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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심건모는 병상 앞에 서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송서윤을 응시했다. 드러난 목과 팔, 종아리에는 뱀에게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무심한 듯한 그의 눈동자에 짙은 통증이 서렸다. 그는 의사들이 송서윤의 전신을 검사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원장이 다가와 보고했다.“국장님, 사모님에게 큰 이상은 없습니다. 문 뱀은 독이 없는 종류라 어렵지 않게 처치를 모두 끝냈습니다. 다만, 뇌진탕 위험이 있어 하룻밤은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고생들 하셨어요. 아내를 입원실로 옮겨주세요.”심건모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간호사들이 송서윤의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것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안 선생을 오라고 해.”제훈이 대답하며 물러나려 할 때 심건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이민호는 감옥에 처넣어.”그때, 고영훈이 달려들었다.“서윤이는요? 서윤이는 좀 어때요?”“서윤이 깨어났어요? 얼굴 좀 보게 해줘요!”심건모가 무심하게 고영훈을 곁눈질하자 특수경찰들이 그를 가로막았다.“서윤이를 사랑한다면 제발 내게 돌려보내 줘요! 아진시로 데려가게 해달란 말이에요. 경원시는 서윤에게 안전하지 않아요! 서윤이는 내 곁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했어요. 내 곁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고요!”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자 고영훈이 울분을 토하며 심건모에게 소리쳤다.“넌 서윤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저 소유하고 싶을 뿐이지. 이기적인 자식아!”심건모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는 손이 마디마디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토록 주먹을 세게 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 순간, 응급실 안에서 송서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건모는 흐트러진 발걸음으로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고영훈 역시 특수경찰들을 밀쳐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으나 다시 제압당했다.고영훈은 다급하게 송서윤을 찾았다. 그리고 심건모가 송서윤을 꽉 껴안고 있는 모습과 마주했다. 그녀는 심건모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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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심건모는 송서윤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며 무심하게 대답했다.“간지러워.”송서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린 거 안 아파요. 그냥 좀 간지러울 뿐이지.”송서윤은 오히려 심건모를 위로하고 있었다. 심건모는 그녀가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기뻐해야 마땅했으나 그의 마음은 통증으로 가득 찼다. 만약 송서윤이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일으켰다면... 심건모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유를 구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송서윤은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니라 온전한 그녀 자신이었으니까.심건모의 손이 송서윤의 환자복 단추에 닿았다. 송서윤은 살짝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러 몸에 남은 상처들을 확인한 뒤 다시 정성스레 단추를 채웠다. 바지 역시 조심스레 벗겨 상태를 살피고는 다시 입혀주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정말 무섭지 않아?”송서윤은 심건모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이 대답했다.“네.”하지만 눈을 감으면 온통 뱀들의 형상뿐이었다. 한참을 참아내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이민호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나를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동생한테 그럴 수 있어요! 이윤영 말로는 이민호가 몇 번이나 강제로 시집보냈대요. 이씨 가문은 우리 엄마한테도 정말 못되게 굴었어요.”송서윤은 심건모의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심건모는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상처가 어디 있는지 알기에 그 부위를 피해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바짝 대고 말했다.“내가 뒤끝이 좀 길거든. 너 대신 다 기억해 둘게.”송서윤은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이민호를 고소할 거예요! 국장님이 내 편 들어줘야 해요! 감옥에 보내버릴 거예요! 나를 납치했으니까!”“그래, 그러자.”심건모는 울어서 엉망이 된 송서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의지가 그를 조금 놀라게 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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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이민호 역시 그것을 보았다. 음산하던 그의 얼굴이 마침내 공포로 일그러졌다. 송서윤이 느꼈을 법한 바로 그 지독한 공포였다.심건모가 가볍게 발을 들어 습격자의 손에 든 칫솔을 걷어찼다. 이민호는 기겁하며 피하려 했지만 칫솔은 그대로 이민호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이민호의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교도관들이 달려와 습격자를 제압했다.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이민호에게 심건모가 한 걸음 다가갔다. 길고 곧은 손으로 이민호의 어깨에 박힌 칫솔을 잡더니 가볍게 쑥 뽑아냈다.“내가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다행으로 알아요.” “한 번만 더 서윤이를 건드리면...”뒷말은 상처를 움켜쥔 이민호의 처절한 비명 속으로 사라졌다.습격자와 이민호가 끌려가고 심건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반대편에서 줄곧 그를 주시하던 강헌 앞으로 다가갔다. 피 묻은 칫솔이 강헌의 발치로 툭 떨어졌다.