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파리’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역시나 소은지는 얼굴색부터 변했고 그걸 안건우는 단번에 알아봤다.“최근에 엔데스 가문의 엔데스 명우 씨가 너를 수소문하고 다닌다고 해서 나도 네가 파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런데 넌 어떻게 그 사람한테 찍히게 된 거야?”보아하니 밖에서도 엔데스 명우의 명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듯했다.안건우도 그녀가 파리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가 직접 찾아다니기에는 너무 티가 많이 나는 것 같아 가만히 있다가 우연히 비너스 타운에 출장 가게 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말하자면 길어요. 일단 이 소송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순간 안건우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승낙할 줄은 꿈에도 몰라 살짝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은지를 빤히 바라보았다.분명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정말?”관련 자료에 대해서는 오는 길에 한 번 훑어봤기에 이번 소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그런데도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왜요, 못 믿겠어요?”“그게 아니라 이번 항소가 우리한테는 매우 중요해서 말이야.”하긴 이미 두 번이나 항소 실패했는데 만약 이번에도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거의 희망이 없다고 봐야 했다.“100% 확신은 없지만, 그 전에 꼼꼼하게 조사해 볼게요.”소은지의 대답에 안건우는 고개만 끄덕이다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그러면 다시 파리로 가려고?”“혹시 이 재판이 파리에서 열리나요?”묻자마자 소은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렇게 되면 엔데스 명우가 곧바로 자신을 찾아낼 텐데...그러나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앞으로 영원히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순간 소은지는 이것마저도 다 보잘것없다는 느낌이 들었다.이때, 안건우가 답했다.“걱정하지 마. 이제부터 네가 우리 회사의 법무 법인이기에 우리 쪽에서도 널 보호해 줘야 할 의무가 있어.”한껏 자신 있게 말하는 안건우를 보고 있자니 소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어떻게 보호해 줄 건데요?”다름 아닌
그러나 청해 시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보름 후, 그녀는 영해로 향했다.오피스 룩에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는 메이크업, 그리고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는 보는 사람들도 살짝 얼게 했다.“소은지 씨, 안 대표님께서 지금 만나 뵙자고 하십니다.”“네, 감사합니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공손하게 안내하자 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는데 이런 작은 행동마저도 홀 전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회장님 사무실.직원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더니 안에 있는 사람과 허락을 받은 후 다시 소은지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잠깐만 기다리세요.”소은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직원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뒤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빠르게 나오더니 소은지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은지 씨,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소은지는 사뿐사뿐 걸어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시원하게 트여있는 창문 앞에 웬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그의 강한 기운이 사무실 전체에 감돌고 있다는 느낌이 단번에 들었다.그리고 인기척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눈앞의 남자를 알아본 순간 소은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남자도 한눈에 알아본 듯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소 변호사?”“...”생소한 말투지만 꽤 익숙한 목소리.그렇게 두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그리고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다?”소은지는 남자의 희고 긴 손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선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안건우!대학교 다닐 때, 위 학년 선배였고 학교 시절부터 꽤 친분이 있었지만 안건우가 해외로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다.오늘도 이 회사의 면접 요청을 받게 되어 일단 와봤는데 그가 회사의 오너일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안건우는 그녀의 차갑고 작은 손을 잡고 눈살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차?”“날씨 때문이겠죠.”“여자는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
소은지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었다.사실 지금 엔데스 명우만 그를 찾고 있는 게 아니라 할리 연희도 마찬가지로 찾고 있었지만 똑같이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요 며칠 할리 연희는 혹시나 자신이 쫓겨날까 봐 감히 할리 민상을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아직도 소식 없어?”권중호가 걸어 온 전화에 엔데스 명우가 한껏 험상궂은 얼굴로 되물었다.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소은지의 종적은 찾아낼 수 없었다.“아래 마을까지 모두 샅샅이 뒤져봤습니다!”그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고 가볼 만한 곳은 거의 다 찾아봤지만 모두 허탕만 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하여 엔데스 명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권중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사모님께서는 이미 비너스 타운을 떠난 것 같습니다.”그 말에 엔데스 명우는 숨이 갑자기 턱 하고 막혀왔다.“떠났다고?”대체 언제일까?그날 설정산을 떠난 지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비너스 타운 전체를 봉쇄했고 그때부터 마을이란 마을은 곳곳이 다 뒤져봤기에 그 시간에 떠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한 시간 안에 떠나지 못했으면 그 후로는 더더욱 불가능할 텐데...“현재로서는 비너스 타운 전체를 다 뒤졌다고 봐야 합니다.”권중호는 대답 대신 그저 담담하게 자기 할 말을 했는데 이게 이미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소은지는 진작에 비너스 타운에서 빠져나갔다!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순간 머릿속에 뭐가 떠올랐는지 엔데스 명우의 눈빛이 단번에 번쩍거렸다.‘비너스 타운에 없다면...’“중호야!”“네!”“가서 공항 CCTV 다시 확인해 보고 여진우가 떠난 시간대도 다시 한번 조사해 봐!”어쩌면 이 일이 여진우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 엔데스 명우는 숨이 점점 가빠졌다.