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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作者: 진이이
경매장 입구.

정갈한 제복을 입은 직원이 손을 내밀었다.

“초대장과 VIP 카드를 보여 주세요.”

하설은 담담하게 말했다.

“심하설입니다. 배문교 대표의 아내예요.”

직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설의 얼굴에서 치맛자락까지 훑었다.

“배 대표님과 사모님께서는 3분 전에 등록을 마치고 입장하셨습니다.”

하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배 대표에게 전화해 보세요.”

직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면서, 하설을 보는 눈빛에는 조롱의 기색이 담겼다.

“배 대표님이 사모님과 같이 계시는데, 제가 괜히 불편하게 해 드릴 수는 없죠.”

사적으로는 남편이 내연녀를 챙겨도, 중요한 자리에는 본처를 데리고 온다.

직원은 이 바닥에서 많이 보았다.

내연녀가 이렇게 눈치 없이 굴면 좋은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법이었다.

하설이 핸드폰을 들려던 때였다.

“새언니!”

밝은 목소리에 익숙한 음색.

하설이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남희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희는 다정하게 하설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왔어요? 왜 아직 안 들어갔어요?”

하설이 직원을 바라보자, 남희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새언니 못 들어가게 한 게 당신이에요?”

직원이 변명하려고 했지만 남희가 먼저 잘랐다.

“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번 달 월급 받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직원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구원을 바라는 눈으로 하설을 보았다.

“사모님, 제발...”

하설은 시선을 거두었다.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의 대가를 치러야 해.’

...

하설은 남희를 따라 홀 안으로 들어갔다.

남희는 급한 전화를 받고 멈췄다.

“언니, 백스테이지에서 찾네요. 언니는 3번 VIP룸에 가서 오빠랑 같이 있어요.”

말을 마친 남희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설은 남희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뒤, 경매장 뒤쪽 좌석으로 향했다.

“오빠, 하설 언니 아니야? 언니 안 온다면서?”

위에서 들린 목소리는 채아였다.

하설은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채아가 기어이 하설을 불렀다.

“언니, 문교 오빠랑 나 여기 있어. 올라와서 같이 있어.”

하설은 우연히 들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난간에 기댄 채아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하설을 내려다봤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잠시 뒤, 문교도 모습을 드러냈다.

문교는 하설의 작고 흰 귓볼을 보고 보청기가 없는 걸 확인했다.

문교가 가볍게 웃으며 수어로 말했다.

“올라와.”

하설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만 봐도 속이 메스꺼웠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설은 대꾸하지 않고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보청기를 꺼내서 머리카락을 넘기고 귀에 걸었다.

은색 테두리가 귓가에 붙으면서, 안쪽에서 가느다란 전류음이 울렸다.

문교는 미간을 찌푸렸다.

채아는 돌아온 뒤에도 내내 딴생각에 잠긴 문교를 보자 속이 상했다.

곧바로 문교 품에 기대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다 내 탓이야.”

정신을 차린 문교가 눈길을 살짝 들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또 왜?”

채아는 촉촉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여기 있어서 언니가 안 올라오는 거잖아. 나 그냥 갈까? 방해하고 싶지 않아.”

말이 끝나자 문교는 채아의 귓불을 장난스럽게 만졌다.

“네 탓이 아니야. 하설이 속이 좁은 거지. 넌 착하잖아. 이따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찍어.”

채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

5분 뒤 경매가 시작됐다.

서화, 도자기, 보석.

숫자가 오르고 낙찰을 알리는 망치로 내려칠 때마다 물건들은 새로운 몸값을 얻었다.

드디어 하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차례가 왔다.

시현사가 붉은 벨벳으로 덮인 작은 카트를 밀고 무대에 올랐다.

위에 씌운 천을 걷자, 비취 목걸이가 드러났다.

하설은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오늘 밤 28번째 물품은 예전 귀족들이 즐겨 착용하던 양식의 비취 목걸이입니다. 약간의 마모가 있고, 안쪽에는 사용한 흔적과 얕은 흠집 두 줄이 보입니다. 시작가는 400만 원, 호가 단위는 40만 원입니다.”

