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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서쪽 담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6 19:40:00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

“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

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

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

“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

“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

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

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

“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

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

◊

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

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누가 왔나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입니다.”

명부에는 찾아온 시각과 돌아간 시각이 적혀 있었다. 방문한 사람의 이름 옆에는 목적을 쓰는 칸도 있었다.

지도 감정.

엘리네는 그 아래 적힌 칼릭스의 이름을 보았다. 다음 줄에는 에스텔 로웬이 있었다.

“황후궁만 올리나요?”

“각 궁에서 올립니다.”

“누락된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보내요.”

엘리네가 지나자 문지기는 펜을 들었다. 마리엔은 응접실 문을 먼저 열었다가 엘리네가 계단 쪽으로 향하자 다시 닫았다.

“공주님, 차를 올릴까요?”

“지도실에서 마실게.”

“쟁반 가져올게요.”

“잔은 하나만.”

마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네는 혼자 계단을 올랐다.

지도 감정을 다시 청하면 칼릭스는 올 수 있었다. 시녀들이 차를 따르고 문지기가 이름을 적는 동안, 탁자를 사이에 두고 틀린 축척을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서재에서 본 지도를 꺼낼 수는 없었다. 봄 첫째 달 10일이라는 날짜도, 회색 고개를 넘도록 그어진 선도 그 자리에서는 말하지 못했다.

칼릭스가 확인해 줄 기록이 필요했다. 군사 3만 명이 지나갈 길을 혼자 지우고 다시 그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노르덴에 그 지도 이야기를 먼저 보낼 수도 없었다. 편지를 읽는 손이 어디까지인지 엘리네는 알지 못했다.

천문실 문 앞에서 치맛자락을 걷었다. 문턱에 남아 있던 나무 조각이 구두 옆으로 밀렸다.

엘리네는 허리를 숙여 조각을 주웠다. 창틀을 고치고 남은 나무였다. 문 옆의 통에 넣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는 바닥의 돌판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탁자 다리가 밀리지 않았는지 보고 의자에 앉았다.

칼릭스에게 청할 일은 지도 감정보다 훨씬 컸다.

노르덴으로 가는 군대를 멈춰 달라는 말이었다.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말아 달라는 말이기도 했다.

엘리네는 빈 종이를 앞으로 당겼다.

『대공 전하께.』

거기까지 쓴 뒤 펜을 멈췄다.

다음 문장을 적으면 이 종이를 맡길 사람부터 골라야 했다. 봉투를 건네는 시녀와 받는 시종이 생겼다. 답장이 오면 또 다른 사람이 문턱을 넘었다.

엘리네는 종이를 뒤집었다.

◊

마리엔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찻잔 옆에는 바늘과 갈색 실이 놓여 있었다.

“그건 왜 가져왔어?”

“쟁반을 잡다가 소매가 걸렸어요. 내려가서 꿰맬게요.”

소맷부리에서 단추가 떨어져 있었다. 마리엔은 그쪽 손목을 반대 손으로 가렸다.

엘리네는 의자를 옆으로 당겼다.

“차를 내려놓고 이리 줘.”

“제가 하면 돼요.”

“그럼 여기 앉아서 해. 계단을 또 오르내리지 말고.”

마리엔이 구석의 의자를 가져왔다. 바늘귀에 실을 넣으려다 실패하자 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엘리네는 탁자 위의 흰 종이를 마리엔 앞에 깔았다.

“그 위에 대고 봐.”

“아, 보여요.”

실이 바늘귀를 통과했다. 마리엔은 손톱으로 끝을 잡아 빼냈다.

엘리네는 차를 마시며 둥근 창을 보았다. 서쪽 담 너머로 대공 저택의 지붕이 보였다. 가운데 굴뚝 옆에 난간이 있었다. 밤에 사람이 섰던 곳이었다.

“어제도 저 위에 사람이 있었지?”

마리엔이 바늘을 멈췄다.

“저택 지붕 말씀이세요?”

“응.”

“그제도 봤어요. 등불을 들고 나왔다가 한참 뒤에 들어갔어요.”

엘리네는 잔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지붕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이 내린 뒤에 망치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을 다음 밤에도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공 전하일까요?”

“그건 몰라.”

엘리네는 창에 가까이 갔다. 낮에는 저택의 창문까지 보였지만 유리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대공 저택에서 이곳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만 밤에는 달랐다. 엘리네가 등불을 창가에 놓으면 둥근 창의 위치는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저쪽이 보인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리엔이 물었다.

“이 방을 쓰던 사람은 알았겠지.”

“아래 정원에서는 창이 잘 안 보여요. 처마 때문에요.”

엘리네는 창틀 아래에 손을 짚었다. 정원으로 이어진 길의 일부가 처마에 가렸다. 몸을 숙여도 황후궁 문은 보이지 않았다.

서쪽 담에는 순찰병이 있었다. 담 안을 걷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지붕 위에서 보이는 것이 달랐다.

엘리네는 접는 자를 펴 창틀의 폭을 쟀다. 낡은 나무에 자가 걸려 각도를 고쳤다. 이어 종이 가장자리에 창과 처마의 위치를 짧게 그렸다.

마리엔이 단추를 당겨 보았다.

“편지를 보내시려는 거예요?”

엘리네의 펜이 멎었다.

“아직은 아니야.”

“제가 저택까지 다녀올 수 있어요. 시장에 가는 길에…….”

“네가 서쪽 담을 나가면 돌아온 시각도 적힐 거야.”