어쨌든 당시 여진우네 비행기 외에는 아무도 파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이제 이 일이 그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도 엔데스 명우는 믿지 못할 것 같았다.“네!”권중호가 빠르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이던가?엔데스 가문의 남자들은 항상 이익을 우선시했다.하여 할리 연희가 아무리 수양딸이라고 해도 엔데스 명우한테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편이었다.그런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할리 가문에서 쫓겨난다면 이 남자한테는 더 이상 아무 쓸모도 없게 되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엔데스 명우의 곁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할리 연희는 무조건 엔데스 명우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그리고 오늘에야 깨달은 사실인데 여태껏 든든하게 지켜줬던 하선희도 이제 곁에 없기에 앞으로의 길은 반드시 혼자 걸어가야 했다.하지만 그 전에 할리 집안은 계속 그녀의 발판이 되어야 했고 나중에 이 가문이 자신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상황이 올 때까지 꼭 붙어 있어야 했다.“아버지,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는 언니를 꼭 데려올게요!”여전히 자신을 매섭게 쏘아보는 할리 민상에게 그녀는 조심스레 다시 빌었다.비너스 타운에 있을 때는 소은지가 돌아오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했다.그러다가 문득 소은지 때문에 지금 자신이 쫓겨나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면서 억울한 마음도 같이 밀려왔다.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말한 대로 해야 했다.“흥!” 할리 민상은 차갑게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할리 연희는 저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눈치채고는 빠르게 다시 말을 이었다.“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매서운 눈빛으로 할리 연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지금 당장 가서 언니부터 찾아볼게요. 그리고 꼭 데리고 오겠습니다.”할리 민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할리 연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햇빛 아래서 한참을 달리던 할리 연희는 문득 우뚝 멈춰 섰는데 그제야 자신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가득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보아하니 방금 많이 놀란 것 같았다.지옥에서 겨우 되살아난 할리
그러나 할리 민상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할리 연희를 보면서도 얼굴만 더 어두워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사실...할리 연희는 매번 이런 식으로 하선희 앞에서 무릎 꿇고 사정했었는데 그때의 그녀는 너무 외롭고 또 의지할 곳조차 없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할리 연희에게 괜히 쓸데없는 용기만 북돋아 준 것 같았다.할리 민상은 오랜 고민 끝에 눈을 꼭 감은 채 무거운 입을 열었다.“지금부터 너한테 여기서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딱 한 시간만 줄 거야. 만약 한 시간 뒤에도 내 눈에 보일 시...”비록 뒤의 말을 끝까지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투를 들어보면 분명 할리 연희를 계속 집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빌고 빌어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할리 민상과 하선희는 엄연히 달랐다.하선희는 겉은 냉정해 보여도 마음은 여린 여자였지만 할리 민상은 아니었다.이게 말로만 듣던 남자가 독해지면 아무 여지도 주지 않는다는 표현이겠다 싶었다.“아버지.”그러나 할리 연희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그리고 오늘 진심으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 가문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그녀가 맨 처음 할리 가문에 들어왔을 때도 이곳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걸 보면서 이런 집에서 사는 아가씨가 그저 부럽기만 했다.그리고 그때부터 반드시 이 집의 딸이 되어 할리 가문의 모든 걸 누리면서 파리의 가장 고귀한 여자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지금은?“제발 절 내쫓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 제발요!”“...”“제가 이렇게 빌게요. 계속 할리 가문에 남게 해주세요. 제가 이렇게 쫓겨나면 정말 빈털터리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넌 원래 아무것도 없는 아이였잖아!”“...”맞는 말이다.원래 무소유였던 사람이었고 지금 입고 쓰는 모든 게 다 할리 가문의 것들이었다.“제가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할리 민상이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제 우리 가문에서는 더 이상 널 받아줄 수 없어. 관련 부서에 통보해서 호적 정리를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순간 할리 연희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버지!”“...”“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할리 연희는 눈에 이미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그러나 할리 민상은 그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그 모습에 할리 연희는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아버지!”예전에도 한 번 쫓겨났다가 겨우 다시 돌아왔는데 또 쫓겨나게 생겼다.하선희가 죽게 된 뒤로 가문에서의 자기 지위가 바닥이 됐다는 생각에 할리 연희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그 애가 비너스 타운을 떠난 게 혹시 네가 쓴 편지 때문이야?”“아버지,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할리 연희는 단번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눈앞의 할리 민상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아무리 지금 무슨 변명을 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을 쏘아보는 매서운 눈빛이 그녀의 가슴을 마구 후벼팠다.“아버지, 저는...”“비록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함께 살지 않았지만 그 애의 성격상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떠나지는 않을 거야!”“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전 아니라고요!”할리 연희는 울부짖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인정하면 안 되고 절대 이 가문에서 나올 수 없었다.적어도 엔데스 명우와 결혼한 뒤에...사실 엔데스 명우가 성공적으로 파리에 돌아올 수 있는지는 어차피 할리 연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단지 할리 가문이 아니면 자신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오늘 할리 민상의 태도를 보면 분명 빠른 시일 내에 그녀를 가문에서 내쫓으려 계획하는 것 같았지만 할리 연희는 절대 빈털터리로 나앉을 수 없었다.눈앞의 절박한 할리 연희를 보고도 할리 민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