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Kapitel 271 – Kapitel 280

392 Kapitel

제271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하던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면을 끓이는 것뿐이었다.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연희는 침실로 들어가 책을 보고 있었다.권지헌이 냉장고 문에 기대었다.수천만 원짜리 짙은 검은색 거울로 된 냉장고가 배경이 되어 주었다.권지헌이 입고 왔던 코트는 소파에 올려져 있었다. 권지헌의 시선은 내내 허설아에게 머물렀다.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뒤로 매듭을 짓자 원피스 허리라인이 잡혀 날씬하고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머리카락은 귀 뒤로 대충 넘겼는데 새까만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얀 피부 위로 흘러내려 극과 극의 대비를 이뤘다.불꽃이 냄비 바닥을 달구고 레인지 후드 소리가 낮게 울렸다. 부엌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그것뿐이었다.한 손으로 달걀을 깨는 솜씨까지 요리하는 허설아의 손놀림이 능숙했다.권지헌이 다가가 허설아 손에 있던 달걀 껍데기를 받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허설아 손가락에 묻은 흰자를 휴지로 닦아주었다. 권지헌은 그대로 뒤에 밀착하며 허설아를 꼭 안았다.막 면을 넣으려던 허설아가 굳어버렸다."뭐 하는 거예요?""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어?"잠시 굳어 있던 허설아는 젓가락으로 냄비 속 면을 저으며 팔팔 끓어오르는 면수를 멍하니 내려다봤다.그러다 별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어머님이 10억 줄 테니까 권지헌 씨와 깔끔하게 끝내라고 하셨어요."찡그려졌던 권지헌의 미간이 금방 펴졌다. 권지헌은 엄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권지헌이 허설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짧게 답했다."그래? 그럼 세금은 냈냐고 물어봤어?""아니요, 다음에 물어볼게요."불을 끄고 면을 건지려는데 권지헌이 등 뒤에 여전히 딱 붙어 있었다.허설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권지헌 씨, 손 놔요.""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먼저 말해줘.""직접 엄마한테 가서 물어봐요."권지헌의 낮은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넓은 손이 허설아의 납작한 배 위에 올라왔다.손바닥의 뜨거운 온기가 전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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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저녁, 병원에서.권지헌이 도착했을 때 박희수는 막 잠에서 깨어 있었다.권정우가 푹 끓인 미음을 떠서 박희수 입에 한 숟가락씩 먹여주고 있었다.권지헌이 들어오자 박희수는 아들이 밥은 먹었는지 걱정부터 했다.또 야근했을 테니 따뜻한 밥을 제대로 먹었을 리 없었다.권지헌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먹었어요."권정우는 머릿속이 복잡했던 차에 권지헌을 보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허설아 씨와는 어떻게 된 거야?""제가 쫓아다니고 있는데 아직 성공 못 했어요. 방금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권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네가 예비 후보 신세야?""후보라도 괜찮죠, 언제든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요."권정우가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권정우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권지헌을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비 놀리는 거야?"권지헌이 차분하게 말했다."허설아는 대학 때 제 여자친구였어요. 당시에 오해가 많이 쌓여서 저를 차버렸고요."전 여자친구?권정우는 처음 듣는 얘기에 금세 관심이 생겼다."얼마나 큰 오해였는데?""제가 가난한 줄 알고 계속 저한테 돈을 썼고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권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숨긴 것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예요."권정우와 박희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박희수는 여러 이유를 짐작해 봤었다.권지헌이 다른 여자와 얽혀서 허설아가 뭔가 오해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오후에 그런 말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권지헌은 한 사람을 좋아하면 끝까지 간다는 걸 허설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권정우가 뭔가 말하려다 망설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나도 그랬어. 권씨 집안 자손들이 다 그렇게 겪어왔지 뭐. 나와 네 엄마도 대학 때 만났잖아."박희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당신은 나와 사귄 지 한 달 만에 털어놨잖아. 그때 진짜 상상도 못 했어, 내 남자친구가 재벌집 아들이었다니."