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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1장

시후는 열쇠를 받은 뒤 릴리와 함께 갈아입을 옷만 간단히 챙겨 궁을 나섰다. 데이터센터도 마침 오슬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안태풍과 제이크 한 경감, 나훈구를 들러 보고 가기로 했다.시후는 모두에게 인사를 나눈 뒤 말했다.“사소한 일은 헬레나에게 말씀하시고, 중요한 일은 저에게 바로 연락하십시오.”출발하려던 순간 나훈구가 시후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상의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시후가 물었다.“무슨 일입니까?”나훈구가 말했다.“지난 며칠 동안 스카이라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를 전반적으로 살펴봤습니다. 확인해 보니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민간 위성 발사 사업을 시작한 이후부터 스카이라인은 줄곧 자사 원격탐사 위성을 스페이스X를 통해 발사해 왔더군요. 사실상 스페이스X의 가장 초기 고객이자 가장 큰 고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두 회사의 협력 관계도 상당히 긴밀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스카이라인 측과 협의해서 블랙 드래곤의 통신위성을 스카이라인 명의로 등록한 뒤, 스카이라인과 스페이스X의 협력 관계를 활용해 우리 위성을 궤도에 올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그는 이어 설명했다.“위성 발사는 지금도 규제가 매우 엄격한 분야입니다. 진입 장벽도 높고요. 전 세계에 위성을 제작할 수 있는 기업은 수없이 많지만, 제3자의 위성을 우주 궤도까지 발사해 주는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위성 소유 기업에 대해서도 여러 자격 요건을 심사합니다. 적절한 명의 기업이 없다면 블랙 드래곤은 별도의 페이퍼컴퍼니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새 회사가 스페이스X 같은 기업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보다는 스카이라인 명의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시후는 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스카이라인 책임자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혹시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나훈구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발사 문제가 해결된다면 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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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2장

통신 사업을 스카이라인에 편입시키는 것은 시후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나훈구와는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를 구한 뒤에는 블랙 드래곤에서 일하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블랙 드래곤만의 독자적인 위성 통신망을 구축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가치를 다시 찾고 과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통신위성 역시 원격탐사 위성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했다. 이제는 중요한 사업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가 된 것이다.시후는 나훈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제안이네요. 스카이라인은 명실상부한 미국 기업이고, 지금은 겉으로도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배를 받고 있죠. 이런 구조라면 위성 통신 사업을 추진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고요. 이 일은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곧 스카이라인 명의로 새로운 통신사업부를 설립한다고 발표하고 채용 공고도 낼 겁니다. 그때 형님이 이력서를 제출하시죠. 일이 마무리되면 스카이라인에서 면접 초청장을 보내드릴 테니 미국으로 돌아가 정식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면접이 끝나면 바로 미국에서 업무를 시작하시면 되고요.”나훈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은 선생님. 면접 절차만 끝나면 곧바로 예전 동료들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다들 중년이 되었지만 각종 구조조정과 조직 개편을 겪어 와서 지금은 젊은 사람들보다도 더 절실하게 일하고 싶어 합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최고의 실력을 보여 줄 겁니다!”시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익만 좇는 사업가들과는 다릅니다. 형님의 동료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 준다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하거나 연봉을 깎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모두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나훈구는 서둘러 말했다.“저는 누구도 못 믿어도 은 선생님만큼은 믿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면 더는 걱정할 것이 없고요!”시후는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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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3장