하설이 응찰패을 들었다.

“440만 원.”

채아는 그 낡은 목걸이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하설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창가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600만 원.”

누군가가 가격을 불렀다.

채아는 하설이 다시 응찰패을 드는 걸 보았다.

“800만 원.”

채아는 웃으면서 난간에 기댄 채 하설만 바라보았다.

하설이 원하는 걸 얻도록 놔 둘 수는 없었다.

경매사가 망치를 들어 말했다.

“800만 원 한 번, 800만 원 두 번, 800만 원...”

채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마지막 낙찰을 막았다.

“2천만 원.”

고개를 돌린 하설은 채아와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눈빛 아래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채아는 도발하듯 웃었다. 하설에게서 목걸이를 빼앗고 싶었다.

사실 그 낡고 볼품없는 목걸이는 전혀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만.

하설이 팻말을 꽉 쥐고서 들어 올렸다.

“2천2백만 원.”

채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4천만 원.”

하설이 말했다.

“4천2백만 원.”

채아가 곧장 받았다.

“6천만 원.”

하설도 물러서지 않았다.

“6천2백만 원.”

가격을 부른 뒤 하설은 무의식적으로 VIP룸을 올려다보았다.

문교와 눈이 마주쳤다.

문교는 뒤쪽에 혼자 앉아 있는 하설을 바라보면서, 혼자 외로운 모습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다 자업자득이야.’

‘올라오라고 했는데도 제멋대로 삐져서 혼자 있잖아!’

남자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채아가 갑자기 문교의 등에 기대자, 부드러운 몸이 문교의 등에 달라붙었다.

“오빠, 나 오늘 밤에 저 목걸이 꼭 갖고 싶어. 언니는 왜 자꾸 나랑 겨루는 거야?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난 거야?”

하설의 차가운 무시와 채아의 여린 애교는 선명하게 대비됐다.

문교는 아랫배 위에 포갠 채아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빠가 찍어 줄게.”

채아가 포기한 줄 알았던 때, 경매사의 들뜬 목소리가 떨렸다.

“3번 VIP룸에서 동반자분을 위한 상한 없는 응찰 요청이 접수되었습니다!”

하설은 헛웃음이 나왔다.

‘배문교... 참 대단해.’

하설의 세계에 남아 있던 마지막 폐허마저 끝내 폭발했다.

굉음이 귓속을 메웠고, 흩어진 잿더미는 촘촘한 바늘이 되어 심장 깊숙이 박혔다.

그 비취 목걸이는 하설 할머니의 유일한 혼수였다.

14살의 문교가 고열 끝에 폐렴으로 쓰러졌을 때, 병원비가 없던 할머니가 눈물을 머금고 전당포에 맡겼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문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린 목걸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새 여자를 위해 하설의 가장 소중한 것마저 빼앗으려고 했다.

하설도 자신이 몇 년을 찾아다닌 목걸이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마음은 온통 물을 잔뜩 먹은 솜이 가득찬 듯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모두가 3번 VIP룸에서 목걸이를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변수가 생겼다.

1번 VIP룸에서도 상한 없는 응찰을 요청했다.

경운시 경매 시장이 생긴 이래, 하나의 물품을 두고 두 VIP룸에서 동시에 상한 없는 응찰을 신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낡고 흠집이 난 비취 목걸이 하나.

사람들은 그런 평범한 물건이 왜 갑자기 두 거물의 눈에 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하설은 목걸이가 누구에게 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낯선 사람이 소장하기를 바랐다.

문교에게 넘어가서 채아의 손길이 닿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옆자리의 젊은 남자가 동행에게 속삭였다.

“하나의 경매품에 상한 없는 응찰자가 둘 이상 붙으면, 자금 확인 절차에 들어간대요. 결국 지불 능력이 더 확실한 쪽이 가져간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듣자, 하설의 마음속에 가까스로 피어오르던 희망이 힘없이 사그라졌다.

배씨 집안은 뿌리 깊은 재벌가다.

누가 배씨 집안보다 큰 자산을 갖고 있을까?

최상층의 서씨 가문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흠집 난 낡은 목걸이가 어떻게 서씨 가문 사람의 눈에 들겠는가?

