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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거래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8 19:40:00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8일, 지도 감정 자료를 대조한다.』

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

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소매에 남은 주름을 더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자료가 준비되면 황후궁으로 보내 주세요.”

“직접 가져가겠습니다.”

엘리네는 문턱 앞에서 돌아보았다.

“그럼 제가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겠어요.”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펼쳐 준 외투에 팔을 넣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

◊

겨울 첫째 달 28일 밤, 엘리네는 지도실 탁자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치웠다.

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옮겼다. 탁자 옆에 나란히 놓으려는 것을 엘리네가 막았다.

“맞은편에 놓아 줘.”

마리엔은 의자를 탁자 건너로 가져갔다. 등받이가 벽에 닿지 않는지 살핀 뒤 앉는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문지기는 자료 대조라고 적었어요.”

“뭐라고 물었어?”

“왜 응접실을 안 쓰시냐고요. 지도를 아래로 옮기면 접힌다고 했어요.”

탁자에는 펼친 종이와 접는 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탁자로는 종이 끝을 받치기 어려웠다. 문지기가 올라와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네는 등불을 옆으로 밀었다.

“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

마리엔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눌러 보았다.

“저는 문 앞에 있으면 돼요?”

“누가 오면 문을 두드려 줘. 막으려고 하지는 말고.”

“네.”

마리엔이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네는 둥근 창의 걸쇠를 확인했다. 서쪽 저택은 여기서 보였지만, 오늘은 창가에 불을 두지 않았다. 문으로 들어올 사람을 창으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탁자 모서리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마리엔이 먼저 문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공 전하 오셨어요.”

칼릭스는 문턱 밖에 서 있었다. 가죽 지도통을 든 손에 장갑이 함께 들려 있었다. 복도를 지나오는 동안 외투에 묻었는지 어깨에 흰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엘리네는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들어오세요.”

칼릭스가 문턱을 넘었다. 마리엔은 문을 닫기 전에 바깥을 살폈다.

“차가 식으면 부르세요.”

문이 닫혔다.

엘리네는 문손잡이에서 눈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칼릭스는 의자 옆에 지도통을 세운 뒤에야 앉았다. 탁자가 사이에 놓이자 어깨에 묻은 가루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 오시는 곳이죠.”

“예.”

칼릭스가 벽을 따라 놓인 서가와 창을 보았다.

“종이를 펼칠 곳이 필요했어요.”

“아래에서는 모서리가 접히겠습니다.”

그 말에 엘리네는 자기가 눌러 둔 종이 끝을 보았다. 펴 놓은 지도 아래로 바느질할 때 쓰던 천 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탁자를 닦을 때 미처 치우지 못한 천이었다.

엘리네가 천을 빼려 하자 찻잔이 흔들렸다. 칼릭스는 손을 뻗지 않고 자기 쪽 잔을 들었다.

천을 걷어 낸 뒤 엘리네가 말했다.

“이제 내려놓으셔도 돼요.”

칼릭스는 잔을 원래 자리에 놓았다.

문밖에서 낮은 콧노래가 들렸다. 마리엔이 노르덴에서부터 부르던 자장가였다. 가사는 부르지 않고 같은 대목을 흥얼거렸다.

칼릭스의 시선이 문으로 갔다.

“계속 저기 있습니까?”

“누가 계단으로 오면 노래를 멈출 거예요.”

엘리네는 접는 자를 종이 위에 놓았다.

“문을 잠그지는 않았어요.”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져오신 것부터 볼게요.”

칼릭스는 지도통에서 묶은 서류를 꺼냈다. 엘리네 쪽으로 밀기 전에 끈을 풀고 맨 위의 종이를 뒤집었다. 아래에는 날짜와 품목이 적힌 표가 있었다.

“보급 계획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제가 확인한 부분만 적었습니다.”

엘리네는 종이를 돌려 읽었다.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아래로 운송에 필요한 날수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자 끝을 날짜 옆에 대고 차례로 내려갔다.

“여기서부터 고개까지를 같은 속도로 잡았네요.”

“수레가 멈추지 않는 계산입니다.”

“이 길에서는 수레를 세워야 해요. 앞 수레가 바퀴를 빼낼 동안 뒤는 갈 수 없어요.”

“그 시간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엘리네는 자기 지도의 가장자리를 들어 서류 옆에 놓았다. 손가락으로 굽은 길을 짚다가 멈췄다.

칼릭스는 종이를 당기지 않았다.

“이 지도를 가져가실 수는 없어요.”

“여기서 보겠습니다.”

“옮겨 그리는 것도 안 돼요. 아직은요.”

“알겠습니다.”

엘리네는 손가락을 치웠다. 칼릭스가 길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엘리네는 그동안 표의 날짜를 다시 읽었다.

“여기를 지나면 보급을 다시 받아야 해요. 그런데 준비한 건 고개를 넘을 때까지의 양뿐이네요.”

“예. 모자라는 몫을 현지에서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노르덴 마을에서요?”

칼릭스가 대답하기 전에 엘리네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건 보급 계획이 아니에요. 우리 쪽 창고를 비워서 채우겠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대로 승인할 수 없습니다.”

문밖의 노래가 끊겼다.

엘리네는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도 서류에서 손을 뗐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마리엔을 불렀다. 마리엔이 차는 아직 더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둘은 기다렸다.

노래가 다시 들리자 엘리네가 종이 끝을 폈다. 눌린 자리에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방까지 왔다는 건 기록에 남겠죠.”

“자료를 대조했다고 남을 겁니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요.”

“예.”

“그런데도 직접 오셨어요.”

칼릭스는 문 쪽을 보지 않았다.

“폐하께서 주신 지도를 어떻게 쓸지 직접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엘리네는 자를 접지 않은 채 옆으로 밀었다.