깊은 밤, 시후와 릴리는 북극권을 향하는 도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던 릴리가 문득 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선비님, 이번에 AI가 아프리카에 있는 폴른 오더의 다른 거점까지 찾아낸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시후는 잠시 생각한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예전과 같지. 조용히 잠입해서 그곳의 절도사를 제거하고, 가능하다면 그곳의 특수 전사와 죽음의 전사들을 우리 편으로 받아들여. 모두 철수한 뒤에는 거점을 폭파할 생각이고.”릴리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선비님, 제 생각에는 폴른 오더의 죽음의 전사 거점은 전 세계에 적어도 열댓 곳, 많게는 스무 곳 이상은 있을 겁니다. 키프로스에서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에 성공하셨고, 이번에는 나이지리아로 시선을 돌려 놓은 뒤 다른 곳을 치려는 작전이지만, 이런 방법도 두 번까지나 통하는 법이지 세 번째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오시연이 삼대 장로를 나이지리아에 미리 매복시켜 두고도 또 다른 거점을 선비님에게 빼앗긴다면, 앞으로는 분명 모든 거점의 경계를 대폭 강화할 것입니다. 우리도 감시망을 넓히고 원격탐사 위성까지 활용하려 하는데, 오시연 역시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잠시 말을 멈춘 릴리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선비님의 실력이라면 오시연 수하 가운데 선비님보다 강한 사람은 삼대 장로와 오시연 본인뿐이예요. 모두 합쳐도 네 명뿐이니 그들이 모든 거점을 동시에 지킬 수는 없겠죠. 선비님이 그 네 사람이 없는 거점을 선택한다면 드나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죽음의 전사들과 특수 전사를 모두 데리고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큰 규모의 이동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게 되고, 결국 그 사람들은 블랙 드래곤의 거점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시연은 그 흔적을 따라 블랙 드래곤의 위치를 찾아낼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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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4장

릴리의 말에 시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릴리의 말이 지극히 객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기습으로 허를 찔렀고, 또 한 번은 동쪽에서 소란을 피워 서쪽을 치는 작전으로 오시연을 속였다. 하지만 이 두 번이 지나고 나면 오시연은 다시는 자신에게 무사히 빠져나갈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죽음의 전사 거점을 공격하더라도 남아 있는 죽음의 전사들까지 모두 데리고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결국 그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폴른 오더의 거점을 공격해 전력을 약화시키면서 죽음의 전사들의 생사는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의 전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거점 공격 자체를 포기할 것인가?어느 쪽을 선택해도 선뜻 옳다고 말하기 어려웠다.그때 시후가 릴리에게 물었다.“해독제를 주고 각자 도망치게 하면 어때?”릴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 죽음의 전사들은 거의 평생을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어요. 합법적인 신분도 없고, 생계를 이어 갈 기반도 전혀 없지요. 선비님께서 해독제를 주고 도망치게 하신다 해도 폴른 오더의 추격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현금을 나눠 주자니 수천 명분의 현금만 해도 여행 가방 몇 개에 담아야 할 정도라 현실적이지 않죠. 물론 폴른 오더도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만, 자유를 얻는 사람이 생긴다 해도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이나 살아남으면 다행일 거예요.”시후가 다시 물었다.“해독제를 준 뒤 해당 문제를 거점이 있는 나라의 정부에 맡기면 어떻겠어? 현지 정부라면 이들의 안전을 보호해 줄 수 있지 않을까?”릴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어느 나라에서든 국가 안보 차원의 엄청난 스캔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부든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 할 것이고, 무엇보다 죽음의 전사들은 그 나라의 국민도 아닙니다. 저도 그 나라들이 과연 그들을 보호해 줄지 확신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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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5장

릴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선비님은 신이 아니세요. 그러니 너무 많은 짐을 홀로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죽음의 전사들의 운명이 비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무고한 사람들은 더 비참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죽음의 전사들은 오시연에게 얽매여 살아왔지만, 동시에 그 여자의 악행을 도우며 수많은 죄를 저질러 왔죠.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고 성 하나를 초토화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요. 자신들은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무고한 사람들을 마주하면 오히려 더욱 잔혹하고 포악해졌어요. 그들이 저지른 죄는 제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만 해도 차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설령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해도 많은 이들이 극형을 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선비님께 간청드려요. 그들에게 지나친 자비를 베풀지 마세요. 그리고 그 자비 때문에 선비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더더욱 하지 마세요.”그렇게 말하면서도 릴리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선비님은 너무 인정이 많으셔.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그 악역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어.’시후는 릴리의 말을 오래도록 곱씹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릴리, 만약 좌위대 사령부를 내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총사령 휘하의 죽음의 전사들도 모두 내 지휘를 받게 되는 것 아니야? 그렇게 되면 당장 이들에게 해독제를 줄 필요도 없겠지. 오시연이 계속 해독제를 공급할 테니까.”릴리의 맑은 눈동자가 순간 빛났다.“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오시연은 원래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오방대의 총사령들조차 그 여자를 직접 만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선비님께서 정말 좌위대 사령부 총사령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오시연도 그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이 스쳤다.“다만 오시연 집안 사람들은 오시연의 진정한 직계 세력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수련을 쌓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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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6장

