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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두 번째 여성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좀 있었다.서른을 훌쩍 넘긴 듯한 인상, 한 회사의 인사팀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사진 속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이었다.딱 봐도 성격이 순해 함께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사람 같았다.더 흥미로운 건 그 두 사람 모두 지금 UME와 협력 중인 회사 직원이라는 점이었다.뜻밖에도 묘한 인연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신지아는 원래 타인과의 합숙이나 합리적인 공동생활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었다.조용히 사는 걸 좋아하지만 필요하다면 타협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이번 제안은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았다.무엇보다 변도영은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였다.행여나 신지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알게 된다면 더 이상 함부로 찾아와 억지를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그런 결심이 서자 신지아는 중개인에게 연락을 넣었다.“그 집 한 번 보러 갈게요.”약속된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그 시각, 중개소 안에서는 중개인이 문자 알림을 확인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됐네요. 이제 이 정도면 거의 계약 확정이에요.”그는 억지웃음을 띠며 윤형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런데 형님, 두 여성 분 말입니다. 둘 다 연성시에서 이미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게다가 이력 보니까 최소 연봉이 억 단위라던데 그런 사람들이 진짜로 합숙을 하겠어요? 이거 들키면 바로 탈 나겠죠?”그 두 명의 프로필은 사실 윤형주가 급히 찾아오라고 시킨 임시 자료였다.그가 관리 중인 부유층 고객 리스트에서 아무 두 명을 골라서 가져온 것뿐이었다.“이미 집 있는 사람들을 합숙 명단으로 쓴다고요? 이건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잖아요.”윤형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당신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겁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반대로 만약 새어나가면 그건 당신이 흘린 거겠죠.”“아니요. 형님, 저는 절대...”“입 닥치시죠. 그리고 절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역겨우니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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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신지아, 너 도대체 아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신하나의 목소리가 사무실 로비에 울렸다.그녀의 눈가엔 이미 울었던 흔적이 가득했다.붉고 탁한 눈동자, 떨리는 손끝.신지아는 잠시 멈춰 섰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모른다고?”신하나가 이를 갈았다.“네가 아니면 누가 아빠를 설득했겠어! 그날 너랑 이야기한 뒤로, 아빠가 갑자기 나더러 시집가래! 그것도 더럽고 늙은 오 대표한테!”그제야 신지아는 무슨 일인지 눈치챘다.며칠 전 신씨 가문에서 신영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그녀는 그때 분명히 말했다.“저는 신씨 가문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이 있다면 차라리 막내딸을 고려하세요.”그땐 그저 단호히 선을 긋기 위한 말이었지만 신영호가 정말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줄은 몰랐다.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신씨 가문이 이번엔 꽤 벼랑 끝에 몰린 모양이었다.변도영도 진심으로 압박을 가하는 듯했고.신지아가 대답하지 않자 신하나는 더 확신했다.“봐! 역시 네가 한 짓이지?”그녀의 눈빛에는 억울함보다 분노가 더 많았다.예전 같았으면 아버지는 절대 자신을 그렇게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무엇을 잘못해도 늘 자신 편이었다.그렇지만 이번에는 신영호가 완강했다.엄마인 임문영이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이미 내린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신지아가 윤형우 씨랑 엮였으니까 아빠도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인 거야.’신하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 이내 분노가 치밀었다.“감히 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그녀는 더는 이성을 붙잡지 못한 듯 신지아에게 성큼 다가왔다.신지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났다.신하나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뭐지?’신지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늘 오만하고 잘못을 인정할 줄 몰랐던 신하나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내 주변에서 놀란 시선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신지아는 재빨리 몸을 숙여 그녀를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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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신지아, 너 진짜 이렇게 냉랭하게 나올 거야?”신하나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까웠다.“내가 오 대표한테 시집가면 그 사람은 결국 네 형부가 되는 거야. 그게 소문이라도 나면 네 얼굴도 깎이는 거 몰라?”그건 어머니 임문영이 늘 가르쳐온 방식이었다.상대가 듣고 움직이게 하려면 그 사람의 이익부터 건드리라는 것.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금 신하나가 떠올릴 수 있는 ‘이익’이란 게 이것뿐이었다.실은 그녀도 안다.신지아는 이미 신씨 가문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니 자신이 오 대표에게 시집가든 말든 그녀에게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그래도 지금 매달릴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신지아는 그런 말을 들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한테 그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니?”말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냉정했다.그러나 신하나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신지아는 도망칠 수도, 뿌리칠 수도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여 신하나를 내려다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알겠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러니까 일단 일어나.”