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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대황자는 잠깐 망설였다. 조금 전 태의가 진가이의 맥을 짚어 회임 시기를 확인했는데 분명 그가 그녀와 자주 잠자리를 함께하던 때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솔직히 말해 그는 이 아이 자체에 큰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훗날 황위에 오르면 후궁은 차고 넘칠 테니 그때 가서 아이를 가지는 일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황제는 이 아이 때문에 요즘 들어 유독 그를 자주 불러들였다. 캐묻고 확인하듯 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아이가 그에게 쓸모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예정임이 저지른 짓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야랑국 팔황자 주제에 감히 그에게 이런 치욕을 안기다니. 이 일을 그냥 넘긴다면 그는 평생 조롱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야랑국 팔황자 예정임. 대황자부를 무단으로 침입해 측비를 범하려 했으니 즉시 처형하거라.”“감히! 나는 야랑국의…!”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며 여덟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모든 화살이 예정임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치명적인 한 발은 그의 목을 관통했다. 화살촉이 목 뒤로 튀어나오는 순간,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예정임은 끝내 눈을 감지 못한 채, 진가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쓰러졌다.그 끔찍한 장면에 자극받은 진가이는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고 대황자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한 번 흘겨보았다.“오늘부로 진 측비를 부 안에 유폐한다. 평생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거라.”진가이는 알고 있었다. 아이 덕분에 당장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자신의 운명은 여전히 안갯속이라는 것도.단여월은 이를 악물었다. 기껏 잡은 약점으로도 진가이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분했다.“그럼 언니는요?”그녀가 차갑게 물었다.“다른 사내에게 더럽혀져 몸도 마음도 망가진 여자를 대황자께서는 정말 계속 이 부에 두실 생각입니까?”대황자는 단여월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오늘부터 부의 살림은 본황자가 맡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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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그는 분명 인재였다. 진국과 여국 사이의 전쟁이 끝난 뒤, 대황자는 사람을 보내 진방옥을 오래도록 찾게 했지만 끝내 행방을 알 수 없었다.그런데 이렇게 수고 들이지 않고 스스로 굴러 들어올 줄이야.“그를 본황자의 처소로 데려오너라.”하인이 곧바로 대답했다.“명 받들겠습니다.”진방옥은 꿈에도 몰랐다. 연기준 곁을 잠시 떠난 사이,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칠 줄은.진 가에 있을 때 호신술 하나 제대로 익혀두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되었다.예정임의 시신은 사람들에 의해 들려 경성의 절반을 돌아다녔다. 그는 야랑국의 팔황자였고 본래는 곧 야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런 인물이 대황자부에서 갑작스럽게 죽자 경성 안에는 소문이 들끓으며 온갖 말이 떠돌았다.대황자는 이 일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예 사실을 공개했다.그날 이후, 경성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었다. 예정임이 색심에 눈이 멀어 대황자의 측비를 범하려다 시위에게 음적으로 오인되어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마침 얼마 전, 예정임은 사람들 앞에서 대낮에 민가의 여인을 거의 능욕할 뻔한 일이 있었던 터라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에 백성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대황자를 탓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대로 예정임의 시신 위로 쏟아졌다. 그가 민녀를 범하려 했던 바로 그 거리를 지날 때 상인들과 백성들은 썩은 달걀과 상한 채소 잎을 시신 위로 던졌다.야랑국 사신들의 호위 앞에 시신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온몸이 더럽혀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옥사 안.야랑국의 호위병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군과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 사람이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야랑국이 군사를 일으켜 진국을 치고 반드시 주군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고.그때, 열셋 째 황자는 아직도 옥사 안에 있었다.그는 형부상서 앞에서, 한 시진 전 예정임이 어떻게 거리 한복판에서 진국 백성을 모욕하고 민녀를 희롱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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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용서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황제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거친 말을 내뱉었다.“만약 양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희생되는 건 전선의 장병과 변방의 백성이다. 내가 어렵게 양국 화친을 성사시킨 것은 단지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다. 헌데 이때 네가 야랑국 팔황자를 죽이다니, 너는 내 뜻을 거스르는 것이냐?”대황자는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감히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예정임이 우리 조정에서 횡포를 부리고 백성을 괴롭히다가 마침내 신의 부에 들어와 측비까지 범하려 했습니다. 시위들이 이를 음적으로 보고 부주의로 살해한 것뿐입니다. 만약 신이 예정임임을 알았다면 결코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반드시 부황께 먼저 아뢰었을 것입니다.”대황자는 영리했다. 자신의 혐의를 벗어날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러나 황제는 한 치도 풀린 기색이 없었다.“이 모든 일은 너로 인해 발생했다. 