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
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
“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
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
“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
“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
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
“이건 왜 지우셨어요?”
“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
“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
“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
“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
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
“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
“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
“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
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
“가는 동안 모자란 걸 알면요?”
“보급을 청합니다.”
“받을 수 있나요?”
“길이 열려 있고, 뒤에 보낼 물자가 남아 있다면 가능합니다.”
칼릭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 문밖에서 문지기가 창대를 고쳐 잡는 소리가 났다.
“고개에서는 그 조건을 모두 맞추기 어렵습니다.”
엘리네는 식수터 옆에 짧게 선을 그었다. 펜촉에 묻은 잉크가 마를 때까지 종이를 움직이지 않았다.
“실수라면 고치면 되겠지요.”
“예.”
“하지만 잘못된 줄 알면서 그대로 둔 거라면, 누군가는 적게 보내고 싶었다는 뜻이에요.”
칼릭스는 곧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반출 목록에서 보급 계획서의 사본을 찾아 펼쳤다.
지도 끝에 닿지 않도록 종이를 비켜 놓는 손이 보였다.
“여기에는 필요한 물량이 적혀 있습니다.”
엘리네는 품목을 따라 읽었다. 밀가루, 말먹이, 겨울옷. 품목마다 수량이 있었고, 옆에는 보낼 곳이 적혀 있었다.
“옷도 거리에 따라 줄이나요?”
“병사 수에 맞춰야 합니다. 다만 여벌과 운반할 짐은 행군 기간을 따집니다.”
“그럼 모든 품목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겠네요.”
“우선 먹는 것부터 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칼릭스가 빈 종이를 당겼다. 엘리네가 쓴 축척 계산과 겹치지 않는 곳에 보급 계획의 날짜를 옮겼다. 그 아래에는 출발지와 도착지를 적었다.
“이 계획의 행군 일수는 짧습니다.”
“지도 때문에요?”
“그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 걷게 한 거리도 확인해야 합니다.”
엘리네는 접는 자를 내려놓았다.
“장부를 맞추려고 병사에게 더 걸으라고 할 수도 있군요.”
“그래서 행군 기록을 따로 남깁니다.”
칼릭스는 수첩을 조금 돌려 주었다. 멈춘 곳과 출발한 곳 사이에 날씨가 적혀 있었다. 눈이 온 날에는 걸은 거리가 짧았다. 수레를 수리한 날도 표시돼 있었다.
엘리네는 한 줄씩 읽다가 손을 뗐다.
“지도에 없는 시간이 여기에 있네요.”
“보고서에도 올렸습니다.”
“그런데 계획에는 빠졌고요.”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네는 보급 계획서와 수첩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지명이 서로 다른 간격으로 적혀 있었다.
“전쟁을 서두르고 싶어서 이렇게 그렸을 수도 있어요. 고개를 금방 넘을 수 있다고 보이려고요.”
“가능합니다.”
“그것 말고는요?”
칼릭스는 답하기 전에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물건을 적게 마련할 수 있습니다.”
“돈도 적게 쓰겠지요.”
“돈을 적게 받았다면 그렇습니다.”
엘리네는 보급 계획서에서 눈을 들었다.
마리엔이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따르던 차가 잔 바닥만 겨우 적시고 끊겼다. 마리엔은 주전자를 다시 기울였다가 곧 세웠다.
“새로 가져오겠습니다.”
다른 시녀가 쟁반을 받아 들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래에 준비돼 있습니다.”
시녀는 잔 받침에 놓인 숟가락을 안쪽으로 옮겼다. 문턱을 넘을 때 부딪치지 않도록 주전자 손잡이도 돌려 놓았다. 마리엔이 문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복도 끝에서 작은 수레가 멎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은 문가에 선 채 시녀가 내미는 빈 찻통을 받았다. 응접실 안에는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람만 남았다.
엘리네는 펜을 들지 않았다.
칼릭스도 말을 잇지 않았다.
열린 문으로 시녀의 소매가 보였다. 문지기가 비켜섰고, 마리엔의 치맛자락이 문턱에 닿았다. 누구든 고개만 돌리면 응접실 안을 볼 수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 앞에 놓인 수첩을 보았다. 종이를 누른 손가락이 글씨를 가리고 있었다. 손을 거두면 다음 줄을 읽을 수 있었지만 청하지 않았다.
탁자 옆 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칼릭스가 시선을 들었다. 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은 손을 무릎으로 옮겼다. 지도 전시장에서 손끝이 닿았던 자리에 자의 마디가 놓여 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가 열린 문으로 향했다.
마리엔이 찻통을 건네고 돌아섰다. 시녀는 새 주전자를 들고 문턱을 넘었다. 초침은 30초를 지나 있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시녀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주전자 뚜껑이 조금 들썩이자 엘리네가 지도 모서리를 안쪽으로 당겼다.
“천천히 해요. 물이 뜨겁겠어요.”
시녀가 주전자를 고쳐 잡았다. 칼릭스는 자신의 잔을 들어 시녀가 따르기 편한 곳에 놓았다. 차가 채워진 뒤에도 바로 마시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다시 벽 쪽에 섰다.
엘리네는 그제야 보급 계획서를 돌려 놓았다.
“돈을 적게 받지 않았다면요?”
칼릭스가 엘리네를 보았다.
“필요한 만큼 받았는데 물건만 적게 마련했다면 차액이 남습니다.”
시녀가 빈 쟁반을 가슴 앞에 붙였다. 엘리네는 목소리를 낮추는 대신 탁자 위 종이를 짚었다.
“이 서류에 돈을 받은 기록도 있나요?”
“없습니다. 보급할 물량과 일정입니다.”