“진짜?”신하나가 눈을 반짝였다.“거짓말 아니지?”“응.”짧은 대답이었지만 확실했다.신지아는 오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그의 더럽고 잔혹한 취향도,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습성도.신하나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런 남자에게 평생을 묶여 사는 걸 그냥 두고 보기는 힘들었다.만약 오늘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모른 척하기로 했었다.하지만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흘리며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리는 모습에 신지아는 결국 마음을 돌렸다.주변의 시선이 점점 많아지는 걸 느끼며 그녀는 신하나를 부축해 차 안으로 데려갔다.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신하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언니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지금 바로 얘기해요!”그녀는 신영호에게 전화를 걸더니 연결되자마자 핸드폰을 신지아 손에 쥐여줬다.“무슨 일이야, 하나야?”“저예요.”짧은 대답에 방금 전까지 부드럽던 신영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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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아빠, 전 싫어요.”신영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하나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임문영의 떨리는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여보, 하나 결혼은 아무래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신씨 가문도 중요하지만 하나도 당신의 딸이에요. 하나 인생도 똑같이 중요하잖아요.”신영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묵직한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그때 임문영의 목소리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지아야.”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예전에 내가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건 사실이야. 그래도 하나는 네 동생이잖니. 이번 한 번만... 하나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윤씨 가문... 아니, 그쪽 가문에서 도와주면 신씨 가문도 살 수 있을 거야. 지아야, 네가 윤형우 씨에게 부탁 좀 해줘. 제발 부탁이야,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신씨 가문은 평생 고맙게 여길 거야.”그 간절한 말에서 신지아는 임문영이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신하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느꼈다.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감춰진 미묘한 ‘냄새’도 놓치지 않았다.“그건 윤씨 가문에서도 못 도와줄 것같아요.”신지아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신영호가 신하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신지아였다.만약 윤씨 가문의 도움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그는 결코 신하나를 희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신영호가 지금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윤씨 가문도, 윤형우도 손을 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즉, 이번 일의 뒤엔 변도영이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찰나 신영호의 낮고 무거운 한숨이 들려왔다.“하나를 오 대표에게 시집보내는 건... 변 대표님의 요구다.”임문영의 목소리가 즉시 높아졌다“만약 그게 변 대표님 일이라면 더 쉬운 거잖아요! 지아가 직접 가서 부탁하면 되지 않아요? 두 사람 그렇게 오래 사귄 사이였는데 지아가 말하면 분명 들어줄 거예요.”“부탁?”신영호의 웃음은 냉소에 가까웠다.“그게 통할 거면 내가 진즉에 시켰겠지.”지난번 일로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신지아와 윤형우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변도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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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변도영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변하늘은 걱정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로 다가섰다.“오빠.”그제야 변도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같이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며 아득한 현실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야? 나은 언니랑 무슨 일 있었던 거지?”변도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묵묵히 앉아 있었다.변하늘은 답답한 마음에 죽 그릇을 들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이번엔 그도 죽을 받았다.따뜻한 흰죽 위에 송송 썬 파가 조금 흩뿌려져 있었다.향은 은은했고 보기에도 깔끔했지만 변도영의 입맛은 전혀 돌지 않았다.입속이 텁텁하고 가슴 한가운데가 비어 있는 느낌.어디서부터인지 모를 허무함이 변도영의 마음을 짓눌렀다.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신지아가 떠올랐다.예전엔 그가 아플 때마다 그녀가 약을 챙겨주고 직접 죽을 끓여 오곤 했다.그리고 변도영의 곁엔 언제나 신지아의 따뜻한 손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없었다.몸이 아픈 건 둘째고 이상하게 마음까지 병든 기분이었다.변도영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변하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따지듯 물었다.“혹시 신지아 씨가 오빠랑 나은 언니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꾸민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어젯밤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부터 이나은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그리고 변도영이 깨어난 이후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사이의 공기가 너무도 미묘했다.둘 사이에 분명 뭔가 있었다.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지아였다.어젯밤의 신지아도 이상했다.예전 같으면 변도영이 아프다는 말에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을 텐데 이번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제 두 사람 정말 완전히 끝난 걸까?’변하늘은 믿을 수 없었다.“신지아는 병원엔 한 번도 안 왔어요?”변도영이 낮게 물었다.