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Chapter 891 - Chapter 900

986 Chapters

제891화

“어르신께서 안목이 없으신거죠...”나는 하마터면 그쪽 아버지가 사람 깔보는 게 취미라고 말할뻔했다.여태껏 진수로는 항상 성실한 모습만 보여줬다.그리고 진정우가 사라졌던 시기에도 나를 돌봐줬던 사람인데 나는 아직 저 사람이 진짜 친구로 여겨도 되는 건지, 아니면 지금 연기하는지 구별이 안 되었다.하여 어느 정도는 거리감을 두고 말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어쨌든 진수로도 진씨 가문의 사람인데, 어느 날 진정우가 다시 돌아와 내가 뒤에서 어르신 흉을 봤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내 말이 그 말이야. 나처럼 능력도 있고 말도 잘 듣는 후계자를 놔두고 왜 하필 정우만 고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만약 정우가 끝까지 거절하면 어떻게 할지 어디 두고 보겠어!”왠지 그의 속마음을 들은 느낌이다.“어쩌면 그때 가서 제발 받아달라고 도리어 사정할지도 모르겠네요.”내가 웃으며 비행기를 태워주자 진수로가 대뜸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역시 정우의 아내라서 그런지 속이 시커먼 게 똑같네.”그가 돌아간 뒤 나는 소파에 앉아 잠깐 생각에 잠겼다.비록 진수로는 오늘 쭉 덤덤한 태도로 말했지만 나는 왠지 일이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만약 진씨 가문에서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다면 나와 진정우의 평화롭던 생활도 또 깨지게 될 것이다.그러나 이것도 이미 익숙해졌는지 예전처럼 그리 마음이 심란하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한참 동안 고민 끝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받지 않았다.생각해 보니 지금 한창 강연하고 있거나 제일 바쁜 시간대인 것 같아서 빠르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내 창업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연구해 보았다.점심쯤, 진정우는 내가 며칠 동안 계속 먹고 싶다고 했던 불족발을 포장해 왔다.냄새를 맡으니 더욱 배고파졌지만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먼저 접시에 덜어줘. 이것만 하고 먹을게.”진정우는 모든 포장지를 뜯어서 접시에 옮긴 뒤 나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뭐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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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저녁 무렵.안리영은 마지막 수술을 마친 뒤 수술 장갑을 벗으며 하루의 끝을 마무리했다.“리영 씨, 빨리 가자!”이때 수간호사 오현아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불렀다.“어디 가요?”안리영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냥 이대로 집에 가자마자 눕고 싶었다.그러자 오현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피곤해서 정신없구나? 원장님이 오늘 저녁에 축하 파티가 있다고 할리스 호텔 예약하셨잖아.”“저는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요?”안리영은 지금 수술복 벗을 힘조차 없었다.“리영 씨가 오늘 주인공인데 안 가면 되겠어?”오현아도 그녀가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선뜻 수술복을 벗겨주며 말을 이었다.“리영 씨는 가서 아무것도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해.”그것조차 하기 싫은 안리영은 이 상황이 그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러나 이미 호텔까지 잡아뒀다고 하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고 또 오현아의 말대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데 만약 안 갔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뻘쭘해할 것 같았다.안리영은 이런 자리가 매우 불편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껏 기대에 차 있을 것이다.그건 오현아의 눈빛만 봐도 알 것 같았다.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구안석이 다가왔다.“이따 내 차로 같이 가자.”“아니야. 나도 차 갖고 와서 혼자 가면 돼.”안리영이 거절하자 구안석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는데 얼굴에 드러나는 실망감은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지금 자기랑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오늘 두 주인공은 자차로 갈 필요 없어. 병원에서 특별히 차를 준비해 뒀거든.”오현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다들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출발합시다!”그녀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빠르게 한자리에 모였다.그리고 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앉았고 맨 마지막 두 개의 자리를 구안석과 안리영에게 남겨줬다.안리영은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조시언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삼촌, 오늘 병원에서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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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편안한 축하 파티라고 해도 편안한 자리여서 그런지 모든 사람이 즐겁게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만끽했다.구안석도 분위기에 휩쓸려 몇 잔 마셨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고 안리영도 마찬가지였다.의사라 그런지 알코올을 많이 마시게 되면 신경이 마비된다는 인식이 박혀버렸기 때문이다.“괜찮아?”구안석은 줄곧 안리영 옆에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다가 겨우 한산해진 틈에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응.”아까까지 단답형인 조시언에게 불만이던 안리영은 문득 이 방법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대답할 기력이 없었고 거기에 술까지 마시게 되니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아니면 내가 먼저 집까지 데려다줄게.”진작에 안리영의 상태를 눈치챘던 구안석이 걱정스레 말하자 마침 그녀도 가고 싶었던 참에 재빨리 답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 대신 사람들한테 좀 잘 말해줘.”