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지난번 생에 강이한은 욱할 때마다 눈 각막 얘기를 꺼냈다. 이번 생에서도... 그는 또 이유영의 앞에서 그 얘기를 수차례 꺼냈었다.이튿날 아침 식탁 위, 주방에서 준비해 준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조심성이 있어 보였다. 어찌 됐든 어제는 온종일 식사 문제 때문에 불쾌했었다.주방은 그나마 눈치 빠르게 오늘 아침은 될수록 이유영의 입맛을 알아볼 수 있는 것들로 준비를 했다.도우미들도 그건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자기들의 도련님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곳에 남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태만해서는 안 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을 바라보는 도우미들의 눈빛은 여전히 이상하게 감정이 억눌려있었다. 그들은 이유영을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속 좁은 여자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죽 좀 먹어 봐.”강이한은 안색이 새하얀 이온유를 보며 말했다.이온유는 이유영을 보고는 또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이유영은 마치 이온유를 못 본 것처럼 덤덤하게 자기 식사를 하고 있었다.“왜 그래?”“저... 힘이 별로 없어서 자고 싶어요.”이온유의 목소리는 조금 허약해 보였다.이건 열이 난 후의 전형적인 후유증이었다.“그래도 영양가 있는 죽을 좀 먹어야지. 안 그럼, 네 몸이 나아지기 어려워.”이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이온유는 지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이유영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손에 든 젓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고는 이온유의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한술 떴다.“자, 입 벌려.”“아빠.”“자, 말 잘 들어야지.”강이한의 말투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인내심이 가득 찼다.이유영은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는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녀는 식사 과정 내내 강이한과 이온유 두 사람의 자애로운 부녀 장면을 쳐다보지 않았다.이유영이 입을 열고 말했다.“나 잠시 나갔다 올게.”강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곧장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전에 강
이유영은 여진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어찌 됐든 그 어떤 여자라도 도원산에서 본 장면들을 갖고 마음속으로 비교를 안 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이유영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여진우를 한 눈 보고 말했다.“아니.”“유영아.”“나랑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넌 몰라!”“그럼 넌 지금...?”“내가 말했잖아. 오로지 널 위해서 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나랑 그 사람 사이의 일은 원래도 철저하게 잘라버려야 했어.”이유영은 일부러 여진우의 그 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편에 앉은 여진우의 기운은 그래도 조금 변했다.그 순간 그의 눈빛은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이로써 예전의 과거가 여진우에게 있어서 도대체 얼마나 비참한 기억인지 알 수 있었다.“생각하지 마.”조금 차갑고 작은 손이 여진우의 손 위에 놓였다. 이유영은 위로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우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널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난 네가 이 점을 꼭 알았으면 해.”“난 널 믿어.”여진우가 한 말에 대해 이유영은 잘 알고 있었다...그가 그동안 혼자의 힘으로 서주에서 오늘의 위치까지 올 수 있는 것만큼, 이유영을 보호하는 것도 별문제가 없었다.하지만 관건은... 그녀와 강이한 사이는 반드시 끝을 보아야 했다.여진우는 그윽하게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보아하니 넌 아직도 네가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렸는지 모르는구나.”“...”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흠칫했다.‘소용돌이라고?’이유영은 느낄 수 있었다.서주의 그 일은 그녀가... 전에 아무리 피하고, 아버지가 그녀를 밖으로 배제한다고 해도 오늘의 그녀는 여전히 그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걱정하지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여진우에게 말했다.하지만 이유영을 걱정하는 여진우의 눈빛은 여전히 추호도 느슨해지지 않았다.역시! 사람에게 있어서 온전한 평온함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전에 그렇
하지만 지금은?달라졌다. 철저하게 달라졌다.지난번에 서주에서 일을 당한 것도 있고, 게다가 엔데스 가문의 변동 때문에 다소 풍산의 지위를 흔들었다.하지만 그건 알아줘야 했다. 박연준은 역시 박연준이었다. 아무리 흔들림이 있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강한 세상이 있었다.기다란 식탁 위에, 박연준은 반대편 끝자락에 앉아서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고 있었다. 다정함과 날카로움이 병존하고 있었으며 이런 저녁 분위기 아래 그의 얼굴 윤곽은 충격적인 정도로 완벽했다.이유영은 박연준이 잘생겼다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다.“무엇을 봤던 거야?”손에 든 와인을 원샷한 순간, 그의 말투는 더없이 그윽했다.“내가 본 게 한두 개가 아니라 많았지!”이 말을 내뱉은 이유영의 말투는 조금 무거웠다.심지어 박연준에 대한 비꼬는 느낌도 들어있었다.그랬다...이유영이 강이한의 곁에서 봤던 모든 것들은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박연준은? 완벽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이유영이 평생토록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만과 배신이었다.이 두 가지에서 박연준은 기만했고, 강이한은 배신했다.박연준이 입을 열었다.“당신한테 주스를 준비해 두었어. 주스나 마셔. 당신 눈은 술을 마시면 안 좋잖아.”“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봐봐. 화 난 게 맞네.”“...”와인잔을 쥐고 있던 이유영의 손힘은 더욱 세졌다.쿵 소리와 함께 손에 들려있던 와인잔은 세게 대리석 식탁 위에 내리쳐지면서 차가운 소리를 냈다.말을 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이유영의 기분을 드러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보면서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 속의 날카로움은 감추지 못했다.“유영아, 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아주 인내심 있게 물었다.하지만 이것을 들은 이유영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예전에도 이런 특수한 인내심 때문에 그녀는 박연준이라는 남자에 남다른 착각이 생겼었다.박연준과 같은 사람은... 그가 원하면 한 사람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일단 원하지