하설은 힘없이 자리에 앉은 채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급히 자산 확인을 진행했다.

주변에서는 낮은 말소리가 이어졌다.

“3번 VIP룸은 배씨 집안의 배문교 대표래. 1번 룸은 누구지?”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확인이 끝났다.

경매사는 망치를 들어 단상을 가볍게 두드리고 공지를 받았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밤 스물여덟 번째 출품작은, 1번 VIP룸의 응찰자께 최종 낙찰되었습니다.”

하설은 멍하니 굳은 채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상대가 양보해 줄 수 있는지, 자신이 목걸이를 다시 살 수 있는지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하설이 1번 VIP룸에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검은 정장에 헤드셋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경호원 두 명이 앞에서 길을 열었다.

곧 잘 정돈된 검은 구두가 하설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설은 고개를 들었다.

경호원 뒤에 나오는 남자는 몸에 꼭 맞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뒤따르던 경호원이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남자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턱선은 얼음으로 깎은 듯 날카로웠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눈꼬리에는 서늘한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밝은 조명이 오똑한 콧대를 비추면서 살짝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가 눈 속의 무심함을 가렸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압박감이 있었다.

높은 자리에 오래 머문 사람 특유의 오만함과 귀티가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하설은 그 얼굴을 보자 놀라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어제 그 사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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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30화

    수술실 문이 다시 닫혔고 붉은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하설은 곁에 선 우건을 바라보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 감사합니다. 할머니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하설을 바라보는 우건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 먼저...”하지만 말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하설은 계속 가슴을 눌러 오던 뜨거운 뭔가를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며칠째 이어진 정신적 압박과 쌓인 감정에, 몸의 한계가 모두 피 속으로 몰려든 듯했다.“콜록, 콜록...”하설의 안색이 바뀌었다. 몸을 숙이고 격렬하게 기침을 하더니, 예고도 없이 검붉은 피가 입에서 튀어나왔다.눈앞의 모든 것이 일그러지면서, 귀에 들리던 소리도 천천히 멀어졌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하면서, 하설의 몸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아래로 무너졌다.하지만 바닥에 부딪치는 아픔은 전해지지 않았다.하설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남자가 강한 팔로 몸을 받쳤다.두 눈을 꼭 감은 하설의 몸은 차가웠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우건이 하설을 안아 들고서 급히 응급실로 향했다....“설아, 드디어 깼구나.”익숙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하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어떻게 당신이 있어?”문교는 조심스럽게 하설의 손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 아직 수액 맞고 있잖아. 할머니 수술은 아직 안 끝났어. 별말이 없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이야.”“의사가 말하길, 너는 요즘 감정 기복도 크고 정신적 압박이 심해서, 스트레스로 위장의 혈관이 파열됐대.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하설은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문교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묻어났다.“할머니가 그렇게 심하게 다치신 줄 몰랐어. 그때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네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할머니가 깨어나시면 내가 직접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할게.”문교를 바라보는 하설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9화

    말을 마치자 문교는 전화를 끊었다.“여보세요, 여보세요...!!”핸드폰에서는 차가운 통화 종료음만 흘렀다.핸드폰을 든 하설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귀 안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울렸다.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찬바람이 거침없이 밀려들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하지만 하설은 슬퍼할 시간도, 분노할 시간도 없었다. 할머니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하설이 버텨야 했다. 할머니를 살려야 했다.이 세상에서 하설에게 차고 따뜻한 것을 물어봐 줄 혈육은 할머니뿐이었다.‘누구를 찾아야 할까?’‘한소영 여사!’하설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소영에게 전화했다.“여사님, 제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병원에서는 도현민 선생님이 직접 집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소영 여사님,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한소영은 조금 놀란 듯했다.[널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라, 도씨 집안은 대대로 진씨 집안을 배경으로 삼은 의료계 명문 집안이야.] [보통 사람이 친분을 만들 수 있는 집안이 아니야. 나도 도 선생 어머니를 한 번 본 게 전부야.]하설은 맥이 빠진 목소리로 폐를 끼쳤다고 말한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도씨 집안은 진씨 집안을 배경으로 삼은 의료계 명문 집안...’‘진씨 집안...’‘진우건?!’한 손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하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감정을 억눌렀다. 우건의 번호를 찾아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의 연결음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무너져 가는 신경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제발... 전화를 받아 주세요...’통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자동으로 끊기기 직전에 비로소 전화가 연결됐다.나지막하고 안정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하설은 눈물이 다시 쏟아질 뻔했다.“회장님, 저예요. 심하설입니다. 죄송해요, 방해해서... 제 할머니가 병원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데, 당장 수술이 필요해요...”“병원에서는 도현민 선생님만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8화

