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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메모의 단서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9 07:13:21

서재 안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은 노트북 화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이 직접 정리해 둔 자료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나자,

그 방 자체가 이전과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펜 하나, 서랍에 남아 있는 종이 몇 장,

벽에 걸린 시계까지도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어떤 시간의 끝에 남겨진 흔적처럼 느껴졌다.

건우는 노트북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엑셀 화면에는 계좌 흐름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형이 직접 입력했을 것으로 보이는 메모들이 남아 있었다.

날짜와 금액 사이에 짧은 문장들이 몇 개 섞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짧은 표시나 숫자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중 몇 줄은 분명히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화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여기.”

그녀가 말했다.

건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셀 하나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확인 필요 - 지분 이전 전

하나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지분 이전.”

그녀가 낮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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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114. 남겨진 집

    다음 날 아침, 하늘은 맑았지만 공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비가 온 뒤처럼 습기가 남아 있었고, 햇빛은 밝았지만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건우는 형이 살던 집 앞에 차를 세웠다.이 집에 다시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사고 이후 몇 번 정리할 일이 있어 들렀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정신없이 물건만 정리하고 나왔을 뿐이었다. 그 공간을 제대로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오늘은 달랐다.차에서 내린 건우는 잠시 현관문을 바라봤다.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를 이유도, 누군가 문을 열어 줄 가능성도 없는 집이었지만, 그 문 앞에 서 있으니 묘하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하나는 그의 옆에 서 있었다.“긴장돼?”그녀가 조용히 물었다.건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아니.”그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오랜만이라.”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건우에게 건넸다. 형의 집 열쇠였다.사고 이후, 유품 정리를 하면서 건우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건우는 잠시 그 열쇠를 바라봤다.쇠로 된 작은 열쇠 하나였지만 손 안에서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잠시 후, 그는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흘러나왔다.오래 닫혀 있던 집 특유의 공기와 함께, 형이 쓰던 향수의 희미한 향이 섞여 있었다.건우는 잠시 문턱에 서 있었다.하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창문부터 열자.”그녀가 말했다.거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닫혀 있던 공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집 안은 사고 이후 거의 그대로였다.가구의 위치도 변하지 않았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책 몇 권도 그대로였다.그 집은 마치 사람이 잠깐 나갔다가 곧 돌아올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그 집의 주인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건우는 천천히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방 안 곳곳을 훑었다.형의 소파.책장.테이블.그리고 벽에 걸린 액자.하나는 이미 집 안을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그녀는 서둘러

  • 형수의 밤   113. 신뢰의 붕괴

    밤이 깊어지자 집 안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서재의 불을 끈 뒤에도 건우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렸고, 늦은 시간에도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의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스치듯 지나갔다.하나는 주방에서 물을 따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그녀는 잠시 건우를 바라보다가 그의 앞 테이블 위에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생각 정리 안 되지.”그녀의 말투는 단정했지만, 묻는 방식이라기보다는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건우는 잔을 집어 들었다.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뜨거웠다.“형이 남긴 기록은 거의 다 확인한 것 같아.”그는 천천히 말했다.“계좌 흐름도 그렇고, 회사 내부 구조도 그렇고… 누가 돈을 움직였는지까지는 다 나와.”잠시 말을 멈춘 뒤, 건우는 잔을 내려놓았다.“근데 이상해.”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어떤 점이.”건우는 창밖을 바라본 채 말을 이어갔다.“형이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니야.”그 말은 아주 조용했지만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 정도까지 확인했으면.”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그 다음 행동을 준비했을 거야.”하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윤시우는 단순히 의심만 하고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발견했다면, 그 사실을 이용해 누군가를 움직이거나 최소한 외부 기관에 넘길 준비를 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에는 그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았다.계좌.거래.지분.의심.여기까지였다.하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형이 누군가를 만나려고 했을 수도 있어.”건우의 시선이 움직였다.“누굴.”“외부.”그녀의 대답은 짧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회사 내부에서 해결할 문제 아니었잖아.”잠시 정적이 흐른 뒤 하나가 덧붙였다.

  • 형수의 밤   112. 기록 너머의 빈칸

    밤이 깊어질수록 서재의 공기는 더 조용해졌다.창문 밖에서 들려오던 골목의 소음도 점점 줄어들었고, 가로등 불빛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밝히고 있었다. 낮 동안 이어졌던 이야기들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생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건우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한 번 더 접어 파일 사이에 끼워 넣었다.형이 남겨 둔 기록은 이제 대부분 확인했다.계좌 흐름과 메모, 숨겨 둔 거래 기록까지 이어지면서 사건의 방향은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 돈의 흐름은 우연처럼 보였지만 반복되고 있었고, 그 끝에서 계속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김도현.형이 마지막까지 기록으로 남긴 이름.하지만 건우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질문이 조금씩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하나는 창문 옆에서 돌아섰다.“이제 그만 정리할까.”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피로가 묻어 있었다. 하루 동안 확인한 정보가 너무 많았고,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지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는 노트북 화면을 천천히 닫았다.서재 안의 빛이 조금 줄어들었다. 노트북 불빛이 사라지자 방 안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졌다.하나는 잠시 책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건우.”그는 고개를 들었다.“형이 남긴 기록.”그녀의 말이 이어졌다.“거의 다 확인한 것 같긴 한데.”잠시 멈춘 뒤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래도 뭔가 하나 빠져 있는 느낌이야.”건우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빠져 있다고?”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보면.”그녀는 말을 이어갔다.“형은 돈 흐름을 발견했고, 김도현까지 의심했고, 지분 정리도 준비하고 있었어.”건우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하나의 말은 논리적으로 맞았다.“그런데.”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 다음 단계가 안 보여.”건우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다음 단계.”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 성격 알잖아.”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 형수의 밤   111. 증명의 한계