“내가 강 회장님을 또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강헌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으나 미처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회장님 사건은 아직 판결 전입니다. 계속 털어대면 회장님은 끝이에요.”심건모는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뒤편에서 강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민호는 내가 보살펴 주지.”심건모가 다가오자 교도소장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사죄했다.“심 국장님, 철저히 감시하겠습니다.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심건모는 교도소장의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고생이 많아요.”제훈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한 번 훑어보고는 심건모의 뒤를 따랐다. 제훈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심건모가 달라졌다. 평소의 그는 친밀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으나 오늘의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9년 동안 그를 보좌하며 늘 안개 속을 걷듯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의 진짜 모습 중 한 조각을 엿본 것만 같았다. 감히 직시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병원. 안소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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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나가주세요.”유영미는 비서가 허리를 굽혀 서류와 하드디스크를 줍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언제 이런 무례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손을 치켜들어 송서윤을 향해 휘둘렀다.“어른도 몰라보고! 네 에미가 없으니 외할머니인 내가 직접 가르쳐야겠구나.”이때, 이정희와 심여진이 안으로 들어섰다.이정희가 당황하며 외쳤다. “무슨 짓이세요?”송서윤이 유영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당신은 내 외할머니가 아니에요! 무슨 자격으로 나를 가르치려 들어요!”송서윤은 분노로 가득 찬 유영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송서윤의 눈동자에는 혐오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뿌리치자 유영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민호가 감히 어떻게 우리 새언니를 납치하고 뱀으로 겁을 줄 수가 있어요? 새언니는 심장병이 있다고요. 새언니가 심장마비라도 일으키길 바랐던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못됐어요!” 심여진이 목소리를 높였다.유영미의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서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너도 심장병이 있구나...”“그래요!” 심여진은 화가 나 쏘아붙였다. “이민호는 운 좋은 줄 아세요. 우리 새언니한테 별일 없었으니까.”“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우리 오빠가 이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아예 풍비박산을 냈겠죠.”이정희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서윤이는 우리 심씨 집안 며느리예요. 면목상 우리 두 집안은 사돈 관계이니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죠. 하지만 윤영이와 이민호는 정말 너무나 실망스럽네요.”이정희는 유영미의 비서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는 것을 보았다. 그중 주식 양도 합의서를 발견하고는 유영미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아차렸다.“법은 장난이 아니에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우리 심씨 가문도 아쉬울 것 없으니까요.”유영미는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향했다.이정희는 유영미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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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유영미는 슬픔을 억지로 눌러내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혜정이는 부모의 명을 어기고 도망쳤어. 불효녀의 딸 따위 난 아쉽지 않아.”이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병실로 들어갔다.유영미의 안경 너머 시선에는 짙은 어둠이 깔렸다.이혜정이 죽고 나서 그녀는 수십 년을 참아왔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이제 때가 되었다고 믿었는데...송서윤이 심장병까지 물려받았을 줄이야.이민호가 송서윤을 붙잡아 뱀으로 겁을 준 것은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해서 심건모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것이었다.유영미의 눈빛에 점차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가 비서에게 입을 열었다.“큰아들에게 전해. 난 최선을 다했다고.”“이산 그룹은 무너지지 않아.”“산속에 있는 연구 실험실을 포함해 모든 권한을 나에게 넘기라고 해.”“도련님께 여쭤보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유영미를 부축해 자리를 떴다....그때, 주희영과 고영은이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엄마, 아주머니도 계시는데 우리 정말 들어가서 서윤 언니 볼 거예요?” 고영은은 멍하니 서 있는 주희영을 부르며 물었다.주희영은 고영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일단 돌아가자.”“생각난 게 있어.”어리둥절해하는 고영은을 이끌고 주희영은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당장 아진시에 다녀와야겠어.”“아진시엔 왜요?”“일기장! 예전 네 혜정 이모가 나한테 일기장 한 권을 맡기면서 태워달라고 했었거든. 본인은 차마 손을 못 대겠다면서 말이야. 억울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했어. 하지만 서윤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난 태우지 않았어. 그러다 곧바로 혜정이가 세상을 떠났지.”“비보를 듣고 정신이 없어서 일기장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그리고 어떻게 열여덟 살에 이씨 가문에서 도망쳐 나왔을 수가 있어? 나를 찾아왔을 땐 분명 스물세 살이었는데.”“그후 혜정이는 아진시에서 부원시로 거처를 옮겼지.”“나한테 폐를 끼칠까 봐 겁난다고 했어. 위험한 사람들이 자기를 찾고 있다고 말이야!”