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
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답한 거지요?”
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
“응.”
“한 번 더 해 볼까요?”
“아니. 여기까지.”
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
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
“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
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
“새벽에도 문을 열어?”
“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
“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
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
“공주님도요?”
“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
◊
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묶어 주다가 손을 멈췄다. 끈 끝에 실밥이 나와 있었다. 가위로 잘라 낸 뒤 매듭을 다시 묶었다.
“바닥이 차갑대요. 방석을 가져갈까요?”
“거기 있는 걸 쓰면 돼.”
“제가 안까지 따라갈게요.”
엘리네는 장갑을 집었다.
“문 앞까지만 와 줘.”
마리엔은 더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밤을 지킨 등불이 남아 있었다. 황후궁 문지기가 엘리네를 보고 명부를 펼쳤다. 펜 끝에서 잉크가 떨어지기 전에 종이 가장자리에 한 번 눌렀다.
“예배당에 다녀오겠어요.”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마리엔이 함께 가요. 돌아올 때도 같은 길로 올 거예요.”
문지기는 목적란을 채웠다. 엘리네는 적힌 글을 끝까지 본 뒤 걸음을 옮겼다.
본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 예배당 앞에 이르렀을 때, 동쪽 창의 유리는 아직 어두웠다. 열린 문 안에서 촛농 냄새가 났다. 안을 쓸던 관리인이 빗자루를 벽에 세우고 허리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보낸 초는 받았나요?”
“예. 아침 기도에 쓰려고 꺼내 두었습니다.”
문 옆 상자에 새 초가 한 줄로 누워 있었다. 상자 아래에는 엘리네가 보낸 물품표가 놓여 있었다.
『예배당 봉헌용 초.』
엘리네는 표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혼자 기도하겠어요.”
관리인은 바닥에 남은 먼지를 모아 치웠다. 엘리네가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엔도 문밖으로 물러났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복도에서 누가 오면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엘리네는 앞줄이 아닌 가운데 긴 의자를 골랐다.
제단 앞에는 초가 켜져 있었다. 그중 끝에 꽂힌 초 하나가 꺼져 있었다. 심지 위에는 굳은 촛농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장갑을 벗어 옆에 두었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기도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리엔이 관리인에게 물품표를 돌려달라고 청하는 소리가 났다.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이어졌다. 엘리네는 모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얼마 뒤 구두 밑창이 돌바닥에 닿았다.
발소리는 엘리네 뒤에서 멎었다. 의자가 조금 울렸다. 엘리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옆에 놓인 장갑을 보았다.
“불을 보았습니다.”
뒤에서 짧은 목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엄지손가락을 포갰다.
“저도 답을 봤어요.”
“다른 뜻은 묻지 않겠습니다.”
“아직 전한 게 없으니까요.”
“예.”
칼릭스는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엘리네가 등을 기대면 의자 등받이 하나를 사이에 두게 되는 자리였다. 문 쪽에서는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앉은 것으로 보일 터였다.
“혼자 오셨나요?”
“부관은 회랑에서 기다립니다.”
엘리네는 열린 문을 보았다. 칼릭스의 부관이 문밖에 있다는 말은 이 만남을 숨겨 줄 사람이 있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칼릭스가 엘리네의 뒤에 앉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엘리네는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그러시는 편이 낫습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을 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이 보였다.
“원본 대조는 왜 늦어지나요?”
“재상 측에서 열람할 문서를 고르는 중입니다.”
“제가 본 사본과 다른 걸 내놓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같은 판에서 뜬 지도인지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 종이와 인장까지요.”
엘리네는 고개를 조금 들었다.
“지도 아래쪽을 보세요. 접었다 편 자리에 잉크가 끊긴 곳이 있었어요. 원본에도 같은 곳이 비어 있으면 그걸 옮긴 사본이에요.”
뒤에서 옷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적어 두겠습니다.”
“여기서는 적지 마세요.”