질문처럼 들렸지만 그의 목소리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그러자 변하늘이 씩씩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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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신하나는 병원 현관 앞에서 막혀버렸다.보디가드들이 벽처럼 늘어서 있었고 변도영이 면회를 거절했다는 말만 전했다.그 한마디에 신하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제발... 잠깐만요.”신하나는 거의 울먹이듯 애원했다.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고 속눈썹에는 빗방울처럼 맺힌 눈물이 반짝였다.그러나 보디가드들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그녀가 아무리 사정해도 심지어 마지막엔 죽어버리겠다며 협박했지만 그 누구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절망한 신하나는 결국 마지막 카드로 신지아의 이름을 꺼냈다.“신지아가 오면 그때는 들여보내 주시겠죠?”그 말에 보디가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신하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본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돌아가시죠. 변 대표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면 절대 면회 허락하지 말라고.”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신하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막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입력창에 이름을 눌렀다.신지아.[제발 좀 도와줘. 대표님께 말 한마디만 해줘. 잠깐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신하나는 문자 한 통을 더 보냈다.[신지아, 제발... 네가 안 도와주면 내일 네 앞에서 무릎 꿇고 울 거야. 울다가 죽을 때까지.]그 시각, 신지아는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새로 임대하기로 한 빌라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스산한 초겨울 바람 속에서도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이윽고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화면에 신하나의 이름이 떴다.그녀는 잠시 망설였다.솔직히 귀찮았다.하지만 내일 UME 쪽 미팅 일정이 빡빡했고 이 일로 더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다.그냥 한 통 걸면 끝날 일이었다.신지아는 천천히 변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전화는 바로 끊겼고 두 번째는 신호음만 돌아왔다.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개인이 그녀를 흘끔 봤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신지아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짧은 문자 한 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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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변도영이 눈을 떴을 때, 이나은이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팔꿈치를 침상에 괴고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조용히 들썩이는 어깨,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얼마나 피곤했을까?’변도영은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묘하게 복잡한 감정이 가슴 속을 휘감았다.그토록 오랜 시간에 그는 신지아가 자신과 이나은 사이를 망쳤다고 믿었다.그녀 때문에 이나은이 상처받고 멀리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그래서 그는 늘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그 죄책감은 사랑과는 달랐다.변도영은 한 번도 신지아를 버리고 이나은에게 돌아가야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그날 밤 신지아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제는 희미했다.다만 한 가지, 그는 도망치듯 그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남자로서 그럴 수 없었다.변도영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나은의 머리를 받쳐 베개에 올려주었다.조금이라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 순간 이나은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도영아, 깼어?”그녀는 시계를 힐끗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약 먹을 시간이네. 잠깐만, 내가 가져올게.”이나은이 일어서려고 몸을 일으키자 변도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요 며칠 고생 많았어.”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그런 말은 왜 해? 우리 사이에.”이나은은 부드럽게 웃었다.“이런 일로 예의 차릴 사이 아니잖아.”변도영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날 그 일에 대해서는...”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고 ‘책임진다’는 단어가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그는 몰랐다.무엇이 책임인지, 어떻게 져야 하는지.다른 여자였다면 변도영은 이미 냉정하게 정리했을 것이다.약을 먹게 하고 돈을 쥐여주며 모든 걸 한순간에 끝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건 이나은이었다.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그때 이나은이 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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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변도영의 머릿속에 신지아가 빗속에서 젖은 채 서 있던 모습이 번쩍 떠올랐다.옷이 몸에 달라붙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겨 붙은 채 그가 있는 병원을 올려다보던 그 모습.가슴 한편이 괜히 불편해졌다.“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변도영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기에 보디가드는 당황해 허둥대며 대답했다.“대표님, 몇 번이나 몰래 병원 안으로 들어오려고 해서요. 대표님이 만나기 싫어하시는 줄 알고 막은 겁니다. 그냥 비를 맞게 두면 빨리 돌아갈 줄 알았어요.”그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선을 끊은 뒤, 그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신지아가 보냈던 짧은 메시지를 보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네 시간이 지나 있었다.‘정말 네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렸단 말인가? 정말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걱정돼서?’변도영은 문득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가슴속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 입가엔 자기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걸렸다.