지금 당장 전선으로 가서 야랑국 황제에게 이 일을 해명하거라. 만약 이 일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인다면 네가 변방에서 죽을 각오를 다해 야랑국에 사죄해야 할 것이다!”황제는 단호하게 말하며 대황자를 포기해 버렸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단숨에 어두워졌다.그때, 맹국공이 앞으로 나섰다.“전하, 신이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들은 바로는 이 예정임이 거리에서 민녀를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도성에서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황자께서 예정임을 쏘아 죽인 일은 이미 퍼졌고 지금 경성 사람들은 대황자를 백성을 위해 악을 제거한 자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황자 전하를 전선으로 내보낸다면 진국 백성들의 마음이 식을 것이고 다른 나라들은 진국이 쉽게 당한다 여기며 오만해질 것입니다.”황제는 맹국공의 말을 곱씹었다. 백성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다른 나라가 진국을 우습게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적어도 장생불사약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황제는 화를 내며 물었다.“그럼 너희가 말해 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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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맹국공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문득 화제를 바꿨다.“대황자와 열셋 째 황자 중 서왕께서는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맹국공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말을 꺼낼 리 없다는 건 서왕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몸 상태에 대해 그 역시 전해 들은 바 있으니 말이다.서왕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낮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그건 폐하의 뜻에 달린 일이지요. 오늘 일로 인해 폐하께서 대황자에게 다시금 거리를 두실 것은 분명합니다.”그러자 맹국공이 조용히 덧붙였다.“오늘의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열셋 째 황자입니다.”서왕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열셋 째 황자는 자칫하면 야랑국의 데릴사위가 될 뻔했다. 예정임이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경성을 떠나 다시는 황위 계승을 논할 자격조차 없었을 터였다.맹국공의 말을 곱씹자 서왕은 문득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자들 가운데, 진짜 단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셋 째 황자가 정말 아무 수단도 없는 인물이었다면 황릉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두 사람은 한동안 더 걸어가다가 맞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금수 대장공주는 요즘 후궁에서 유난히 얌전했다. 자주 다니던 어화원조차 질렸는지 며칠째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서왕이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체면 삼아 바깥에 나온 모양이었다.그녀는 거리낌 없이 두 사람 앞에 섰다.“서왕, 오랜만이네요. 잠시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맹국공은 눈치 빠르게 예를 갖추었다.“노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서왕 역시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려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옅은 난처함이 스쳤다.“대장공주께서 저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금수 대장공주가 귀경한 이후, 이렇게 가까이 그와 마주 선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젊은 시절의 패기 넘치던 소년은 아니었지만 나이를 먹은 그는 또 다른 종류의 깊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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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금수 대장공주는 곧바로 반박했다.“본궁은 그저 순간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말이었을 뿐이야.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단 말이야.”서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허나 저는 태황태후의 뜻을 받들어 혼인한 것이 순간의 충동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마마와 한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성조 선제께서는 저를 길러주신 은인이셨고 저는 일생 동안 연 씨 황실을 지키고 진국의 백성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맹세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헌데 마마께서는 오직 위로 오르는 것만을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왕부 전체를 금란전 구오지존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 하셨지요. 허나 그런 선택은 반드시 조정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 순간 진국은 안으로는 혼란에 휩싸이고 밖으로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조금만 삐끗해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연 씨 황실은 뿌리째 흔들릴 겁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송구하오나, 저는 그것을 감당해 드릴 수 없습니다.”서왕은 한때, 전장에서 바람처럼 달리던 그 소녀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집어삼키려는 그녀의 야망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그는 인정했다. 아마도 자신은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맹세를 어기고 백성의 생사를 외면할 만큼은 사랑하지 못했다. 성조 선제를 배신하는 일은 그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했다.