“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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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송서윤의 기색을 살피던 이정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집안 가까운 친척들 모시고 식사하면서 홍보에 필요한 자료 좀 남기려는 거야.”“웨딩사진도 찍었고 집도 준비됐으니 번거로울 것도 없잖니.”“내 말이 맞지?” 송서윤은 자신의 손을 꽉 맞잡은 이정희의 손을 바라보았다. “국장님께 여쭤볼게요. 국장님만 괜찮다면 저도 상관없어요.”“저보다 국장님이 더 바쁘시니까요.”이정희는 미소 지었다. “그래. 둘이 이야기해 보고 답해주렴.”그녀는 안심시키듯 송서윤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밤이 깊었다.심여진은 고영훈을 데리고 향가옥으로 향했다.문을 들어서자마자 고영훈의 머리 위로 세숫대야가 씌워졌고 뒤이어 쇠숟가락으로 내리치는 댕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가 병원으로 돌아온 심건모는 병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곳은 국립 병원이라 병실이 부족해 1인실을 겨우 마련했지만 침대가 너무 좁았다.송서윤은 침대 위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턱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으며 얼굴이 들어 올려졌다. 서서히 다가오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심건모는 송서윤의 입술을 머금었다.심건모는 송서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 정성스럽게 입을 맞췄다.하지만 송서윤은 바빴다. 아주 많이.그녀는 짧게 화답하듯 입을 맞춘 뒤, 심건모의 어깨를 밀어내며 거리를 두었다. “지나친 욕망은 몸을 상하게 한다면서요.”어젯밤 심건모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심건모는 허탈한 듯 웃으며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송서윤은 미련 없이 다시 컴퓨터 속으로 빠져들었다.창가 쪽으로 걸어가 앉은 심건모는 테이블 위의 보온병을 발견했다. 그때 송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머님이 보내주신 보양식인데 전 도저히 못 마시겠어요. 국장님이 마실래요?”“알았어.”“어머님 말씀이 할머니께서 우리가 가까운 친척들만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길 원하신대요. 전 괜찮은 것 같은데.”“국장님 생각은요?”보온병을 만지작거리던 심건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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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송서윤은 당혹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눈으로 보온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머님이 직접 가져오신 거란 말이에요.”“당장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송서윤은 지체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밖을 향해 사람을 부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심건모의 품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뭐야?”송서윤은 귀가 너무 간지러워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녹용... 이에요.”“오. 녹용이라...”심건모의 숨결이 점차 뜨거워지더니 송서윤의 귀에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에 송서윤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원하면 말을 하면 되지 굳이 이럴 것까지는...” 심건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몸 아주 건강해.”송서윤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아니에요. 전 그런 게 아니라... 방금은...”송서윤은 정말이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오늘 그녀는 정말 바빴다!심건모는 놔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은 내 잘못이야.”“너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군.”심건모의 입술이 송서윤의 목과 어깨선을 따라 내려오자 그녀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뒤끝이 있다고! 어젯밤 송서윤이 심건모를 정신 못 차리게 괴롭혔더니 지금 똑같이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송서윤은 온몸이 뜨거워졌다. 손으로 심건모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 손마저 심건모에게 붙잡혔다. 심건모는 커다란 손으로 송서윤의 양 손목을 제압해 그녀의 등 뒤로 돌려 묶었다.심건모의 입술이 송서윤의 하얀 목덜미에 닿자 그녀는 견디기 힘든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송서윤은 나지막이 비명을 내뱉었다. “아파요.”“상처에 닿았단 말이에요.”하지만 돌아온 것은 심건모의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송서윤에게 밀착된 심건모의 가슴이 들썩이며 그녀의 심장을 가볍게 두드렸다.“정말로 닿았어?”심건모는 송서윤의 머리를 감싸 쥐고 그녀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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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송서윤이 갑자기 심건모의 품에서 떨어져 벌 일어나 앉는 바람에 하마터면 두 사람의 머리가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그녀는 곧바로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저 어린애 아니에요.”“그래. 아니지...” 심건모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심건모는 갑자기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송서윤을 다시 끌어안아 침대에 눕혔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쉬자.”송서윤은 심건모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저 열여섯 살 때, 국장님을 세 번째로 만나고 작별 인사를 했을 때... 왜 아는 척도 안 했어요?”“내가 그랬나?”“얼마나 서운했는데요.”그 때문에 서운했었다고?심건모는 송서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녀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엄마가 국장님을 따라가는 거 반대했을 때 화났었어요?”심건모가 송서윤에게 화를 낼 리가 있겠는가. 그는 단지, 한낱 어린아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자기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그때 심건모는 이미 스물한 살, 어엿한 성인이었다. 