릴리의 말은 시후에게도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혼잣말처럼 조용히 입을 열었다.“맹장생은 평생 불멸만을 추구한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서의 감정까지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것 같아. 도를 깨닫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뒤에는 일부러 돌아가 장남교 집안의 선조와의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은 복이 부족해 며칠 차이로 맹장생을 만나지 못했지.”“그 후 지리산에서 은거하며 수행할 때도 세상사를 완전히 끊어 낸 것은 아니었어. 아버지와 오시연이 군대에게 쫓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민족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을 구해 주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 그 반지를 주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했던 말도 결코 빈말은 아니었을 거야. 어쩌면 당시 맹장생은 정말 그 반지에 그런 힘이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어. 만약 위급할 때 사람을 순간이동시키는 기능만 있었다면, 그걸로는 당시 외세의 군대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겠어.”그는 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릴리는 그 반지에 어떤 숨겨진 능력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릴리가 대답했다.“다른 것은 장담할 수 없지만, 백회단의 행방은 분명 그 반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시연이 그 반지를 손에 넣으려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백회단의 행방을 얻어 자신의 다음 오백 년을 열기 위해서일 테니까요.”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쩌면 공격 진법이 깃든 법보일 수도 있어. 다만 내 실력이 부족해서 아직 그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주머니 속 반지를 꺼내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천천히 바라보았다.“맹장생이 이 반지를 아버님에게 건넸을 당시에는 이미 군대가 휩쓸고 있었어. 그 사람이 정말 이 반지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반지에는 엄청난 수의 대군조차 막아 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그 말을 하며 시후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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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7장

노르웨이 왕실의 별장은 링엔 북쪽 언덕 정상의 완만한 비탈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길 하나가 산기슭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앞은 철제 대문이 가로막고 있었다.시후는 노르웨이 왕실 집사에게 받은 열쇠를 꺼내 차에서 내려 철문을 열었고, 다시 차를 몰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갔다.이곳의 산은 그리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엎어 놓은 밥공기처럼 둥글고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어 지형이 부드러웠고, 산의 능선마저도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노르웨이 왕실의 이 별장은 매우 고풍스럽고 우아한 목조 건물이었다. 규모도 상당해서 침실만 아홉 개였고, 거실과 서재, 식당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가 함께 머물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시후와 릴리는 별장 앞에 차를 세우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은 곳이었지만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환기와 청소를 해 온 덕분에 집 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고, 이곳 특유의 건조한 기후 덕분인지 오래 비워 둔 집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도 전혀 없었다.넓은 거실 한가운데에는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가 놓여 있었다. 도시에서는 벽난로를 단순한 인테리어 장식으로 두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의 벽난로는 집 전체를 데우는 실제 난방 시설이었다.겨울이 되면 산 전체가 눈으로 뒤덮이고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기 때문에 이곳의 날씨는 무척 추웠다. 시후는 벽난로 옆에 잘 패 놓은 장작을 몇 개 집어 불을 붙였다.장작불이 점점 활활 타오르자 별장 안의 냉기가 서서히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내는 따뜻하고 아늑한 온도로 변했다.별장 구조를 한 바퀴 둘러본 릴리가 돌아와 말했다.“선비님, 방이 모두 정말 좋네요. 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층마다 안방처럼 넓은 스위트룸이 하나씩 있어요. 선비님만 괜찮으시다면 1층에서 가장 큰 방을 쓰세요. 저는 선비님 옆방을 쓰면 될 것 같아요.”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제일 큰 방은 릴리가 써. 나는 옆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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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8장