“그럼 아직 돈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예. 지출 승인서와 납품 기록을 맞춰야 합니다.”
엘리네는 빈 종이에 품목 이름을 옮겨 적었다. 옆에는 받기로 한 양과 실제 창고에 들어온 양을 적을 자리를 비워 두었다.
“계획대로 물건을 샀는지, 산 물건이 모두 들어왔는지도 봐야겠어요.”
“들어온 뒤 어디로 보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칼릭스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엘리네는 그 자리에 보낸 곳을 적었다. 지도에서는 짧아진 거리가 종이 위에서는 확인할 항목을 늘렸다.
“누가 돈을 남기려 했다면 어느 서류를 먼저 고칠까요?”
“자신이 책임지는 서류일 겁니다.”
“그러면 이 지도도 혼자 고쳤다고 볼 수 없겠네요.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창고까지 맡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른 곳에서는 정상적인 지도를 쓸 수도 있습니다.”
엘리네는 펜을 멈췄다.
“돈을 청할 때는 제대로 된 거리를 쓰고요?”
“확인해야 합니다.”
“물건을 내줄 때는 이 지도를 쓰고.”
칼릭스는 답하지 않고 사본의 반출 인장을 보았다. 엘리네도 그 옆에 적힌 확인 날짜를 읽었다. 종이를 베낀 담당자의 이름으로는 누가 처음 손댔는지 알 수 없었다.
“숫자 하나만 바꾸면 된다고 하셨지요.”
“예.”
“그 숫자를 바로잡지 않은 이유가 있겠어요. 같은 지도를 봐도 누구는 짧게 계산하고, 누구는 실제 거리를 알도록.”
칼릭스가 엘리네가 만든 빈 칸을 다시 보았다.
“그 차이만큼 물건을 빼낼 수 있습니다.”
“돈을 받고도 사지 않을 수도 있고요.”
엘리네는 펜촉을 잉크병 가장자리에 댔다. 잉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종이에 짧게 적었다.
『지출과 입고 기록 대조.』
글씨 아래에 선을 긋지는 않았다.
시녀가 차를 권했다. 엘리네는 잔을 들었다가 손잡이가 뜨거워 받침째 옮겼다. 칼릭스의 손이 잠깐 움직였지만 탁자 가운데를 넘지 않았다.
마리엔이 접은 천을 가져와 엘리네의 잔 옆에 놓았다.
“고마워.”
엘리네는 천을 손잡이에 대고 잔을 들었다. 차를 조금 마신 뒤에는 지도에서 멀리 내려놓았다.
칼릭스는 엘리네가 잔을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감정 의견에 어디까지 적으시겠습니까?”
엘리네는 사본의 축척란을 보았다. 돈을 빼돌렸다는 문장을 적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빈 칸에는 아직 수량도 금액도 없었다.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것까지요. 이 사본으로 행군 거리를 계산하면 안 된다고 적겠어요.”
“그 뒤는요?”
“기록을 본 다음 정해야지요. 누가 했는지도 아직 모르니까요.”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원본을 보관한 사람에게 먼저 따져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실수라고 듣고 숫자만 고칠 수 있어요. 그러면 이 상태의 원본이 없어져요.”
엘리네는 사본 가장자리의 종이 규격을 가리켰다.
“언제, 어떤 크기로 베꼈는지 확인받은 건 잘하셨어요. 여기에 잰 구간도 남겨 주세요. 나중에 원본과 다르다고 하면 다시 맞출 수 있게요.”
칼릭스가 요청 사항을 적었다.
엘리네는 행군 수첩 쪽으로 손을 옮겼다가 멈췄다. 칼릭스가 먼저 수첩을 가까이 밀었다.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책등을 잡은 채였다.
“이 기록도 쓰시겠습니까?”
“두 지점의 거리만요. 병사들 이름이나 다른 길은 필요 없어요.”
“그 부분만 옮겨 드리겠습니다.”
엘리네는 수첩을 받지 않고 자를 들어 주었다. 칼릭스가 빈 종이에 선을 긋고 거리와 측정 방법을 적었다. 펜을 세워 쓰는 동안 소매 끝이 종이에 닿았다.
엘리네는 젖은 글씨 쪽으로 얇은 종이를 밀었다.
“여기부터는 마른 뒤에 접으세요.”
칼릭스의 손이 멎었다.
“감사합니다.”
그 말 뒤에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마리엔이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문 앞을 지나지 않고 가까워졌다. 칼릭스는 수첩을 닫았지만, 탁자에 펼친 군사 지도는 거두지 않았다.
엘리네도 방금 쓴 종이를 뒤집지 않았다. 감정 의견 옆에는 확인해야 할 기록의 목록이 놓여 있었다. 아직 이름을 적은 곳은 없었다.
“공식으로 기록을 청하면 얼마나 걸리나요?”
엘리네가 물었다.
“어느 기록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군무청 안에서 대조할 수 있는 것부터 보겠습니다.”
“사본을 또 만드실 때는 같은 종이를 써 주세요. 크기를 바꾸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문지기가 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엔이 문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엘리네는 접는 자의 마디를 접었다. 마지막 마디가 닫히기 전에 붉은 소매가 문 옆에 보였다.
에스텔은 펼친 부채를 가슴 앞에 들고 있었다. 부채 위로 향한 눈이 지도와 찻잔을 차례로 훑었다. 마지막에는 칼릭스 맞은편에 앉은 엘리네를 보았다.
응접실 문 앞에 선 에스텔이 부채를 조금 내렸다.
“황후 폐하, 대공 전하와 무슨 비밀 이야기를 그리 하세요?”
(16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