게다가 그가 살아온 세월과 경험은 또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런 그의 눈에 송서윤은 더욱 작고 여린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심건모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송서윤은 기분이 상한 듯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심건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송서윤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차 안에서 생각했어. 네가 만약 차 문을 열고 타기만 한다면 네 어머니의 뜻이 어떻든 널 데려가 버리겠다고.”사실 심건모는 송서윤을 더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만 더 보다가는 정말로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길 것만 같아서.송서윤을 위해 이혜정과 협상하고 고영훈을 상대하고... 하지만 그때의 심건모는 아직 세력을 다 갖추지 못했고 해결해야 할 일들도 너무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어떻게든 그녀를 데려와야 했다.송서윤은 얼굴을 돌려 심건모를 마주 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불장군이네요.”“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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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심건모가 도착했을 때, 별장은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이리안은 유아용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안 가득 밀어 넣으며 거실에 앉아 있는 고영훈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고영훈은 머리카락과 양복 어깨가 젖어 조금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시선만은 계속 이리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밖에서 심건모가 돌아올 때만 나는 특유의 소리가 들리자 이리안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더 빨리 퍼먹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심건모의 차가운 눈매가 나타났다.심건모는 별장 안으로 들어서며 심여진을 한 번 훑었다. 심여진은 겁에 질려 쥐 죽은 듯 조용해지며 시선을 피했다.심건모가 이리안에게 다가가자 아이는 심건모를 향해 작은 두 팔을 벌렸다. 심건모는 이리안을 품에 안아 올리고는 테이블 위의 물티슈를 뽑아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었다.“곧 잘 시간인데 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심건모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지만 육아 도우미를 슬쩍 쳐다보았다. 육아 도우미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리안이가 아이스크림이 꼭 필요하다고 해서요.”이리안은 끈적해진 작은 손으로 심건모의 얼굴을 감싸 쥐고 까만 눈동자로 그를 살피며 물었다. “아저씨가 정말 내 아빠 맞아요?”심건모는 고요한 눈빛으로 이리안을 마주 보았다.시작은 철저한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심건모는 송서윤에게 이리안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심건모는 점차 이리안에게 진심을 쏟게 되었다. 밤낮으로 아이의 곁을 지키며 사랑으로 키워냈다.이리안은 태어날 때 몸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서 꼬박 한 달을 보냈다. 이리안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마주한 것은 심건모의 시선이었고 이리안이 처음 본 세상도 심건모였다. 매일 신생아 중환자실 밖에서 이리안의 끈질긴 생명력을 지켜보며 그의 심장은 날이 갈수록 녹아내렸다.이리안은 단순한 카드가 아니었다. 이리안은 심건모의 딸이자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심건모는 이리안의 끈적한 손을 떼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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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아저씨는 하준 오빠 아빠잖아요!”“우리 엄마를 슬프게만 하는 사람이라고요.”“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예요. 우리 엄마를 기쁘게 해준단 말이에요!” 이리안의 앳된 목소리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심건모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심건모는 이리안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올라가서 씻어.”“네.”이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아 도우미의 품에 안겨 올라갔다.심건모는 심여진을 바라보았다. “네가 데려온 사람 데리고 나가.”“오빠...” 심여진의 말은 심건모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혀 입가에서 멈췄다.고영훈과 심건모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고영훈은 옆으로 내린 손을 꽉 쥐어 주먹을 만들었지만 그 주먹은 또 다른 아이의 작은 손에 붙잡혔다.고하준은 몹시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빠, 제발요... 제발 그냥 가세요.”고영훈은 고하준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그에게 반항하고, 딸은 그를 혐오한다. 그의 인생은 어쩌다 이토록 처참하게 실패한 것일까.모두 심건모 때문이다. 그만 없었어도... 송서윤은 절대로 고영훈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보살핌 아래 이리안을 낳았을 것이다. 아니, 송서윤은 이리안을 낳아서는 안 됐다.심건모는 고하준의 괴로운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고하준 앞에서 고영훈을 윽박지를 마음이 사라졌다. 심건모는 고하준에게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준아, 아저씨가 숙제 검사해 줄 테니 올라가자.”고하준은 고영훈의 손을 놓고 심건모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고영훈이 고하준의 손목을 낚아챘다.고하준은 고영훈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돌아보았다.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외침이울려퍼졌다. “아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내가 엄마를 서운하게만 하면 날 혼냈죠.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해줘야만 아빠한테 좋은 아들이었잖아요!”“고작 다섯 살이었던 나를 보육원에 던져놓고 3년 동안 아는 척도 안 했으면서.”“나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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