는 않겠지?’극도의 혐오와 원망으로 가득찬 살기를 품은 시선이 채아에게 꽂혔다.그 눈빛을 마주하자 채아는 본능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하설은 잔뜩 쉰 목소리로 한 글자씩 씹듯이 내뱉었다.“윤채아! 우리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여버리겠어!”...차가운 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하설은 혼자 복도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술 중’이라는 붉은 불빛이 눈을 뜨겁게 비췄다.성순이 하율을 데리고 도착했고, 하설의 보청기도 가져왔다.성순이 있기에 하설은 습관처럼 보청기를 꼈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짙은 녹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주영숙 어르신 보호자분 계십니까?”하설은 튕겨 오르듯 일어났다.“저요. 제가 손녀예요. 우리 할머니 지금 어떠세요?”의사는 불필요한 말은 전혀 없이 간결하게 말했다.“어르신은 이송 당시 상태가 매우 위중했습니다. 심장병 병력이 있다는 점은 알고 계시죠.” “이번 충격으로 급성 광범위 심근허혈과 심각한 부정맥이 발생했습니다. 쉽게 말해 급성 심근경색입니다.”의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 송곳처럼 하설의 가슴에 박혔다.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의사 앞에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7화

    하설은 멍한 눈으로 채아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인지 안 들려. 미쳤어? 놔.”채아는 풋 웃었다.“언니, 내가 방금 밖에서 봤어. 전화 받을 때 보청기도 안 끼고 있었잖아. 아직도 내 앞에서 연기해?” “청력이 돌아온 걸 왜 문교 오빠한테 숨겨? 무슨 떳떳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야?”눈을 내리깐 채 하설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면서,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다른 손으로 채아의 손을 떼어 내면서 하설이 말했다.“청각장애인 앞에서 혼자 떠들어 대는 걸 보니,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외로운가 보네.”채아는 하설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아직도 연기해?”하설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채아를 쓱 훑어보고는,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화가 치민 채아가 다시 하설 앞을 막았다.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다가와서는, 마치 승자처럼 비웃었다.“그럼 내가 말해 줄게. 문교 오빠는 언니가 늙은 남자와 결혼했던 걸 더럽다고 여겨.” “결벽증이 있어서 차라리 한밤중에 차를 몰고 나를 찾아와 자더라도, 언니는 건드리고 싶지 않대.”“문교 오빠가 왜 언니랑 결혼했는지 알아? 첫째,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둘째, 언니 동생이 나를 구하다 식물인간이 됐으니까 불쌍해서.”“셋째, 한소영 여사가 문교 오빠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야. 언니처럼 배경도 없는 장애인과 결혼해야 한소영 여사가 안심할 수 있었거든.”말을 할수록 채아의 웃음은 더 커졌다.“언니, 솔직히 알려 줄까? 사실 언니 남편 욕구가 엄청 강해. 매일 밤 나를 원해. 너희 신혼 첫날 밤에도, 우리는 언니 방 발코니에서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했어.”짝!날카로운 손바닥이 바람을 가르며 채아의 뺨에 정확히 떨어졌다.채아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하얀 뺨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하지만 채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기 전부터 크게 웃었다.“드디어 꼬리가 잡혔네.”채아는 타오르는 눈으로 하설을 바라보았다.“역시 들리는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6화

    “다만 사모님께서 그동안 맞지 않는 세팅을 오래 견뎌 오신 탓에, 오히려 정상 세팅이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천천히 적응하셔야 합니다.”하설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군요.”이재훈은 하설 모자를 밖으로 배웅하며 말했다.“이건 배 대표님이 큰돈을 들여 사모님께 맞춘 제품입니다. 이것도 안 맞으면 시중의 어떤 보청기도 쓰기 어려울 겁니다.” “우선 적응해 보세요. 정말 견디기 힘들면 그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네, 알겠습니다.”하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진료실 밖으로 나온 하설은 하율의 손을 잡았다.“감사합니다, 교수님.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잖아요. 교수님처럼 마음씨 좋으신 분은 하늘도 다 보고 있을 거예요. 언젠가 꼭 돌려받으실 겁니다.”이재훈의 눈가가 움찔하더니, 미소도 조금씩 어색해졌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모님, 조심히 가십시오.”하설을 보낸 뒤, 이재훈은 진료실로 돌아가기도 전에 급히 핸드폰을 꺼내 은행 알림을 확인했다.계좌에 2천만 원이 입금됐다는 알림이었다....의사 면허가 날아갈 위험까지 감수하며 이런 일을 도왔으니, 문교가 건넨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문교가 이만한 돈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드러나지 않은 자금줄이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그 돈은 문교 명의가 아닌, 그가 믿는 누군가의 차명 계좌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배문교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수석비서 양현? 아니면 윤채아일까?’하설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켰다. 실타래처럼 엉켜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하설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푸는데, 거치대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설은 전화를 받은 뒤 하율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하율은 작은 손을 들어 눈송이를 받으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올해는 눈이 정말 많이 와요.”두 사람이 조각 장식이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라즈베리 핑크색 벤츠 안에서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5화

    이재훈은 평가표를 여의사에게 건넸다.“됐습니다.”여의사는 서둘러 진료실을 나갔다.이재훈은 느긋하게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배 대표님. 사모님이 아이 인공와우 수술 전 검사 때문에 제 진료실에 오셨습니다.”이재훈이 문교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하설의 살짝 귀를 기울였다. 한 손으로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율과 수어로 대화를 이어 갔다.이재훈의 말이 그대로 귀에 들어왔다.“정말 저를 곤란하게 하십니다. 사모님 보청기 파라미터를 더 올리면 사모님 몸과 정신 건강에 악영향이 생깁니다.”“심하면 귓속이 계속 찌르는 듯 아프고, 고막에 천공까지 생길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인공와우 수술도 영영 못 합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닙니다!”“하하하, 역시 배 대표님은 통이 크시네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하설의 손톱이 자신의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면서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알고 보니... 전부 거짓이었다.후천성 난청이라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거짓이었다.체질이 특이해 보청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말도 거짓이었다.문교는 의사와 짜고, 하설을 평생 소리 없는 세상에 가둬 두려고 했다.‘짐승...’소리 없는 분노가 하설의 눈속 깊은 곳에서 타올랐다.하설은 속이 뒤집힐 듯하면서 창백해진 손끝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하설은 다시 보청기를 꼈다.이재훈은 곁눈질로 확인한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사모님, 축하드립니다. 하율이는 한 달 뒤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보청기에 의지하지 않아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얼굴 표정을 필사적으로 조절해서, 하설은 겨우 기뻐하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정말 다행이네요. 교수님은 참 의사다운 분이세요.”이재훈은 웃으며 손짓했다.“사모님, 얼마 전 배 대표님을 뵈었는데, 사모님 보청기에서 전류음이 자주 난다고 하셨습니다. 집중도 잘 못 하실 정도라고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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