아무리 이유영은 예전에 박연준이 얼마나 자신을 보호했는지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그런 보호들은 전부 목적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치 홍수처럼 몰려와 모든 의식을 뒤엎어버렸다.이유영이 바로 그랬다.용준은 마치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박연준의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어두운 한구석에서 걸어 나와 주방으로 들어왔다.이유영은 용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용준은 박연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리고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은색 빛을 반짝이는 식칼이 휙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콰당 소리와 함께 식칼은 그렇게 식탁 위에 버려졌다. 음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이 부셨다.그러더니 용준의 손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대리석 바닥에 선명한 색을 입혔으며 보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정도였다.이유영은 어안이 벙벙했으며 넋 놓고 반대편의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이유영을 보고 있었다.그러면서 질문은 용준에게 던졌다.“어때? 네 잘못을 알겠어?”“네. 제가 죄송합니다!”용준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두 사람의 말투는 다 한없이 차가웠다. 이유영은 한 번도 박연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서주를 다녀온 뒤부터, 박연준은 마치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하게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그의 다정한 두 눈 깊숙한 곳에는 피를 빨아먹을 것만 같은 공포감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순식간에 싸늘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용준 씨는 박연준의 곁에 엄청나게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이잖아. 그토록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지금 뭐하신 겁니까?”이유영은 드디어 자신의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입을 연 순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듣는 것만 같았다.눈앞의 박연준 때문에 겁을 작지 않게 먹은 것이 분명했다.“먼저 내려가 봐.”“네.”용준은 상처를 움켜쥔 채 주방을 나갔다.현장에 있던 집
비록 박연준의 눈에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영이 그걸 해냈다는 것은, 특히 체구가 자그마한 그녀가 해냈다는 것은 정말 사람이 새롭게 보이는 정도였다.“게다가 로열 글로벌에 있었을 때, 넌 정 회장한테서 보호를 잘 받았지. 줄곧 단순한 세상에 처해있었지. 하지만 지금 여진우가 돌아왔잖아!”“...”“그럼 너의 평안함도 이제 깨졌으니...”여기까지 말한 박연준은 더 이상 뒤의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그렇지만 그 순간 이유영은 다 알아들었다.‘나더러 어차피 진흙탕에 빠졌으니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말라는 말인가!?’이것이... 아마도 박연준이 그녀에게 전달하려는 뜻인 거 같았다.그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한 발짝 한 발짝 이유영을 향해 걸어왔다. 이유영은 여전히 말없이 조용하게 그를 쳐다보았다.박연준은 그녀의 몸 뒤에 와서... 몸을 돌려 아담한 이유영을 품속에 끌어안았다. 이유영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당신,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추려고 생각한 적 있었어?”그녀가 말한 것은 한지음이었다.그랬다...한지음이 강이한의 곁에 나타난 것은 다 박연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한지음이 이유영을 미워한 것도 다 사실이었다.일이 오늘,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일어나야 할 일들은 다 이미 일어나 버렸다. 그 뒤의 진실이 어떤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다 박연준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한 가지 알고 싶었다... 박연준이 멈추려고 한 적이 있는지 그걸 알고 싶었다.“당신 아직도 그 사람한테 기대가 남아있어?”박연준의 숨결이 이유영의 목에 내려졌으며 그의 그윽한 말투에는 짙은 위험이 담겨있었다.“박연준.”“왜 박연준 씨라고 안 불러?”박연준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단번에 의자에서 그녀를 안아 내렸다. 그리고 휙 돌아서 그녀가 앉고 있던 의자에 앉았다.순식간에 이유영은 이미 박연준의 다리에 앉혀졌다.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쳤지만 슬림한 그녀의 허리에는 박연준의 강력한 힘이 전