    쿵!묵직하고 둔탁한 소리.두개골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끔찍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할머니!”하설은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갔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축 늘어진 할머니를 끌어안았다.“할머니, 괜찮아요? 저 좀 봐요!!”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핸드폰!! 내 핸드폰이 어디 있지?!’당장 119에 신고해야 했다.주머니를 뒤진 하설은 핸드폰을 꺼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119를 눌렀다.“로온힐스 1단지예요. 어르신이 계단에서 떨어져 의식이 없어요.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빨리요...”채아의 몸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렸다.두 손은 난간을 꽉 잡은 채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피어났다.‘저 늙은이, 설마 죽지는 않겠지?’극도의 혐오와 원망으로 가득찬 살기를 품은 시선이 채아에게 꽂혔다.그 눈빛을 마주하자 채아는 본능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하설은 잔뜩 쉰 목소리로 한 글자씩 씹듯이 내뱉었다.“윤채아! 우리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여버리겠어!”...차가운 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하설은 혼자 복도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술 중’이라는 붉은 불빛이 눈을 뜨겁게 비췄다.성순이 하율을 데리고 도착했고, 하설의 보청기도 가져왔다.성순이 있기에 하설은 습관처럼 보청기를 꼈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짙은 녹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주영숙 어르신 보호자분 계십니까?”하설은 튕겨 오르듯 일어났다.“저요. 제가 손녀예요. 우리 할머니 지금 어떠세요?”의사는 불필요한 말은 전혀 없이 간결하게 말했다.“어르신은 이송 당시 상태가 매우 위중했습니다. 심장병 병력이 있다는 점은 알고 계시죠.” “이번 충격으로 급성 광범위 심근허혈과 심각한 부정맥이 발생했습니다. 쉽게 말해 급성 심근경색입니다.”의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 송곳처럼 하설의 가슴에 박혔다.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의사 앞에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7화

    하설은 멍한 눈으로 채아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인지 안 들려. 미쳤어? 놔.”채아는 풋 웃었다.“언니, 내가 방금 밖에서 봤어. 전화 받을 때 보청기도 안 끼고 있었잖아. 아직도 내 앞에서 연기해?” “청력이 돌아온 걸 왜 문교 오빠한테 숨겨? 무슨 떳떳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야?”눈을 내리깐 채 하설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면서,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다른 손으로 채아의 손을 떼어 내면서 하설이 말했다.“청각장애인 앞에서 혼자 떠들어 대는 걸 보니,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외로운가 보네.”채아는 하설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아직도 연기해?”하설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채아를 쓱 훑어보고는,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화가 치민 채아가 다시 하설 앞을 막았다.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다가와서는, 마치 승자처럼 비웃었다.“그럼 내가 말해 줄게. 문교 오빠는 언니가 늙은 남자와 결혼했던 걸 더럽다고 여겨.” “결벽증이 있어서 차라리 한밤중에 차를 몰고 나를 찾아와 자더라도, 언니는 건드리고 싶지 않대.”“문교 오빠가 왜 언니랑 결혼했는지 알아? 첫째,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둘째, 언니 동생이 나를 구하다 식물인간이 됐으니까 불쌍해서.”“셋째, 한소영 여사가 문교 오빠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야. 언니처럼 배경도 없는 장애인과 결혼해야 한소영 여사가 안심할 수 있었거든.”말을 할수록 채아의 웃음은 더 커졌다.“언니, 솔직히 알려 줄까? 사실 언니 남편 욕구가 엄청 강해. 매일 밤 나를 원해. 너희 신혼 첫날 밤에도, 우리는 언니 방 발코니에서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했어.”짝!날카로운 손바닥이 바람을 가르며 채아의 뺨에 정확히 떨어졌다.채아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하얀 뺨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하지만 채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기 전부터 크게 웃었다.“드디어 꼬리가 잡혔네.”채아는 타오르는 눈으로 하설을 바라보았다.“역시 들리는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6화