박희수 집안도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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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권정우는 잠시 망설여졌다.어쨌든 권씨 집안 첫 손주였다.연희의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다 허설아가 공들여 키운 덕이라는 걸 권정우도 알고 있었다.권정우는 마음이 간질간질했다."그래도 아이를 모른 척할 순 없잖아?"박희수가 차분하게 말했다."당연하지, 우리 권씨 집안이 연희에게 줄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줘야 해. 그리고 지헌아, 너도 알아야 해. 나는 연희를 진심으로 너무 좋아, 그러니 사생아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연희를 호적에 올리고 싶었다.당당한 권씨 집안 아이로 말이다.권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세 사람이 문을 닫고 얘기를 마무리하자마자 권서진이 휠체어에 앉은 권호성을 밀며 들어왔다.같은 병원에 교통 사고로 입원 중인 박희수 소식을 듣고 들른 것이었다.권지헌을 보자 권호성이 코웃음을 쳤다."얼굴을 통 보기 힘들더니 네 엄마 병실에 있었구나."말투에 묘하게 삐친 기색이 역력했다.박희수는 방금 손녀가 얻은 기쁨에 권호성과 실랑이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권호성이 입을 열자마자 권지헌에게 또 맞선을 보라고 했다."송원영이 마음에 안 들면 오씨 집안 딸도 괜찮아. 날짜는 내가 이미 잡아뒀으니 주말에 밥이나 먹어."이번엔 권지헌 가족 셋이 동시에 권호성을 싸늘하게 바라봤다.박희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님,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저 하나 망쳐놓은 걸로 부족해서 이제 내 아들까지 건드려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지헌이가 누구랑 결혼하는지는 지헌이가 정해요. 그 아가씨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아버님이 장가가세요!"권호성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버럭 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본새냐? 권씨 집안이 언제부터 여자가 나서서 집안일을 좌지우지했어?"박희수가 콧방귀를 뀌었다."여자를 무시하시는 아버님도 여자한테서 태어나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능력 있으시면 남자 엉덩이를 비집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은혜를 모르시는 것도 정도껏 해야죠!""아버님, 제 이름으로 된 요양원이 하나 있는데 환경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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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다음 날 출근한 허설아는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머리도 지끈거리고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고 어지럼증도 심했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었다.저혈당인가 싶어서 따뜻한 물을 반 컵 마시고 사탕 몇 개를 먹으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허민정에게 전화를 걸고 연희 어린이집에 연결되어 있는 휴대폰 속 CCTV도 확인해 봤다.별일 없는 것 같았다.허설아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이런 느낌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건 연동근이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 가던 날이었다.업무 인수인계 서류를 마저 정리하고 허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파일을 들고 총괄 이사 사무실로 향했다.권서진은 흔쾌히 서명하고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허설아의 업무 이력을 고려해 자진 퇴사에는 보기 힘든 두둑한 위로금이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한 줄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그동안 수고하셨어요. 권율 그룹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다시 함께 일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권율 그룹은 직원 복지만큼은 늘 잘해왔다.허설아도 비로소 떠나는 게 실감이 났다.권서진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오해가 좀 있었지만 다시 마주쳤을 때는 성인들끼리의 체면만 남아 있었다.허설아가 시선을 살짝 내리며 웃었다."솔직히 말하면 다시 돌아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권서진이 턱을 괴고 허설아를 바라봤다.사실 권지헌한테서 국제전화를 받았을 때 권서진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하는 큰일이 난 줄 알았다.설마 오빠가 사랑에 빠진 것 때문에 전화를 했을 줄이야.권지헌 같은 사람이 사랑 때문에 쩔쩔맨다는 걸 다 듣고 나서는 잠이 확 깰 정도로 놀랐다.오빠가 여자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왔다는 말에도 의아했다.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오빠가 예외를 뒀을까 싶었다.직접 허설아를 보고 난 뒤 권서진도 감탄했다.허설아는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차갑고 고요한 분위기에 자꾸 더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예쁜 여자야 권서진도 많이 봤었다.