소리가 멎었다.
“알겠습니다.”
복도에서 관리인이 마리엔에게 아침 기도 때 쓸 방석을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엔이 대답한 뒤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서재의 지도에서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어요.”
칼릭스는 재촉하지 않았다.
“붉은 선이 국경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탈로를 지나 노르덴 안쪽까지 이어졌어요. 선 옆에는 진입과 점령이라고 적혀 있었고요.”
말을 마친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점령까지 적혀 있었습니까?”
“네. 제 눈으로 읽었어요.”
칼릭스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엘리네는 의자 끝에 손을 얹었다.
“보급 계획서에도 고개를 넘은 뒤의 일정까지 잡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고개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던 거네요.”
“예.”
엘리네는 손끝으로 의자 모서리를 눌렀다. 훈련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지도가 아니었다. 틀린 축척만을 두고 나눈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날은 길이 열리지 않아요.”
“저도 같은 의견을 올렸습니다.”
“의견으로 끝났나요?”
“아직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준비는 계속되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엘리네는 입술을 다물었다. 창밖에서 새벽 종을 준비하는 사람이 밧줄을 당겨 보는 소리가 났다. 종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제가 북쪽에서 왔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압니다.”
“고개 아래에서 눈이 녹기 시작해도 위쪽은 달라요. 낮에 풀린 눈이 밤에 얼어요. 수레를 올렸다가는 내려오지도 못해요. 길옆으로 비켜설 자리도 없고요.”
말이 빨라졌다. 엘리네는 손을 펴 의자 위에 놓았다.
“제가 그 길을 걸었어요. 지도에 굽이 하나를 빼면 종이에서는 짧아져도 길에서는 그대로 돌아가야 해요.”
“그 거리를 빼고 보급일을 잡았습니다.”
“고칠 수 있나요?”
“고쳐야 합니다.”
엘리네는 뒤를 돌아볼 뻔했다. 대신 장갑을 들어 손가락 사이를 바로 폈다.
“명령이 그대로 내려오면요?”
칼릭스가 낮게 답했다.
“병사 열에 셋이 얼어 다칠 행군을 승인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가 승인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보내면 되잖아요.”
“제 이름으로 나가는 행군 명령과 보급 인수는 제가 확인합니다. 확인하지 않은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걸로 오래 막을 수 있어요?”
“오래는 못 막습니다.”
엘리네는 장갑을 다시 내려놓았다.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쉽게 막을 수 있다고 했다면, 다음 말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원본이 필요하군요.”
“길과 물자가 맞지 않는다는 기록이 필요합니다. 반대했다는 말만 남겨서는 부족합니다.”
엘리네는 손을 다시 모았다.
“노르덴에 알리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 편지가 어디를 거쳐 가는지 아십니까?”
“몰라요.”
“그러면 지금 보내시라고 권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 편지를 보내는 것도 같겠죠.”
“예.”
문밖에서 방석을 놓던 손이 멎었다. 엘리네는 눈을 내리깔았다. 관리인이 예배당 안을 잠깐 보고 다시 돌아갔다.
칼릭스도 말을 멈췄다.
엘리네는 기도하는 자세로 기다렸다. 무릎 아래 방석 한쪽이 접혀 있었다. 발을 움직여 펴려다가 소리가 날까 봐 그대로 두었다.
관리인이 복도 끝으로 가자 엘리네가 입을 열었다.
“전하가 원하시는 건 병사들을 그 길에 보내지 않는 일이겠죠.”
“예.”
“제가 원하는 건 제 고향에 그 군대를 들이지 않는 일이고요.”
“예.”
“한쪽만 이뤄져서는 안 돼요.”
엘리네는 이번에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검은 소매와 무릎 위에 놓인 칼릭스의 손이 보였다.
“고개가 위험하니 다른 길로 가자고 하시면, 저는 전하께 지도를 보여 드릴 수 없어요.”
“다른 침공로를 그려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도요?”