비록 박연준이 말한 것처럼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입힌 상처들은 다 실제 존재한 것들이었지만 이유영이 보기엔 박연준이 설계한 음모는 강이한보다 더 무서웠다.“이거 놔.”이유영은 발버둥 치면서 박연준의 품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감싼 박연준의 손 힘은 더욱더 세졌다.이유영은 아주 아담했다.그녀가 격렬하게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박연준에게 세게 품속으로 갇혀버렸으며 전혀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머리 위에서 박연준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그 서류를 꼭 손에 넣어야 해. 알겠지?”“...”이유영의 마음은 더없이 차가워졌다.발버둥 치던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멈췄다.“여진우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어?”“얼마나 알고 있든 간에 그 서류만 있으면 다 해결돼. 걱정하지 마... 강이한 손에 있는 것들 것 내가 소멸해 줄게. 그럼 앞으로 아무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을 거야.”‘하하! 참 웃기고 있네. 아무도 날 위협하지 못할 거라고?’하지만 정작 박연준 본인은 협박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결국, 박연준은 그녀를 놓아주었다.문을 나선 뒤, 박연준은 그녀를 직접 차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차 문을 닫으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유영아, 만약 내가 너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려고 했으면 체코에서의 그런 방식을 사용하진 않았을 거야.”“...”이 말이 끝나자, 이유영의 살벌한 기운은 박연준의 말을 듣고 더욱 싸늘해졌다.지금, 아무리 시간이 한창 지난 지금이라지만 그날 체코에서 있은 일만 생각하면 이유영은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박연준은 그녀의 볼을 만지며 말했다.“당신은 용준이랑 똑같이 자기의 눈과 귀를 너무 믿고 의지해.”긴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 속에 담겨있는 부드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믿게 하였다...마치 박연준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닌 것처럼.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든지 간에 그는... 줄곧 자신이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마음이 생긴 건 진짜였다.하지만 유암이 보기엔 이유영은 뒤끝이 장난 아니게 긴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 대한 이용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나올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특히 지금 그녀가 뱃속에 얼마나 많은 나쁜 꿍꿍이를 갖고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당연히 믿을 수 없지.”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몸을 돌렸다.“...”유암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형님이 방금 뭐라고...’그 순간, 유암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박연준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곁에 있으면서 믿음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그런 박연준이 방금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지?박연준은 이유영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 심지어... 애틋한 말투였다.‘설마 형님이...’유암의 눈빛은 심각하게 변했다. 그도 몸을 돌려 박연준을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형님, 설마!”“어찌 됐든 그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야.”박연준은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딱... 이번 마지막 한 번만!’예전에 한지음을 붙인 것은 그의 계획이었다. 그럼 이번에 한지음의 딸은? 그는 계획된 것 이외의 감정으로 하며 금 이유영에게 현실을 똑똑히 보여주려 했다.그녀가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도대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이유영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로 했다.사람은 상처를 어느 정도 깊게 받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자꾸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된다. 오로지 극한에 달하는 정도까지 상처를 받아야 현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어떤 감정은 10년이 되었을지라도, 설령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해도, 꼭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잃은 건 사실 그 누구와도 상관이 없었다.만약 이유영이 정말 그의 마음속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면 그 누가 끼어들든, 어떤 음모가 계획되어있든 간에 다 두 사람을 떼어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그럼
강이한은 눈앞에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그녀가... 엄청나게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예전에 이유영의 눈에는 온통 강이한이였다. 하지만 지금은?“그럼 뭐가 당신하고 상관이 있는데? 당신과 서재욱의 딸?”그 아이, 이유영이 그 아이를 엄청나게 애호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도 그녀가 그 아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눈빛에는 싸늘함이 역력했다.“그럼 당신한테는 뭐가 중요한데?”“당신...”“예전에는 한지음, 지금은 한지음의 딸! 어차피 난 당신 마음속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니잖아. 설마 당신 아직도 내가 예전처럼 당신을 내 마음속의 중요한 위치에 놓을 것이라고 망상하는 거야?”순간 공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두 사람의 차가운 기운이 서로 대치되고 있었다.예전이라... 지금에 있어서 예전이라는 화제는 그들에게... 엄청나게 숨 막히는 것이었다. 예전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아주 각별했다.하지만 결혼한 뒤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역시 사람의 심장은 두 개의 심실이 있듯이, 하나에는 행복이 살고 다른 하나에는 슬픔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은 슬픔에게 상처를 주었다.제일 처음 시작할 때, 행복이 얼마나 컸으면, 몰락한 뒤로 그만큼 한 슬픔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지금, 현실에 상처를 받은 슬픔은 마치 큰 갭처럼 자라났다. 그 3년이란 시간에... 이미 높디높은 장벽을 이뤘으며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우리의 과거 7년에 대해, 당신은 정말 하나도 그립지 않아!?”이 순간, 강이한의 말투는 극한에 달할 정도로 억눌려있었다.이유영은 매번 이렇게 그의 앞에서 사이를 단호하게 잘라냈다.그녀의 단호함 때문에 강이한은 자신이 이유영의 세계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마치 과거 7년이란 세월이 꿈이었던 것처럼.“당신이 한 번 또 한 번 한지음을 선택했을 때, 그때...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