    “다만 사모님께서 그동안 맞지 않는 세팅을 오래 견뎌 오신 탓에, 오히려 정상 세팅이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천천히 적응하셔야 합니다.”하설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군요.”이재훈은 하설 모자를 밖으로 배웅하며 말했다.“이건 배 대표님이 큰돈을 들여 사모님께 맞춘 제품입니다. 이것도 안 맞으면 시중의 어떤 보청기도 쓰기 어려울 겁니다.” “우선 적응해 보세요. 정말 견디기 힘들면 그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네, 알겠습니다.”하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진료실 밖으로 나온 하설은 하율의 손을 잡았다.“감사합니다, 교수님.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잖아요. 교수님처럼 마음씨 좋으신 분은 하늘도 다 보고 있을 거예요. 언젠가 꼭 돌려받으실 겁니다.”이재훈의 눈가가 움찔하더니, 미소도 조금씩 어색해졌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모님, 조심히 가십시오.”하설을 보낸 뒤, 이재훈은 진료실로 돌아가기도 전에 급히 핸드폰을 꺼내 은행 알림을 확인했다.계좌에 2천만 원이 입금됐다는 알림이었다....의사 면허가 날아갈 위험까지 감수하며 이런 일을 도왔으니, 문교가 건넨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문교가 이만한 돈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드러나지 않은 자금줄이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그 돈은 문교 명의가 아닌, 그가 믿는 누군가의 차명 계좌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배문교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수석비서 양현? 아니면 윤채아일까?’하설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켰다. 실타래처럼 엉켜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하설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푸는데, 거치대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설은 전화를 받은 뒤 하율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하율은 작은 손을 들어 눈송이를 받으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올해는 눈이 정말 많이 와요.”두 사람이 조각 장식이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라즈베리 핑크색 벤츠 안에서

  • 한 번에 복수하면 재미없잖아   제25화

    이재훈은 평가표를 여의사에게 건넸다.“됐습니다.”여의사는 서둘러 진료실을 나갔다.이재훈은 느긋하게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배 대표님. 사모님이 아이 인공와우 수술 전 검사 때문에 제 진료실에 오셨습니다.”이재훈이 문교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하설의 살짝 귀를 기울였다. 한 손으로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율과 수어로 대화를 이어 갔다.이재훈의 말이 그대로 귀에 들어왔다.“정말 저를 곤란하게 하십니다. 사모님 보청기 파라미터를 더 올리면 사모님 몸과 정신 건강에 악영향이 생깁니다.”“심하면 귓속이 계속 찌르는 듯 아프고, 고막에 천공까지 생길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인공와우 수술도 영영 못 합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닙니다!”“하하하, 역시 배 대표님은 통이 크시네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하설의 손톱이 자신의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면서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알고 보니... 전부 거짓이었다.후천성 난청이라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거짓이었다.체질이 특이해 보청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말도 거짓이었다.문교는 의사와 짜고, 하설을 평생 소리 없는 세상에 가둬 두려고 했다.‘짐승...’소리 없는 분노가 하설의 눈속 깊은 곳에서 타올랐다.하설은 속이 뒤집힐 듯하면서 창백해진 손끝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하설은 다시 보청기를 꼈다.이재훈은 곁눈질로 확인한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사모님, 축하드립니다. 하율이는 한 달 뒤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보청기에 의지하지 않아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얼굴 표정을 필사적으로 조절해서, 하설은 겨우 기뻐하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정말 다행이네요. 교수님은 참 의사다운 분이세요.”이재훈은 웃으며 손짓했다.“사모님, 얼마 전 배 대표님을 뵈었는데, 사모님 보청기에서 전류음이 자주 난다고 하셨습니다. 집중도 잘 못 하실 정도라고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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