“예.”
엘리네는 칼릭스의 얼굴을 보았다.
칼릭스는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손을 뻗거나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열린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엘리네를 보았다.
“무엇을 내놓으실지 지금 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는요?”
“제가 확인한 기록을 드리겠습니다. 받으실지는 폐하께서 정하십시오.”
엘리네는 몸을 바로 돌렸다.
제단 끝의 꺼진 초가 눈에 들어왔다. 받침 아래에 떨어진 촛농이 굳어 있었다. 새 초가 든 상자는 문 옆에 그대로였다.
엘리네가 그쪽을 보고 있자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가 옆을 지나 앞으로 갔다. 칼릭스는 촛대 앞에서 멈춰 작은 집게를 들었다. 심지에 붙은 촛농을 떼어 받침에 놓고, 옆에 있던 가는 초에 불을 붙였다.
불을 옮겨도 심지는 바로 타지 않았다. 칼릭스는 손을 떼지 않고 기다렸다.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뒤 가는 초를 끄고 집게를 제자리에 놓았다.
문 앞에 돌아온 관리인이 허리를 숙였다.
“제가 살폈어야 했는데요.”
“심지가 잠겨 있었습니다.”
칼릭스는 촛대에서 비켜섰다. 관리인이 받침을 확인하는 동안 뒤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
엘리네도 장갑을 집고 일어났다.
관리인이 빈 상자를 들고 나갔다. 마리엔이 문 옆에서 엘리네를 보고 외투를 챙겼다. 이제 몇 걸음만 가면 칼릭스와 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엘리네는 의자 밖으로 나섰다.
칼릭스가 통로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엘리네가 먼저 지나가도록 내준 길이었다. 엘리네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하.”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장갑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다른 손을 내밀어 칼릭스의 손목을 잡았다.
소매 끝이 손바닥에 걸렸다. 칼릭스의 손이 멎었다. 손을 빼지도, 엘리네의 손을 덮지도 않았다.
“도와주세요.”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펼치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말을 고쳤다.
“아니, 같이 해요.”
칼릭스의 시선이 손목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제가 아는 길을 드릴게요. 전하께서는 그 길로 군대를 보내지 않을 방법을 찾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 뒤에도 칼릭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손가락을 풀었다. 소매에 생긴 주름을 보고서야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알았다. 장갑을 끼려는데 입구가 접혀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칼릭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에서는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모습만 보일 거리였다.
엘리네는 장갑의 접힌 부분을 폈다. 손을 넣고 손가락 끝을 하나씩 눌렀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칼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엘리네는 말을 멈췄다. 칼릭스가 조금 전 잡혔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폐하가 먼저 손을 잡으셨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19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8일, 지도 감정 자료를 대조한다.』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소매에 남은 주름을 더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자료가 준비되면 황후궁으로 보내 주세요.”“직접 가져가겠습니다.”엘리네는 문턱 앞에서 돌아보았다.“그럼 제가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겠어요.”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펼쳐 준 외투에 팔을 넣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겨울 첫째 달 28일 밤, 엘리네는 지도실 탁자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치웠다.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옮겼다. 탁자 옆에 나란히 놓으려는 것을 엘리네가 막았다.“맞은편에 놓아 줘.”마리엔은 의자를 탁자 건너로 가져갔다. 등받이가 벽에 닿지 않는지 살핀 뒤 앉는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문지기는 자료 대조라고 적었어요.”“뭐라고 물었어?”“왜 응접실을 안 쓰시냐고요. 지도를 아래로 옮기면 접힌다고 했어요.”탁자에는 펼친 종이와 접는 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탁자로는 종이 끝을 받치기 어려웠다. 문지기가 올라와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엘리네는 등불을 옆으로 밀었다.“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마리엔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눌러 보았다.“저는 문 앞에 있으면 돼요?”“누가 오면 문을 두드려 줘. 막으려고 하지는 말고.”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