“그럼 지금 정해요. 서로 무엇을 할지.”

칼릭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저는 황제의 침공을 막고 싶어요. 날짜를 늦추거나 다른 고개로 보내는 게 아니라, 노르덴에 군대를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저도 같은 뜻입니다.”

“봄에 못 가면 여름에 보내겠다고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실 수 있습니다.”

엘리네는 보급표를 칼릭스 쪽으로 돌려놓았다.

“전하가 이 계획을 돌려보내면 다음 계획이 오겠죠. 잘못된 지도를 고쳐도 그걸로 다시 길을 찾을 테고요.”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도만 고쳐서는 안 돼요.”

엘리네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숨길 필요가 없는데도 손가락이 모여 있었다. 손을 펴고 칼릭스를 보았다.

“황제를 끌어내려야 해요.”

문밖에서는 같은 노래가 이어졌다.

칼릭스는 엘리네가 내놓은 지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말씀은 문서에 적지 마십시오.”

“전하께 하려고 정한 말이에요.”

“누군가 들으면 지도 감정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거예요.”

엘리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갔다. 서랍을 열고 은 컴퍼스를 꺼내 왔다. 손에 익은 물건을 쥐자 탁자로 돌아오는 걸음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다.

컴퍼스를 종이 위에 내려놓고 다시 앉았다.

“전하께 황제를 해쳐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명령을 내려도 군대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고 싶어요.”

“명령을 거부할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틀린 지도와 보급표로는 모자라나요?”

“누가 언제 확인했고, 무엇을 알고도 승인했는지 남아야 합니다. 계산 착오라고 하면 다시 계산하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엘리네는 보급표에 적힌 칼릭스의 글씨를 보았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네요.”

“고치라고 했는데도 그대로 진행했다는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걸 전하가 모으실 수 있어요?”

“군령과 보급 기록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제게 열람 권한이 있는 것부터요.”

“지도를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도 찾아낼 건가요?”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서명한 사람이 직접 그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 이름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대답이었다.

“저는 지도를 볼게요. 실제 길과 다른 곳을 골라낼 수 있어요. 같은 지도를 베낀 건지, 나중에 손댄 건지도 살피고요.”

“원본과 사본을 함께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고친 내용은 전하가 확인해 주세요. 제 말만 듣고 군부에 내놓지는 마세요.”

칼릭스가 서류를 짚었다.

“길은 폐하께 여쭙고, 행군과 물자는 제가 대조하겠습니다.”

“서로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네는 식은 차를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을 때 받침에서 소리가 났다. 문밖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지도를 보여 드렸다는 이유로 다른 걸 요구하지는 마세요.”

“어떤 것이든 먼저 묻겠습니다.”

“제 이름도, 노르덴의 이름도 전하가 정해서 쓰시면 안 돼요.”

“예.”

“저도 전하의 군대를 제 군대라고 여기지 않을게요.”

칼릭스가 엘리네를 보았다.

엘리네는 찻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같이 한다고 해도 전하께서 거절할 일은 있겠죠. 그때마다 제 고향을 앞세우지는 않겠다는 뜻이에요.”

“거절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다시 생각할게요.”

칼릭스는 빈 종이를 꺼내려다 멈췄다. 엘리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정한 건 적지 말아요.”

“예.”

“대신 가져오신 자료는 두고 가 주세요. 내일 낮에도 읽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자료 대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시면 됩니다.”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면요?”

“폐하께서 정하십시오. 제가 먼저 돌려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엘리네는 서류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이제 탁자에는 칼릭스의 글씨와 엘리네의 지도가 함께 놓였다.

문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이 서 있는 자리를 바꾼 모양이었다. 엘리네는 문을 보고 남은 말을 골랐다.

“아직 정하지 않은 게 있어요.”

칼릭스가 기다렸다.

“일이 끝난 다음이요.”

엘리네는 자를 접었다. 양 끝을 맞췄는데도 잠금이 걸리지 않아 다시 눌렀다.

“제 고향에 군대가 가지 않고, 황제 폐하께서 더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되면요.”

“예.”

“그다음 제 자리는 제가 정할 거예요.”

“그러셔야 합니다.”

대답이 빨랐다. 엘리네는 접은 자를 놓고 칼릭스의 얼굴을 보았다.

“전하도 제게 자리를 정해 주지 마세요.”

“그러지 않겠습니다.”

“황후로 남을지, 노르덴으로 갈지도 제가 정해요.”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네는 그 대답을 듣고도 바로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탁자 건너에는 칼릭스가 벗어 둔 장갑이 놓여 있었다. 예배당에서 잡았던 손은 그 옆에 있었다.

“이 거래 때문에 저를 찾아오실 필요도 없어질 거예요.”

칼릭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가 멎었다.

“찾아뵙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엘리네는 닫힌 문을 보았다. 문지기는 칼릭스가 돌아가는 시간을 적을 것이다. 마리엔은 내일도 누가 계단에 오르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원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전쟁을 막는 일이에요.”

“알겠습니다.”

엘리네는 찻잔을 탁자 끝으로 밀었다.

“끝나면 서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칼릭스는 장갑을 집지 않았다.

엘리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전하께 빚을 졌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전하도 제게 갚을 게 없고요. 오늘 제가 같이 하자고 했으니, 그 끝도 정해 두고 싶어요.”

칼릭스는 잠시 엘리네를 보았다. 엘리네는 말을 거두지 않고 기다렸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자장가의 처음 대목을 다시 흥얼거렸다.

칼릭스가 의자 옆의 지도통을 바로 세웠다.

“아무것도 아니다. 알겠습니다.”

칼릭스는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마리엔의 노래가 같은 대목으로 돌아올 때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20화 끝 ·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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