“지금 술에 취했는데 이 상태로 혼자 가면 내가...”걱정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구안석은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어차피 지금 안리영은 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아예 없는데 여기서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가는 지금보다 더욱 거리를 두고 안 만나줄지도 모른다.“시간도 늦었는데 혼자 가면 위험해.”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핑계를 댔다.“삼촌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 돼.”안리영의 대답에 구안석의 얼굴이 삽시에 어두워졌지만 이미 핸드폰을 꺼내 조시언에게 연락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보아하니 조시언에 대한 신뢰가 꽤 깊어 보였다.“그런데 왜 그 사람이랑 지금 같이 살고 있어? 혼자 살면 조용해서 좋다고 했었잖아?”구안석의 물음에 안리영은 조시언에게 문자를 보내며 답했다.“아빠랑 엄마가 계속 돌아오라고 독촉해서 잠시 삼촌네 집에 숨어 있으려고.”그녀의 대답에 구안석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듯 안심되었다.더구나 술이 살짝 들어가 알딸딸한 상태라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계속 거기에 있으려고?”“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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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삼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나한테 아무 말도 없었잖아?”안리영은 지금 당장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만약 어렸을 때라면 당장에라도 그에게 안겼을 텐데 지금은 다 큰 성인이고 아무리 삼촌이라고 해도 남자 여자는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멈춘 탓인지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조시언이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회식하는데 분위기를 망칠까 봐.”그러자 안리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낮은 소리로 답했다.“난 여기에 오고 싶지도 않았어. 그냥 소파에서 누워있다가 삼촌이 끓여다 준 라면이나 먹으려 했단 말이야.”그러자 조시언은 한껏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답했다.“그러면 빨리 가자. 라면이 아니라 더 맛있는 걸 해뒀어.”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안리영이 되물었다.“진작에 밥을 했다고?”“응, 저녁에 집에서 가볍게 우리끼리 축하 파티를 하자고 했었잖아. 네가 오늘에는 분명 피곤해할까 봐 미리 해뒀지.”조시언은 사실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없지만 안리영한테만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사실 구안석도 그녀에게 요리해 준 적이 있었다.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가끔 안리영이 그를 찾아갈 때마다 아침밥을 해줬었는데 나중에는 일이 너무 바빠 어쩔 수 없이 혼자 밥 먹으로 보내야 했거나 쭉 밖에서 식사하곤 했다.하여 구안석은 두 사람이 헤어진 건 타이밍도 계속 안 맞았고 또 업무 때문에 제대로 그녀를 챙겨주지 못했던 게 원인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조시언의 모습을 본 순간 이 모든 게 다 핑계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안리영이 이미 차 앞까지 도착한 모습을 발견한 후에야 구안석은 자기 손에 들려있는 그녀의 가방이 생각났다.그러나 그는 이미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던 이때,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경적이 들려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오토바이 한 대가 두 사람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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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그러나 조시언도 차분히 손만 내민 채 계속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 남자는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구안석이 가방을 돌려주며 한 마디를 건넸다.“시언 씨는 리영이한테 그 어떤 미래도 주지 못할 겁니다.”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조시언이 진짜 조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안리영과는 아무 혈연관계도 아니라고 해도 여태껏 두 사람이 삼촌과 조카 사이로 지내왔기에 이 관계를 하루아침에 깨버리기는 힘들어 보였다.그리고 혹시나 진짜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을 게 뻔해 보였다.옛말에 무책임한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처럼 아무리 조시언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안리영은 고통스러울 것이다.“시언 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게 진짜 사랑입니다.”돌아서서 떠나가려는 조시언에게 구안석은 또 한마디를 건넸다.사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염치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안리영이 걱정되었다.그러자 조시언은 그녀의 가방을 손에 들고 다시 뒤돌아서서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구안석 씨는 자기 자신만 신경 쓰면 됩니다. 다른 건... 상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안리영은 차에 올라타는 조시언을 보자마자 빠르게 물었다.“선배가 뭐래요?”분명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그러나 조시언은 한껏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렇게 차에 시동이 걸리면서 부드럽게 도시의 거리를 누볐는데 문득 차창 밖의 풍경들이 마치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아까까지는 조시언의 품에 안겨있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안리영은 이제야 후폭풍이 조금씩 오는 것 같았다.공포스러웠던 경적과 갑자기 자신을 품에 안아줬던 조시언의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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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안리영은 나를 보러왔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세글자를 내뱉었다.