‘그래.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닐지도 몰라.’하지만 그는 전화를 걸지 않고 그 대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사랑의 밀고 당기기도, 사업의 협상도 결국은 비슷했다.너무 다가가면 밀려나기 마련이니 때로는 거리를 두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그는 다시 스스로를 다잡았다.‘절대 여자의 감정에 끌려다니면 안 돼. 게다가 그 여자가 신지아이면 더더욱.’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이어졌다.그러다 이내 쏟아지던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그 시각, 신지아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유리창에 잔잔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발신자는 고우빈.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요즘은 어때?”평소처럼 차분한 고우빈의 목소리에 신지아는 회사의 근황을 간단히 이야기했다.UME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최근 시장 반응이 어떤지, 그리고 그 속에서 부딪히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까지.“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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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신지아는 문득 윤재혁을 떠올렸다.그녀가 고용한 사설탐정이 추적한 결과 고이진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과 고씨 가문에서 그 귀걸이를 찾아낸 장소가 불과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윤재혁은 이미 그 현장으로 향했고 고우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이 말은 곧, 두 사람이 마주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설마 윤재혁 씨가 선배를 협박했나?’신지아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자신과 고우빈의 협력 관계는 조금만 조사해도 다 드러나는 일이다.그가 자신을 빌미로 고우빈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신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더 생각할 새도 없이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화면에는 윤형우의 이름이 떴다.“여보세요?”“지아야.”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나른하고 어딘가 억울해 보였다.“요즘 너 너무 냉정한 거 알아?”신지아는 멈칫했다.“제가요?”“응. 세상에 남자 친구를 이렇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그는 가슴을 누르며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다른 사람들은 전화하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너무 그립다는 말부터 하는데 너는... 딱 업무 보고하듯이 말하잖아.”신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사실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예전엔 변도영을 좋아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결혼이라는 형식상 떠밀려 간 관계였고 그와의 결혼 생활은 사랑이 아니라 긴 침묵과 냉정한 무관심으로 채워졌었다.그래서 연애다운 연애가 어떤 건지 신지아는 전혀 몰랐다.윤형우와의 관계도 감정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그저 필요와 이익, 그리고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합의에 가까웠다.하지만 이미 연인이라 부르는 관계에 들어선 이상 그가 원한다면 그 정도는 맞춰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저는...”신지아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그 말을 되돌렸다.“그런데... 형우 씨도 저한테 보고 싶다는 말 안 하잖아요.”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났다.윤형우의 특유의 낮고 여유로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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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윤형우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태연하게 휴대폰을 빼앗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그냥 심심해서 본 거야.”“심심해서?”윤해원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그런 말을 누가 믿어?’그녀는 아까 복도를 지나가다가 윤형우가 방 안에서 전화를 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럽고 낮게 깔려 있었기에 상대가 누군지는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신지아.“너 이번엔 진심이야?”사실 질문이었지만 말투는 확신에 가까웠다.윤형우는 윤해원의 친동생이었다.그의 눈빛, 숨소리,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도 윤해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윤형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동생의 ‘고백’에 윤해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처음엔 그냥 장난인 줄 알았다.새 여자 친구라며 떠벌리고 몇 달 만에 헤어지는 평소 습관처럼 이번에도 금방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윤형우의 눈빛이 달랐다.그는 지금 완전히 신지아라는 여자에게 빠져있었다.윤해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한편으론 대비가 되어 있었다.윤형우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신지아와의 관계를 공개했을 때부터 이미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걸 예감했으니까.윤해원도 신지아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치밀하고, 머리가 빠르고, 변도영을 5년 동안 옆에 두었던 여자.그건 우연으로는 불가능했다.윤형우가 아무리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해도 이번엔 상대가 달랐다.그가 진심을 주면 줄수록 결국 상처 입는 건 윤형우일지도 모른다.“그래서...”윤해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신지아 씨랑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그 순간, 윤형우의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그 침묵 하나로 윤해원은 어느 정도 안심했다.‘다행이다. 결혼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솔직히 윤씨 가문에서 신지아 같은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지금은 그냥 젊은 날의 열정이라 치더라도 결국 몇 년 후 윤형우가 정해진 혼인을 받아들여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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