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발레리
“그만하세요.” 나는 모두를 조용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치 다시 루나가 된 기분이었다. 옆에서 꽂혀 오는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죠.” 중재자인 나는 양측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두 팩은 각자의 입장을 설명했고, 후자의 주장은 베타의 딸이 앨린에게 다쳤다는 것이었다. 이후 잠시 휴식 시간이 제안되었다. 판단을 정리하기 위해 자유롭게 회관을 둘러보던 나는 구석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걸음을 멈췄다. 내 예전 팩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나. 알파 트리스탄은 거의 한마디도 안 했잖아.” 한 사람이 짜증스럽게 말했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 역시 그 점을 눈치채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늘 앨린의 편을 들던 그가 왜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까? “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건가? 팩 닥터는 별문제 없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속삭였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알파 트리스탄은 갑자기 쓰러진 뒤로 예전 같지가 않아.” 다른 이가 낮게 말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2주나 됐고, 하필 그 뒤에 이번 갈등까지 터졌잖아. 많이 힘든 게 분명해.” “게다가 루… 아니, 전 루나가 섀도 문 팩에 들어갔다고?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더 듣기 전에 나는 발길을 돌렸다. ‘2주 전에 쓰러졌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기억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달라진 일이 많을 수도 있어.’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앨린이 아직 루나도, 적어도 ‘차기 루나’로도 불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떠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둘은 이미 메이팅 의식을 치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그것 때문일까? 나는 재빨리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 회의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지난 생에서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내 목숨까지 앗아갔던 이 사건도 이제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자리에 앉은 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 갈등의 해결은 간단합니다. 자존심만 앞세우지 않았다면 진작 해결됐을 문제였죠. 먼저 잘못을 저지른 쪽은 이클립스 팩이므로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이클립스 팩이 져야 합니다. 이클립스 팩의 앨리스 발렌타인은 섀도 문 팩과 베타의 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또한 팩의 전통에 따라 이클립스 팩은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의 예물을 보내야 합니다.” 가장 쉽고도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이클립스 팩은 자원이 부족한 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 나는 반발이 나오기를 예상하며 숨을 죽였지만, 그 순간 트리스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알파 트리스탄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겠다.” 그가 선언했다. 나는 몸을 굳혔다. 그가야말로 가장 먼저 반대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알리스테어와 눈이 마주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는 내 판결이 마음에 든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양 팩의 갈등은 이것으로 종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선언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비로소 사라지는 듯했다. 앨린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부모님이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트리스탄의 시선이 계속 나를 향하는 것은 무시하기가 더 어려웠지만, 끝까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곧 이곳을 떠날 테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놀랍게도 알리스테어가 양 팩의 화해를 기념하자며 즉석에서 연회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하인들과 팩원들이 음식과 술, 음악을 들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긴장으로 가득했던 회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음과 음악으로 가득 찼다. 연회가 시작된 지 거의 20분쯤 되었을 때, 나는 몰래 빠져나와 근처 정원으로 향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팩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지만, 모든 일이 해결된 지금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니나에게 문자를 보낸 뒤 기둥 하나에 몸을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생에서 내 목숨을 앗아갔던 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고 나면, 이제 다시는 그들과 엮일 이유도 없었다. “발레리.”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트리스탄이 서 있었고,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그는 지금쯤 축하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클립스 팩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앨린도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가 보내는 시선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나는 경계하며 쏘아붙였다. “널 보러 왔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가 나를 안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그를 밀쳐 내며 비틀거렸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나는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으며 외쳤다. “널 만나야 했어, 발레리.”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나는 움찔했지만, 그는 놀라울 만큼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실례지만, 알파 트리스탄. 우리는 이미 메이트도 아니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쏘아붙였다. “중요한 건 네가 왜 여기 있는지야. 무슨 생각으로 이 팩에 있었던 거지? 붙잡혀 온 거야? 다친 데는 없어? 아이는 어떻게 됐어?” ‘잠깐….’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이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죠?” 나는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임신은 은닉 임신이었고, 이클립스 팩에서는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 팩 닥터에게서 들었을 리도 없고, 그 시점의 트리스탄이라면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바라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눈에는 전에도 본 적 없는, 절박하고도 강렬한 빛이 어려 있었다. “봤어. 네가 죽었을 때… 네가 잃은 그 아이를.” 그가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수많은 감정을 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감정들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결의. 절망. 그리고… 고통. “난 모든 걸 알고 있어.”트리스탄 처음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소란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기까지는 잠깐의 멍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맞춰 놓았다. 양수가 터졌다고… 양수… 그 말은. 발레리가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출산을 한다! 나는 순식간에 그녀를 두 팔로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녀의 등을 단단히 받쳐 들자 그녀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무리의 의사를 불러! 당장!” 나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사방의 소란과 귓가를 울리는 핏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가슴을 두드렸고, 귀에서는 피가 끓는 소리가 울렸다. 본능이 내 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메이트. 출산… 메이트… 숨이 막혔다.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녀를 지켜야 했다. 우리 아이도… 출산도… “트리스탄.” 맑은 물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감각을 꿰뚫고 들어왔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얼굴에는 고통이 어려 있었고, 안색도 조금 창백했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진정해. 괜찮을 거야.”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리의 일원뿐이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나는 그대로