“미쳤네.”모든 사람이 아마 내가 2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이런 낡은 마당에 벽 하나, 심지어 지붕도 온전하지 못한 흉가와 다름없는 집을 샀다고 알리면 분명 똑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들어보기만 했지,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안리영은 한껏 실망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그렇게 돈 쓸 곳이 없으면 차라리 필요한 사람한테 기부나 해.”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금은 이래도 딱 한 달 뒤면 아주 새롭게 변할 테니까 어디 두고 봐.”그러자 안리영은 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집을 다시 지을 예산이면 차라리 좀 괜찮은 거라도 고르던지. 하필 다 쓰러져가는 집을 다시 고쳐 쓰겠다는 이유가 뭐야?”“좀 낡았어도 다시 새롭게 지으면 느낌이 다를 거야. 됐고, 나중에 새집 보고 놀라지나 마.”나는 매우 자신 있게 말했다.안리영은 내 고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입씨름해 봤자 헛수고라 생각했다.그러다가 문득 내 배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뱃속의 소중한 아이는 절대 다치면 안 되니까 조심해. 난 분명히 말했다?”“알겠습니다, 안 주임님.”그리고 안리영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삼촌네 집에서 지내보니까 어때? 재밌는 일이 있으면 말해봐.”“왜, 금욕기간이라 자극적인 게 당기나 봐?”안리영은 나랑 같이 놀면서 많이 뻔뻔해졌다.“맞아! 혹시 있어?”“미쳤어? 그분은 내 삼촌이야, 그런 것도 내가 구분하지 못할까 봐? 내가 뭐 짐승이야?”나의 호기심에 어린 눈빛을 바라보던 안리영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사실 나도 그저 해본 말이다.아무리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가문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안리영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었기에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조시언을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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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왜? 내가 남의 밥그릇이라도 뺏을까 봐 걱정돼?”“그냥 궁금해서.”나는 그의 능숙한 솜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이런 건 어떻게 할 줄 알아? 예전에 배웠어?”그러자 진정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응, 예전에 다 해봤어.”나는 물 한 병을 가져다준 뒤 그의 얼굴에 붙은 나무 부스러기를 털어주며 옆에 앉았다.“설마 예전에 이런 일을 하면서 돈 벌었던 건 아니지?”진정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답했다.“맞아. 그래야 내 학비랑 소영이 병원비를 낼 수 있었거든. 그렇지 않으면 엄마 혼자 너무 힘들어 보였어.”그의 말에 문득 나는 진정우의 아버지와 내 부모님이 생각했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그의 나이도 꽤 어렸을 것이다.“그때 정우 씨도 엄청 어렸지?”“아마 열두 살쯤이었을 거야. 나이는 어리고 몸도 허약했는데 키가 또래보다 많이 컸어. 그래서 공사 현장 사람들도 내가 분명 열다섯 살은 넘었다고 생각해서 받아줬던 것 같아.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돈은 많이 안 주더라고. 그래서 그때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나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무조건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어.”진정우는 옛날에 자신이 필사적으로 살았었던 시절이 생각났는지 한참 동안 먼 곳만 바라보았다.사실 나도 나의 옛 시절이 떠올랐다.비록 그때 부모님을 다 잃었지만 그래도 강씨 가문에 있으면서 이모와 삼촌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또 강유혁과 강진혁의 보살핌도 많이 받았다.하여 고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공주님처럼 자라왔다.비록 내 불행은 모두 그들이 초래한 거지만 이미 충분히 보상해 줬다고 생각한다.진정우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그래서 정우 씨가 진씨 가문을 싫어했구나?”진수로는 그날 다녀간 뒤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도, 전화 한 통화도 걸어오지 않았는데 어쩌면 진정우가 뒤에서 그에게 경고했을 수도 있어 보였다.그렇다고 해도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건 변함이 없기에 결국에는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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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그래서 그런지 강유형을 만나기 하루 전날, 내 꿈에 그가 나타났다.그는 노란색 승복을 입고 내 침대 앞에 서서 말했다.“지원아, 나 좀 봐줘.”그 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강유형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순간 눈앞의 그가 사람이 아닌 저승사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내가 가려던 참이었는데.”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알아. 그래서 내가 왔어.”강유형은 모든 게 그대로였는데 얼굴과 몸이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있었다.“그러면 전화를 받았어야지. 괜히 걱정했잖아.”애써 웃으며 말을 내뱉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다 내 잘못이야. 앞으로 걱정 끼치지 않도록 할게.”강유형은 말하자마자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유형아, 나 지금 마당이 있는 집을 하나 사서 찻집 하려고 하는 데 가게 이름 하나 의미 있는 걸로 지어줄래?”이건 진정우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다.어릴 때부터 법운사에서 경을 자주 들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의미가 담긴 이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자 강유형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그러면 꿈의 정원이니까 드림 가든으로 짓자.”