    서재의 불은 그대로 켜져 있었지만, 창문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골목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면서 창틀에 희미한 빛이 비쳤고, 책장 위에 놓인 액자와 서류들에도 얇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낮 동안 이어졌던 대화가 멈춘 뒤로 한동안 말소리는 없었지만, 세 사람의 생각은 같은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건우는 노트북을 닫은 채 책상 앞에 서 있었다.형이 남긴 기록은 이제 대부분 확인했다. 계좌 흐름, 메모, 숨겨 둔 문서까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단순한 흔적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형은 돈의 흐름을 발견했고, 그 끝에서 김도현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그리고 그 사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이미 상황을 눈치챘다는 기록도 남겨 두었다.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사고.형의 죽음.그리고 멈춰 버린 시간.건우는 천천히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손끝에 닿는 나무의 차가운 감촉이 묘하게 현실감을 되돌려 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만 이어지던 생각들이 조금씩 실제의 무게를 가지기 시작했다.하나는 창문 옆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골목을 지나는 자동차 불빛이 창문에 스치고 지나갔다.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건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 동안 이어졌던 추측과 분석이 이제는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건우.”그는 고개를 들었다.“응.”“지금.”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어 말했다.“머릿속에 있는 생각… 나랑 비슷해?”건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그리고 창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바깥 공기가 유리창을 통해 흐릿하게 느껴졌다.“형이 발견한 것.”그가 낮게 말했다.“거의 다 맞는 것 같아.”하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건우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다.“돈 흐름도 그렇고.”그는 말을 이어갔다.“지분 문제도 그렇고.”잠시 후 덧붙였다.“

  • 형수의 밤   110. 아직 닿지 않은 자리

    서재 창문 밖으로 저녁이 완전히 내려앉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골목 위로 번지면서 창문 유리에는 흐릿한 노란색이 비쳤고, 책장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낮과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에는 단순한 방처럼 보였던 공간이 어둠이 내려오자 갑자기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건우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형이 남겨 둔 종이와 파일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서랍 아래에서 발견한 문서, 회색 파일 속에 남겨진 메모, 그리고 노트북에 정리되어 있던 계좌 흐름까지. 지금까지 확인한 것들은 하나씩 이어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형은 돈의 흐름을 발견했다.지분 정리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도현이라는 이름이 계속 등장했다.하나는 창문 가까이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한 기록들은 단순한 우연이나 오해로 넘기기에는 너무 정확하게 맞물리고 있었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건우.”그는 고개를 들었다.“형이 여기까지 정리해 놓은 거라면.”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어 말했다.“이미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을 거야.”건우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형은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에야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지금 발견된 기록은 그 과정의 중간쯤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완전히 끝난 증거는 아니지만, 방향은 분명히 가리키고 있었다.건우는 조용히 말했다.“그래서 변호사를 만나려고 했겠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마지막으로 남겨 둔 일정에도 그 이름이 있었다. 지윤 변호사와의 약속.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형이 그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서재 안에는 책 넘기는 소리도, 키보드 소리도 없었다. 세 사람의 생각만 조용히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

  • 형수의 밤   109. 지연된 파국

    서재 안의 빛이 거의 사라질 무렵이었다.창문 너머로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고, 책장과 책상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한층 깊어졌다. 형이 남긴 기록을 하나씩 확인하다 보니 시간 감각이 흐려져 있었지만, 방 안 공기가 달라진 것을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건우는 방금 덮은 회색 파일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현 - 이미 알고 있음형의 글씨로 남겨진 그 짧은 문장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과, 그 사람이 이미 상황을 눈치챘다는 걸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단계의 이야기였다.하나는 책상 옆에 기대 서서 건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건우.”그녀가 부르자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형이 저렇게 적어 놨다는 건.”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어 말했다.“둘 사이에 이미 뭔가 오간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서재 안 공기가 조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형은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특히 회사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그랬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먼저 상황을 정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편이었다.그런 형이 누군가의 이름 옆에 저런 문장을 남겨 놓았다.이미 알고 있음.그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어떤 순간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처럼 보였다.건우는 조용히 말했다.“형이 직접 말했을 수도 있어.”하나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김도현한테?”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으면.”그의 말이 이어졌다.“언젠가는 마주쳤겠지.”그 가능성은 충분했다.지분 정리나 자금 흐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회사라는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그녀의 말이 이어졌다.“형이 먼저 경고했을 수도 있겠

  • 형수의 밤   7. 6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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