금수 대장공주는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그녀가 급히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서왕은 이미 혼인한 뒤였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그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남겼을 뿐,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녀가 분노에 차 요동으로 시집가 버린 뒤로는 이런 말을 들을 기회조차 사라졌다.지금에 와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도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이 남자에게 더 깊은 실망만 쌓일 뿐이었다.“너는 아버지를 저버릴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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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연기준은 편지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고 그대로 맹경운에게 건넸다.“요동 쪽 사람들이 진국에 이렇게 오래 머무른 데에는 역시 문제가 있었군.”맹경운도 받아 들고 잠깐 읽어보더니 이내 머리를 짚었다.“저 금수 대장공주... 시집간 지가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진국의 황위를 넘보겠다는 겁니까?”연기준의 표정은 담담했다.“그 여자는 어려서부터 성조 선제의 말등 위에서 자랐다. 야망은 성조 선제를 닮았고 성정은 태황태후를 닮았지. 목적을 이루기 전엔 절대 멈추지 않는 성격이야. 젊을 때 품은 집념은 한 번쯤 직접 해보지 않으면 결국 후회로 남는 법이지.”맹경운이 걱정스레 물었다.“그럼 지금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면 계획이 망가질 수도 있잖아요.”연기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요동 쪽 첩자들에게 연락하거라. 요동 황후가 궁을 비운 지 너무 오래됐다. 후궁이 이렇게 조용하면 정상이 아니지.”맹경운은 순간 몸이 서늘해졌으나 곧 뜻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후궁에 불장난을 하려는 거군요. 재미있습니다. 요동 황제도 그 여자한테 그렇게 오래 눌려 살았으니 그녀 없는 사이에 한 번쯤 숨 좀 쉬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맹경운이 주루를 나설 즈음엔 이미 해질녘이었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진 노을이 금빛으로 대지를 덮고 있었다. 주루 문을 막 나서자마자 맹은영이 숨 가쁘게 달려와 그를 불렀다.“셋째 오라버니, 큰일 났습니다! 진짜 큰일이예요!”맹경운은 피곤하다는 듯 대꾸했다.“너희 셋째 오빠는 아주 잘 살아 있다.”맹은영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밀었다.“장난 아닙니다! 방금 사람 하나를 본 것 같아요.”맹경운은 혹시라도 연기준을 봤다는 말이 나올까 봐 식은땀이 났다. 이 아이는 말을 거르지 않고 내뱉어, 흥분하면 쓸데없는 말까지 죄다 흘리고 다니는 성격이었다.그는 맹은영의 뒷깃을 붙잡고 사람 없는 쪽으로 끌고 갔다.“길거리에 널린 게 사람이다. 헌데 네가 본 사람이 뭐가 대수라고.”끌려가며 맹은영이 말했다.“헌데 내가 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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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연기준은 도면을 받아 펼쳐 잠시 훑어보았다. 그 그림은 예전에 서 씨 가문의 서재에서 보았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았다. 그는 즉시 이 도면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짐작했다. 연기준은 붉은 점이 찍힌 위치를 머릿속에 단단히 새긴 뒤, 다시 내시에게 도면을 돌려주었다.“신 황귀비께 돌려드린 후 잘 보관하라고 전하거라. 훗날 다시 쓸 일이 있을 것이다.”내시는 냉궁이 신 황귀비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면을 챙기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내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궁에서만 이십 년을 지냈지만 저런 경공은 대내의 최고 고수들조차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늘 밤 후궁에는 분명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바람 한 줄기가 스치자 내시는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움찔했다. 그는 목을 움츠린 채, 작은 걸음으로 서둘러 신 황귀비에게 돌아갔다.냉궁.서인경은 턱을 괴고 앉아 흰 종이 위에 붓으로 이런저런 선을 그어가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는 그녀 옆에 바짝 앉아 며칠 전 스승이 내준 숙제를 조용히 베껴 쓰고 있었다.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문만큼은 놓지 말라고.그 말을 그는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서인경이 그렇게까지 빡세게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줘도 그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물론, 그는 빡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연못가에서는 세 마리 악어가 나란히 턱을 물가에 얹은 채, 육지 위의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저 개 같은 황제, 장생불사 약이 그렇게 갖고 싶다면서?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 줄까? 약환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주지. 예전에 설산에 있을 때도 가짜로 속여먹는 데는 내가 최고였는데, 뭐!]악어 한 마리의 말을 듣고 서인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페하가 바보도 아니고, 궁 안에 태의들만 몇 명인데. 네가 약환 하나 내놓으면 바로 가짜인 거 들통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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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사촌 누님, 만약 오늘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신 황귀비마마께서 걱정하실 거예요.”열다섯 째 황자는 사실 모후가 걱정할까 봐 두려웠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모후는 늘 말했다. 자신이 다시 궁에 돌아온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특히 사촌 누님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경우 그녀까지 연루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서인경 역시 바깥 하늘빛을 보고 있었다.황제는 애초부터 열다섯 째 황자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 아이를 인질 삼아 서인경을 압박하려는 것일 터. 