하지만 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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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허설아의 손이 멈칫했다.티슈를 쥔 채 모니터 화면을 세게 닦은 탓에 얇은 모니터가 살짝 흔들렸다.그날 밤, 송원영이 자신과 권지헌이 같이 있는 걸 봤다는 걸까?그때 권지헌은 계속 허설아를 안고 있었다.송원영이 얼굴까지는 못 봤을 것이다.왠지 그날 밤 권지헌과 불륜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송원영이 못 봤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긴장이 됐다.사무실을 나오는데 눈꺼풀이 계속 파르르 떨렸다.아까부터 들던 불길한 예감이 또 들기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던 순간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연희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손이 살짝 떨렸다.전화를 받자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연희 어머니, 연희가 없어졌어요!"허설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짚고서야 간신히 버틸 수 있었고 온몸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허설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선생님, 차근차근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에요?""아까 연희가 다른 반에 오빠 보러 간다고 했어요. 두 아이가 같이 그네 타는 걸 보고 물 컵 가지러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애들이 보이질 않아요.""안수영과 같이 있었어요? 수영이는요?"선생님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수영이도 사라졌어요. 연희 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요. 저희 쪽에서도 지금 CCTV 확인 중이니 혹시 다른 분이 아이들을 데려간 건 아닌지 연락해 보세요.""네."허설아 목소리가 떨렸다.속으로는 짐작할 수 있었다.누군가 연희와 수영이는 데려간 것이다.어린이집은 규정이 엄격해서 선생님이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데리러 오면 신원 확인을 몇 번씩 하는 곳이었다.선생님과 부모 모두 모르게 아이가 사라질 일은 없었다. 허설아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냉정해지려 했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떨리고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택시를 잡으러 뛰어가면서 안지혜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차에 타서야 통화가 연결되었다. 안지혜도 방금 두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며 또 연중근 부부의 짓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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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카페 앞.허설아는 태연하게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현서를 한눈에 발견했다. 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카페 안으로 들어간 허설아는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는 현서를 마주하자마자 테이블 위 커피잔을 들어 얼굴에 끼얹었다!"연희랑 수영이 어딨어?"현서는 당황하지도 않았다.천천히 티슈를 뽑아 얼굴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느긋하게 말했다."뭘 그렇게 서둘러, 애들은 근처 호텔에 있어. 우리 부모님이 보고 있으니까 괜찮아.""너 마시라고 시킨 커피인데 아깝게."현서가 배를 어루만지며 승자만의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임산부는 커피 못 마시잖아, 특별히 너 주려고 시킨 거야. 내가 요구한 돈은?"허설아는 눈앞에 있는 현서가 왠지 처음 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만날 때마다 현서는 허설아가 생각하는 상식선을 부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돈을 요구한다는 말에 허설아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경찰에게 연락해 근처 호텔에서 연희와 안수영을 찾아야 했다. 다만 이미 신고했다는 걸 현서가 눈치채게 하면 안 되었다.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돈을 받기 전까지는 현서도 두 아이한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그때 허설아의 휴대폰이 울렸다.현서가 경고했다."신고하면 네 딸 지금 당장 네 아빠한테 보내버린다.""엄마 전화야. 안 받으면 엄마가 걱정해서 오히려 신고할 거야."현서가 눈을 흘기며 허설아는 여전히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권지헌이었다.전화를 받은 허설아가 침착하게 말했다."여보세요, 엄마. 나 연희 데리러 왔어요. 밖에서 저녁 먹고 좀 늦을 것 같아요."권지헌도 처음엔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를 눈치챈 듯 맞장구를 쳤다."뭐 먹어?""아, 파인애플번은 못 사가요. 엄마 심장 수술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빵 그만 먹어요. 됐어요, 끊을게요."