왠지 마음에 들어서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난 마음에 들어. 오픈하면 놀러 와.”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만 보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지원아, 넌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 거야.”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해졌다.“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이렇게 이승에 와서 너랑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뻐.”강유형이 이 말을 내뱉자마자 이상하게 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눈을 비비고 다시 보려 했지만 아까보다 더욱 흐릿해지더니 그는 어느새 하늘 위로 날아올라 갔다.“유형아, 강유형!”“지원아, 널 언제나 지켜줄게.”강유형은 멀리멀리 떠나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나는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멀어져가는 강유형을 애써 붙잡으려고 손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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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이제 보니 정원에 나보다도 더 진심인 것 같았다.평소였으면 분명 좋아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그저 멍하니 대문만 바라보았다.그러나 해가 뜰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고 내 마음도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수정 스님이 계실 때는 사찰 문을 매일 그가 열었다가 나중에 강유형으로 바뀌었는데 그는 매일 문을 여는 게 마치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아 기분이 개운하다고 말했었다.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누구도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설마 어디 아픈가?’그 생각에 나는 빠르게 문 앞에 다가가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고 한참 뒤에야 누군가가 문을 열어줬는데 여기서 수행하고 있는 제자였다.“죄송합니다. 오늘 공륜 스님께서 늦게 일어나셨나 봅니다.”공륜은 강유형이 여기서 불리는 이름이었다.나와 진정우는 감사의 표시를 전한 뒤 절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늦게 일어나나요?”“아니요. 최근에 몸이 편치 않으셔서 가끔 오늘처럼 늦게 일어나곤 했습니다.”그의 말에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갑자기 아프다고? 무슨 일이지?’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고 진정우는 옆에서 나를 부축해 줬다.그렇게 강유형이 묶고 있는 곳까지 도착하자마자 나는 빠르게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그러나 몇 번이고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강유형, 일어났어?”우리랑 같이 온 스님도 그를 불렀다.“공륜 스님.”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으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 진정우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그러면서 뒤돌아서 나에게 말했다.“내가 들어가서 한 번 볼 테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려.”그는 서둘러 방 안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 지나서 도로 나왔는데 나는 그의 안색이 이토록 어두운 모습을 여태껏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순간 나는 저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알 것 같아 그를 밀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침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유형은 파란색 옷을 입고 침대에 얌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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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나는 강유형이 이런 식으로 떠나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말한 대로 아무리 이게 자신에게 책임지는 선택이라고 할지라도.그리고 그가 말한 병에 대해서도 나는 금시초문인 상태였는데...설마!사실 강유형은 몇 번 내 앞에서 피를 토한 적이 있었고 또 코피도 흘렸었다.또 자주 병원에 입원도 했고 볼 때마다 야위어가는 것 같았다.이렇게나 많은 신호를 보냈는데도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비록 나랑 강유형이 더 이상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내가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봤던 사람이고 심지어 생리 때마다 따뜻한 차를 대령했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면 곧바로 쫓아가서 혼내주곤 했었다.강유형은 나에게 그저 단순하게 전 남자 친구가 아닌 내 모든 성장 과정, 모든 청춘을 함께한 사람이자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이렇게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갔고 심지어 그 흔한 작별 인사조차 나에게 하지 않았다.하여 나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썼더라면, 조금이라도 눈치챘더라면 그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을 텐데.그러나 아무리 자책해도 소용없고 그는 이미 떠나갔다.“공륜 스님께서는 최근에 음식도 잘 드시지 못했고 여러 번 피를 토하시던데... 단 한 번도 약을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진작부터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던 것 같아요.”강유형을 가르쳤던 스님이 나에게 말했다.그의 말대로 강유형의 유품에는 그 어떤 약물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그마저도 내가 모르길 바랐던 모양이다.‘난 왜 그토록 눈치가 없었을까?’곧장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눈물이 났다.“리영아, 유형이 이제 없어.”“뭐?”깜짝 놀란 안리영이 나에게 되물었다.“날 두고 혼자 떠났어. 그렇게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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