열다섯 째 황자가 여기 있는 한, 서인경은 결국 장생불사 약을 써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 황귀비 쪽에는 황제가 이미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다만 신 황귀비가 이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몸에 위에는 황후까지 얹혀 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무슨 일이 생기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서인경은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열다섯 째 황자를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폐하께서 너를 여기 남겨두셨다면 신 황귀비마마가 의심하지 않도록 이미 손을 써 두셨을 거야. 신 황귀비마마도 똑똑한 분이니 폐하의 뜻을 나름대로 판단하실 거고.”열다섯 째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모후도, 신 황귀비마마처럼 자신 때문에 무모한 짓은 하지 않기를.서인경이 마음속으로 불안해하던 순간, 밖에서 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세 마리 악어는 동시에 물속으로 휙 사라졌다.문이 열리기 전까지 수면은 다시 고요해졌고 남아 있던 물거품도 이내 사라졌다. 가장 먼저 빛에 반사된 한 쪽 다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석양을 등지고 황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서인경 앞에 섰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먹 자국을 힐끗 내려다보았다.종이는 두 장. 한 장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누가 봐도 열다섯 째 황자의 필체였다. 다른 한 장은 몇 획밖에 없었고 글씨는 너무 못생겨 팔다리가 잘린 듯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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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이치대로라면 황제는 어제 이곳을 떠난 뒤 태의들을 불러 자신의 건강 악화 원인인지 단은설의 혈액 때문인지를 확인했어야 했다. 서인경의 계획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황제와 단은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태의들이 진단을 했다면 분명 약을 처방했을 것이고 약을 먹었다면 황제의 안색은 최소한 조금이라도 나아졌어야 했다.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경우는 하나뿐. 황제가 서로 상극이 되는 약물을 함께 복용하고 있다는 뜻이다.견기초의 해독제와 상극인 약물은 단 하나, 산호편이라는 식물뿐이었다. 고서에는 산호편이 수명을 늘려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고 옛사람들은 그것을 갈아 장생불사 약을 만들곤 했다.하지만 서인경은 21세기 교실에서 이미 배웠다. 이 약효는 후대에서 전부 부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산호편은 그저 평범한 수초에 불과했다. 장생불사는커녕 감기 하나 고치지 못하는 아무 쓸모없는 풀일 뿐이었다.황제의 현재 반응을 보아 서인경은 확신했다. 그는 지금 산호편을 먹고 있다. 게다가 태의들은 황제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서인경은 즉시 알아차렸다. 황제는 태의들 외에도 따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장생불사 약을 연구하게 하고 있었다는걸.황제가 말을 멈춘 뒤, 한참이 지나도록 서인경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기대한 것처럼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태도는 황제의 오만한 자존심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약을 먹여라!”자신은 천자였다. 그런데 상왕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상왕비마저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다니.내시들은 명을 받자마자 앞으로 나와 서인경과 열다섯 째 황자를 붙잡았다.열다섯 째 황자가 발버둥 치며 외쳤다.“부황, 두 알 다 저에게 주세요. 제가 사촌 누님 대신 죽겠습니다!”황제는 이 철없는 아들을 노려보았다.“죽고 싶다면 짐이 바로 소원을 들어주지.”서 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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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대문이 다시 닫히며 쇠사슬이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전각 안은 또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서인경은 바닥을 기어 열다섯 째 황자를 끌어안았다.“연무성, 버텨.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수 있어.”열다섯 째 황자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두 손을 꽉 쥐고 온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눈물이 쏟아질까 두려워 차마 눈을 뜨지 못했고 말 한마디 하려다 아예 숨이 막힐까 봐 입도 열지 못했다.그러나 그의 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서인경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약왕곡으로 들여보냈다. 독을 완화하는 약환 두 알을 꺼내, 하나는 스스로 삼키고 다른 하나는 열다섯 째 황자의 입가로 가져갔다.“입 열고 어서 이것을 삼켜.”열다섯 째 황자는 힘겹게 입을 벌렸고 서인경은 그의 입 안에 약을 넣어 주었다.“조금만 더 버텨.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반드시 해독법을 찾아낼게.”그때,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세 마리 악어가 물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들은 물에서 꽤 멀리까지 몸을 끌며 미끄러져 와 서인경과 열다섯 째 황자 곁에 멈춰 섰다.그중 한 마리가 열다섯 째 황자의 몸을 킁킁거리며 맡았다.[삼일단혼단입니다. 저 황제, 정말 잔인하네요.]악어가 그 약환을 알아보자 서인경은 곧장 물었다.“삼일단혼단이 뭐야? 해독 방법은?”[서역에서 쓰는 특수한 독입니다. 중독되면 온몸의 경맥이 끊어진 것처럼 아파지지요. 사흘 동안 날마다 통증이 심해지고 해독제가 없으면 셋째 날엔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해독법은…]악어는 말을 흐렸고 세 마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서인경은 속이 타들어 갔다.“그게 뭐야? 어서 말해!”[일불락 순혈의 피가 있으면 독 발작은 완화됩니다. 헌데 완전히 풀려면 일불락 유적 한가운데 쌓인 눈이 녹은 물을 마셔야 해요.]일불락 유적의 설수. 지금 그걸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그제야 서인경은 깨달았다. 자신의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이유는 몸속에 일불락 순혈이 흐르고 있어 독성이 일부 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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