발레리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과거와는 달리 분노도, 억울함도, 자존심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애써 참는 듯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를 부축한 아버지는 체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고,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이었고, 세상은 다시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받을게요.” 내가 상자를 받아 들자 어머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내가 다시 돌려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뒤로 물러섰고, 훌쩍이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나는 그런 모습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부모님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던 그 아이를 위해, 나는 내 혈통의 상징인 이 유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착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미래로 전해 주기 위해서. 다시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제 돌아가 주세요. 저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인지, 어떻게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은 두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어머니는 거의 비명을 터뜨리듯 울며 아버지의 품으로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울음을 감추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곧 흐느낌은 오열로 바뀌었고, 목이 메인 채 흘러나오는 말들은 내 이름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뒤엉켜 있었다. 잠시 그녀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지
발레리 긴장감은 발톱으로도 베어낼 수 있을 만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문간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만이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고 있었다. 목이 꽉 메였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몇 년 전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준비하던 도중 불쑥 나타난 그들은, 겁에 질린 어린 소녀였던 나를 바라보며 자신들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고 차갑게 경고했었다. 그날 나는 그 말을 트리스탄에게 숨김없이 그대로 전했었다. 통증이 감각을 파고들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손가락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든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초가 더 흐르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나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듯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발렌타인 씨, 부인. 죄송하지만 루나 발레리께서는 두 분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 “괜찮아.” 나는 마침내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고,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걱정과 긴장감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며 더욱 짙어졌지만, 나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미나를 보며 작지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과 단둘이 이야기할게.” 미나는 당장이라도 반대하고 싶은
한 달 후발레리 이제 때가 됐어.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마치 꿈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불과 한 달 전 트리스탄이 내게 청혼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식은 정식으로 무리 전체에 알려졌고,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 뒤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화장은 옅었다. 머리는 자연스럽게 올려 묶었고, 굵게 말린 머리카락은 폭포처럼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내가 입은 푸른 자수 드레스는 거미줄처럼 가볍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실루엣은 불러온 배를 자연스럽게 감춰 주었다. 손끝으로 배를 쓸어내리자 믿기지 않는 감정이 차올랐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내 생각은 과거로 향했다. 전생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이전의 시간이었다. 몇 년 전, 서둘러 치러졌던 우리의 메이팅 세리머니. 그날의 의식 자체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부모님의 말에 받은 상처, 그리고 무심했던 트리스탄의 태도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또렷이 기억했다. 그날도 나는 지금처럼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막 열여덟 살이 되었고, 그와의 메이트 본드를 알게 된 직후였다. 겁에 질린 채, 낯선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재촉만 당하며 준비를 마쳤다. 가족의 따뜻함은 없었고, 내게 떠넘겨진 책임의 무게만이 가슴 깊이 짓눌렀다. 그날은 내 인생을 바꿔 놓은 결정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남는 감
발레리 침묵이 잠시 멈춘 듯 흘렀고,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언제나 다정하고 세심한 미나는 분명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 없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 문제만큼은 일부러 피했다. 특히 그녀가 떠나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녀가 팩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았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응.” 나는 담담하고 꾸밈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클립스 팩에서 지내며 내 감정을 정리하는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그 마음은 완전히 굳어졌다. 잠시 그릇을 내려놓은 나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 결정이 걱정되는 거지. 트리스탄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이 팩이 또다시 나를 힘들게 하면 어떡하냐고. 믿어. 그것도 충분히 생각해 봤어.” 내가 말했다. 예전의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믿었다. 루나와 딸, 누나라는 이름 아래 짊어져야 했던 모든 책임과 이 팩이 내게 안겨 준 고통과 압박, 숨 막히는 삶을 버리고 떠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떠났기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나와 내 아이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지금, 또 다른 두려움이 생겼다. 이곳에 남으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
한 달 후 발레리 따스한 온기가 피부 위로 번져 들었고, 어둠 너머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천천히 눈을 뜨자 황금빛 햇살이 시야를 물들였다. 이곳이 천국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곁에서 들려온 이불이 스치는 작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아니, 이곳은 천국도 꿈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조금씩 몸을 짓누르던 나른함이 걷혀 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나는 양팔을 쭉 뻗으며 등을 뒤로 젖혀 기지개를 켰다. 몸에서 들려온 시원한 우드득 소리에 온몸의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팩 저택의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구 하나하나까지 모두 익숙했지만 단 하나만은 달랐다. 그의 팔은 여전히 내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베개 위에 흩어진 짙은 검은 머리카락과 내 곁에서 잠든 트리스탄의 모습이 보였고, 가슴속으로 따뜻한 온기가 번져 갔다. 이 팩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휴식과 회복으로 가득했던 한 달이었다. 그날의 공포와 혼란을 지나 이제 나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알리스테어가 남긴 상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아물었고, 아이에 대한 걱정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아니었다. 트리스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해했다. 팩으로 돌아온 첫날 밤부터 그는 내 침대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도 매일같이 밤새 내 곁을 지키며 잠들었고, 마치 내가 또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에게 아직 상처와 피로를 회복하는 중이라고, 그렇게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