시후는 릴리의 말을 듣자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것도 잊은 채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오로라가 나타난 방향을 바라봤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과 땅 사이를 거대한 물결처럼 수직으로 가로지르던 오로라가,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한 방향으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넓게 펼쳐져 있던 오로라는 산산이 부서진 분자처럼 흩어졌고, 셀 수 없이 많은 점 형태의 빛들이 하늘에서 천천히 하나의 중심을 향해 회전하기 시작했다.시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옆에 있던 릴리가 무심코 말했다.“선비님, 저건... 오로라가 갑자기 수많은 반딧불이로 변한 것 같아요.”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딱 맞는 표현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거대한 빛의 장막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수많은 반딧불이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 그 반딧불이들이 흩어졌다가 하나의 중심을 돌고 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겠어.”릴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반딧불이 같기는 하지만 실제 반딧불이는 아니에요. 오로라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도 같잖아요. 파도는 수많은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파도의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이상해요.”그 말을 하던 릴리가 갑자기 하늘의 초록빛 소용돌이를 가리키며 외쳤다.“선비님, 어서 보세요! 오로라가 또 형태를 바꾸려는 것 같아요!”다시 올려다본 소용돌이는 더 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수직으로 회전하지 않고 있었다.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수평선과 완전히 평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두 사람은 아래에서 그 거대한 소용돌이가 회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문을 잃었다.시후는 본능적으로 릴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언덕 위를 가로질러 소용돌이가 떠 있는 방향을 향해 힘껏 달렸다.릴리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시후의 발걸음을 따라 전력을 다해 달렸다.잠시 뒤 두 사람은 거대한 소용돌이 바로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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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9장

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연단로는 내 머리만 한 크기라 항상 들고 다니기도 불편해. 게다가 괜히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 눈에 띄면 곤란할 수도 있어서 두고 왔어.”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반지도 아니고 연단로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오로라에 영향을 준 걸까요?”시후가 물었다.“혹시 자기장 때문은 아닐까?”릴리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가능성은 낮아요. 오로라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생각하면 이런 형태가 나타날 수는 없어요...”그때 릴리가 또다시 놀라 외쳤다.“선비님, 어서 보세요! 오로라가 또 변해요!”시후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은하수처럼 회전하던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가 마치 케이크를 네 조각으로 자르듯 네 부분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각 구역의 빛들은 중심을 향해 빠르게 모여들었고, 밀도가 점점 높아지더니 마침내 하늘에는 두 개의 Z를 교차시킨 듯한 문양이 떠올랐다.릴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선비님... 오로라가... 어떻게 만(卍) 자 문양으로 변할 수가 있죠...?”그제야 시후도 어디서 본 문양인지 떠올렸다.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사용하는 만(卍) 자였다.그 거대한 ‘만’자 문양은 완전히 형태를 갖춘 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릴리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어릴 때부터 불심이 깊었던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신비로운 광경을 보자 저절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저 릴리는 태어나 평생 불심을 품고 선을 행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디 부처님께서 선비님을 보살펴 주시어 원수를 갚고 뜻하신 큰일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릴리가 시후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후가 문득 말했다.“아래에서 보면 종교에서 말하는 ‘만’자 문양이라 의미도 좋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독일 나치 문양처럼 보이지 않을까? 두 문양이 서로 거울처럼 반대잖아.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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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90장

시후의 말을 들은 릴리는 하늘을 더욱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광점들은 제각기 깜빡일 뿐, 아무런 규칙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빛이 너무 많아 정확한 주기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떤 형태가 나타나는지 알아차리기란 거의 불가능했다.릴리는 사실대로 말했다.“선비님, 제 눈에는 이 빛들이 아무 규칙 없이 깜빡이는 것처럼 보여요. 말씀하신 그림이나 손동작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그때 시후가 갑자기 말했다.“봐! 또 다른 손동작으로 바뀌었어!”릴리는 황급히 시선을 집중했지만 하늘의 광점들은 여전히 아무런 질서 없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그러나 시후의 눈에는 달랐다. 하늘의 광점들은 마치 누군가가 정교하게 제어하는 드론 군집처럼 미리 짜인 순서에 따라 움직이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릴리는 눈을 크게 뜬 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 사이 시후는 이미 여덟 번째 손동작까지 모두 확인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여덟 가지 서로 다른 손동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덟 개의 자세와 그 사이를 잇는 변화 과정을 뜻하고 있었다.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면 완전한 하나의 수인(手印)이 되는 것이었다.『구현보감』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었다. 도가와 불가에는 모두 수인을 맺는 신통한 비술이 존재한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일정한 방식으로 특정 위치에 두고, 정해진 자세를 만든 뒤, 다시 일정한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수인의 핵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엄밀히 말하면 수인이란 손동작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진법이었고, 여기에 영기를 더해 발동시키는 술법이었다. 수행이 극에 달하면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시후는 이미 여덟 가지 손 모양과 변화 과정을 모두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하지만 의문은 더욱 커졌다. 오로라를 손동작으로 바꾸어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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