마리엔은 바늘 끝을 천에 꽂았다.

엘리네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내가 시킬 일이 있으면 먼저 말할게. 혼자 찾아가지는 마.”

“네, 공주님.”

마리엔이 실을 끊었다. 엘리네는 가위를 받아 바느질함에 넣었다.

칼릭스는 황제의 동생이었다. 군무청에서 틀린 지도를 고치자고 나서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엘리네가 밤에 몰래 찾아가면 지도는 변명이 되지 못했다.

방문 명부에서 본 이름이 떠올랐다. 공식 감정이라고 적어 놓아도 에스텔은 그 의자에 앉아 둘의 말을 살폈다.

엘리네는 뒤집어 둔 편지를 집었다.

잉크가 마른 종이를 잘게 찢어 빈 잉크 상자에 넣었다. 마리엔이 태울 종이를 모으는 통을 가져오자 거기에 쏟았다.

“오늘은 아래층에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해 줘.”

“지도실에 계신다고 할까요?”

“응. 그건 숨기지 않아도 돼.”

◊

저녁 쟁반이 내려가고 계단에서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엘리네는 창가에 놓은 의자를 안쪽으로 옮겼다. 저택의 지붕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서쪽 담을 따라 등불이 지나갔다. 순찰병이 모퉁이에 이르자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마리엔은 문 옆에서 촛농을 긁어 냈다. 낮에 기울어진 촛대를 받치다 바닥에 흘린 촛농이었다.

“내일 해도 돼.”

“굳었을 때 떼면 금방이에요. 공주님 구두에 붙을까 봐요.”

마리엔은 얇은 나무 조각으로 마지막 촛농을 떼어 종이에 받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저기 있어요.”

지붕 난간 옆에 사람이 서 있었다.

엘리네는 바로 창에 다가가지 않았다. 방 안의 등불은 탁자 가운데에 있었다. 창 가까이 가면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섰다는 것은 드러날 터였다.

저택 지붕의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간 위에 작은 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탁자 끝에 손을 얹었다.

칼릭스일 수도 있었다. 지붕을 지키는 병사일 수도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계속 서 있었어?”

“제가 볼 때는 늘 저 자리였어요.”

마리엔이 촛농을 싼 종이를 내려놓았다.

“노르덴에서는 저렇게 높은 데 서면 꼭 아래를 봤는데요. 길 잃은 사람이 있나 하고요.”

엘리네는 둥근 창을 보았다.

산에서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불을 두었다. 불 앞을 가렸다 열면 건너편에서 사람 손이 닿는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바위 뒤에 있던 아버지의 등불도 그렇게 보였다.

“공주님도 해 보셨지요.”

“내가 먼저 길을 내려갔을 때.”

“왕세자 저하께서 못 보셨다고 다시 하라고 하셨잖아요.”

“보고도 그랬어. 내가 너무 멀리 갔다고.”

마리엔이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문밖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엘리네가 손을 들었다. 마리엔은 문으로 가서 열었다.

문지기가 문턱 밖에 서 있었다.

“아직 머무르십니까?”

“제가 책을 정리하고 있어요.”

엘리네가 탁자 위의 종이를 모았다.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창가와 등불을 보고 마리엔에게 말했다.

“내려가실 때 알려 주십시오. 계단 창을 닫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구두 소리가 아래층으로 멀어질 때까지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모은 종이를 탁자에 놓았다. 오늘 밤 누가 이 방에 있었는지 문지기는 알고 있었다. 등불을 창가로 옮기기만 해도 나중에 물을 사람이 생길 수 있었다.

저택의 사람은 여전히 난간 옆에 있었다.

엘리네는 마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틀 고치고 남은 판자 줘.”

마리엔은 문 옆 통에서 판자를 꺼냈다. 엘리네가 받자 마른 나무 가루가 치마에 떨어졌다.

“신호를 보내시게요?”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만.”

“누군지 모르는데요.”

“응. 그러니까 다른 말은 못 보내.”

엘리네는 등불 손잡이를 잡았다. 유리 안에서 불이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칼릭스에게 함께하자고 말하려면 먼저 대답을 들을 자리가 필요했다. 그 자리를 정하는 일까지 시녀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오늘은 누군가 저쪽에서 이 창을 보는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마리엔이 창가의 책을 치웠다. 엘리네는 그 자리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넌 문 옆에 있어 줘. 누가 오면 열어 주고.”

“문은 잠글까요?”

엘리네는 판자 끝을 고쳐 쥐었다.

“아니. 잠긴 문이 더 눈에 띄어.”

마리엔은 입술을 다물고 문 옆으로 갔다.

창틀 가까이 서니 방 안보다 손이 차가웠다. 엘리네는 등불이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을 확인했다. 판자를 불에 붙이지 않고 유리 앞에 세웠다.

저택 지붕의 불이 보였다. 사람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판자를 들어 등불을 가렸다가 내렸다.

잠깐 기다린 뒤 다시 가렸다가 내렸다. 두 번이었다.

마리엔의 옷자락 소리가 멎었다.

엘리네는 판자를 창 아래에 기대 놓았다. 손을 뗀 뒤에도 그대로 서 있었다. 저쪽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등불을 원래 자리로 가져오면 됐다.

담 아래로 순찰병의 불이 지나갔다. 저택 지붕의 사람은 난간 쪽으로 몸을 숙였다.

엘리네는 창틀에서 손을 거두었다.

대공 저택 지붕의 등불이 두 번 가려졌다 열렸다.

(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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