허설아는 짜증난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서는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테이블 아래 놓은 허설아의 손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권지헌이 알아들었는지 허설아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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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현서가 코웃음을 쳤다.허설아의 가장 큰 약점은 정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아비도 모를 딸 하나 때문에 목숨까지 걸다니.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했다.카페를 나서는 순간.풀숲 어딘가에서 갑자기 누군가 날아와 만삭인 현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뒤에서 여자의 비명이 터졌다.허설아가 돌아보니 한 여자가 현서 위에 올라탄 채 임산부인 것도 아랑곳없이 뺨을 연거푸 수십 번 갈겨댔는데 너무 처참한 광경이었다.김지유였다."설아 언니, 빨리 연희 찾으러 가요!""지유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김지유는 현서 목을 움켜쥔 채 현서 손톱이 팔뚝을 마구 할퀴어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고개를 든 김지유는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최대한 미소를 쥐어짜내며 허설아에게 말했다. "현서랑 오랜만에 회포 좀 풀려고요. 설아 언니, 나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해요."아니면 허설아도 목격자가 되어 엮이게 될 것이다."설아 언니, 빨리 가요. 연희 건영 호텔 5층에 있어요."김지유 눈에는 죽어도 좋다는 듯 서슬이 퍼렇게 선 결의가 담겨 있었다.오랫동안 현서 뒤를 밟은 이유는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허설아와 권지헌과의 청춘의 추억을 이미 끝났지만 현서와의 추억은 이제 시작이었다.-허설아가 비틀거리며 달렸다.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지만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설아는 계단으로 돌진해 5층까지 뛰어갔다.너무 빨리 달린 탓에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복도 바닥은 온통 피로 가득했다. 심장이 순간 미친 듯이 뛰었다.'연희야, 우리 연희.'피가 흐른 방향으로 달려가자 열려 있는 문이 하나 보였다.권지헌이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다. 등에는 칼자국이 가득했고 품속에는 잠든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멈추는 것 같았다.등줄기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눈앞의 처참한 광경에 허설아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권지헌과 두 아이를 더듬었다.손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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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수술실 불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기다리던 박희수는 허설아가 올라오는 걸 보고 손짓했다.허설아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급히 핸드폰으로 타이핑해서 박희수에게 보여줬다.박희수가 손을 토닥이며 달랬다."최고 의료팀이니 믿어봐요, 지헌이도 믿고. 설아 씨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요. 의사도 목소리는 감정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했어요."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데다 허설아도 허민정처럼 심장이 좀 약한 편이었다.극도의 공포와 충격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었다.박희수가 허설아 손을 꼭 잡았다."연희를 지키는 건 지헌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 자책하지 마요, 네? 내 말 들어요."박희수는 말하면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권지헌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부처님한테 제대로 인사를 올려야겠다 싶었다.가족들과 연이 있는 부처를 모셔 제대로 정성을 올려야 할 것 같았다.온 집안이 요즘 대체 무슨 일인지.노인부터 장년에 아이들까지 연달아 사고가 나다니.이제 3대가 병원 각 층에 입원해 있는 꼴이었다.팀 모임도 아니고 병원에 단체로 입원하는 건 본 적도 없었다. 오후에 연희 납치 소식을 들었을 때 박희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권지헌과 허설아까지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연희와 수영이는 소량의 수면제를 먹은 상태였지만 당장은 큰 지장이 없었다.그래도 혹시나 후유증이 생길까 봐 정밀 검사 예약까지 다 해두었다. 현재까지 나온 검사 결과는 다 좋았다.권지헌이 두 아이를 잘 지켰던 것이다. 허설아가 먼저 응급실에서 나왔지만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진단을 들은 박희수와 허민정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통곡하다가도 허설아 앞에서는 꾹 참고 버텼다.수술실 앞에서 박희수와 한참 기다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드디어 수술실 불이 꺼졌다.의사가 나와 박희수를 바라봤다."사모님, 권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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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의사가 들어왔다."마취가 거의 풀릴 때가 됐으니 곧 깨어나실 거예요. 내일 아침이 돼야 식사랑 물 드실 수 있으니 그때까지 몇 시간은 참으셔야 해요."허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나가자마자 권지헌이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 위 조명에 눈이 부셨는지 바로 다시 감았다.허설아가 손으로 눈을 살짝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내며 빛에 적응할 시간을 줬다.권지헌이 눈을 깜빡이자 짙은 속눈썹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눈을 오래 감고 있었던 탓인지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허설아가 면봉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줬다.권지헌이 허설아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너랑 연희, 둘 다 괜찮아?"허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선이 권지헌 얼굴에 머물렀다.말을 하지 않아도 권지헌은 허설아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서진이 말로는 전화 한 통 받더니 허겁지겁 뛰쳐나갔다던데, 휴가 신청도 안 하고. 오늘까지는 출근해야 하는 거 잊었어?""전화했을 때 네가 한 말, 내가 못 알아들을 리 없잖아."연희 데리러 갔다는 말에 권지헌은 바로 연희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주변 CCTV를 확인했더니 누군가 두 아이를 데리고 호텔로 들어가는 게 찍혀 있었다.마침 권지헌이 조금 투자했던 호텔이라 바로 내부 CCTV를 확인해 현서 부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방을 확인했다.손을 뻗어 허설아 손을 잡고 싶었지만 손가락 전체에 의료 기기가 달려 있어 빈자리가 없었다.권지헌이 눈을 감으며 가볍게 웃었다."다행이야, 내가 제때 도착해서."허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권지헌이 눈을 감은 틈에 급히 손등으로 닦아냈다.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손등으로 몇 번을 더 닦았지만 소용이 없었다.의사가 더 울면 과호흡으로 알칼리 중독이 올 수 있다고 했다.허설아는 겨우 참으며 핸드폰을 꺼내 타이핑해서 권지헌에게 보여줬다.'권지헌 씨, 나 목소리가 안 나와요.'권지헌은 처음엔 의아한 표정이었다. 계속 말이 없기에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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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화면에 적힌 글자를 본 권지헌은 화면이 꺼질 때까지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심지어 이미 죽어서 꿈속 모습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환상일까?한 글자 한 글자 다 아는 글자인데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허설아가 결혼하자고 했다.권지헌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다가 산소 마스크를 건드리며 목 근육이 같이 당겨졌다.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허설아가 손을 뻗어 마스크를 고정해 줬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 속에서 탐색과 불확실함, 그리고 촉촉한 눈빛을 발견했다.허설아가 손가락으로 권지헌 눈가를 어루만지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줬다.사람의 체온은 36도밖에 안 된다는데 눈물의 온도에 피부가 데일 것 같았다.뜨겁게 이글거렸다. 허설아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결혼해요, 권지헌 씨.'지난 과거는 완전히 내려놓고 싶었다.하지만 지나온 모든 것들은 그림자처럼 언제가 허설아를 따라다녔다. 빛 속에 서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그림자는 늘 뒤에 있었다.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상처투성이였던 시간도, 서로 숨결을 맞대던 순간들도 전부 지나간 일이었다. 허설아는 여전히 권지헌이 좋았다.만약 자기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두 번 다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기를 바랐다.오늘 오후에야 허설아는 박희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물속에 잠겨 숨마저 빼앗기는 순간에도 생명은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 순간 머릿속은 냉정해진다고 했다. 박희수는 권지헌이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허설아는 또 내기에서 지더라도 최소한 권지헌이 연희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여자는 어찌나 허약하고 창백한지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권지헌은 허설아가 관계를 정리하러 온 줄 알았다.지금 이 모든 게 사후 세계의 모습이라 해도 권지헌은 상관없었다.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내일 당장 혼인신고 하러 가자."허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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