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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1화

황제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방자하구나! 네가 감히 짐의 명을 거역하려 드느냐?”육황자가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오만한 눈빛을 드러냈다.“부황께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것은 저희 형제들 중 누가 태자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사실이 증명하듯, 제가 그들 모두보다 뛰어납니다.”“그러니 부디 고준형의 목숨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공을 세움과 동시에 위엄을 세우고, 순리대로 제가 태자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네가 태자가 되고 싶단 말이냐?!” 황제는 그의 말에 적잖이 경악한 듯했다.육황자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부황, 다른 이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 중 누가 저와 감히 다툴 수 있겠습니까?”“둘째 형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출신이 미천한 데다 매사에 우유부단하여, 만약 그가 태자가 된다면 양나라는 분명 전쟁에서 패할 것입니다. 땅을 내어주라 하면 내어주고, 조공을 바치라 하면 바치겠지요!”“셋째 형님이 학식이 풍부하고 약리에 정통하다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어리석은 효심에 얽매여 감히 선을 넘지 못하고 태자 자리조차 꿈꾸지 못하는데, 어찌 황위와 천하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황제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육황자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천하라고?”육황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습니다, 천하입니다! 부황께서는 줄곧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중원을 통일하고자 하셨습니다. 부황께서 원하시는 태자는 그저 조상의 기업만 지키려 들거나, 심지어 그 기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놈이 아닐 것입니다. 넷째 형님은 용맹하여 전투에 능하다 하나, 단지 용맹하기만 할 뿐 모략이 없지요.”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응시했다.“설령 그 아이들이 부족하다 해도, 네 차례는 오지 않는다.”육황자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부황,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성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만약 짐이 주지 않는다면 어쩔 테냐.”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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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궁인이 대답했다. “황자 전하께 아룁니다. 저 자가 바로 설림입니다. 듣자 하니 그가 침을 한 번 놓자마자 폐하께서 깨어나셨고, 태후 마마께서 그에게 큰 상을 내리려 하신다 합니다!”육황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 신의라,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군.”저 설림만 아니었다면, 오늘 당장 고준형의 목을 쳐서 후환을 영영 없앨 수 있었을 텐데!황궁 밖.충용 후작부.고 부인은 고준형이 하마터면 참수형에 처해질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 혼비백산했다.“국씨,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준형이는 정말 무사한 건가?”그녀는 국씨 어멈의 손을 붙잡고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국씨 어멈이 위로했다. “마님, 안심하십시오. 다 괜찮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깨어나시어 세자를 친히 심문하시겠다 하셨으니, 세자께서 잘못한 일이 없다면 분명 풀려나실 겁니다.”고 부인은 그 말을 듣고도 원망만 늘어놓았다.“나으리는 대체 어디 계시는가! 준형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무얼 하고 계셨단 말인가! 이리도 중대한 소식을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만에 하나 폐하께서 깨어나지 못하시어 준형이가 정말 참수형이라도 당했다면…….”그녀는 상상조차 하기 두려워 숨을 헐떡였다.서원.노부인 역시 손자를 걱정하고 있었다.그녀는 이씨 어멈을 시켜 밖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으나, 이씨 어멈은 노부인이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어 차마 사실대로 고하지 못했다.이토록 큰일이 터졌음에도, 충용 후작은 민씨 부인이 복통을 호소하자 다급히 의원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고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와 크게 말다툼을 벌였고, 그 분노를 민씨에게 돌려 충용 후작이 보는 앞에서 민씨의 뺨을 때렸다.충용 후작은 노발대발했다.그는 민씨를 감싸 안으며 고 부인을 꾸짖었다.“부인의 꼴을 좀 보시오! 헛소문만 듣고 지레짐작으로 난리를 피우지 않소! 준형이는 멀쩡히 살아 있지 않소! 폐하께서도 깨어나셨으니 준형이의 억울함도 곧 밝혀질 텐데,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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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이황자는 궁인의 선고를 들으며 얼굴빛이 점차 창백해졌다.“유배라니? 어찌하여! 부황께서는 세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정녕 모르신단 말인가!”그는 무리 앞에서 성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심지어 어명을 받들지도 않은 채 곧장 입궁하여 알현을 청했다.그러나 황제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유배 소식은 이내 광화사로 전해졌다.유소영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아민이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씨, 이를 어쩌면 좋아요?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세자께서 감옥에서 풀려나실 줄 알았는데, 사형만 면했을 뿐 중벌은 피하지 못하셨어요.”석심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나무를 향해 주먹을 강하게 내리쳤다.“분합니다! 참으로 원통합니다!”유소영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선방 밖으로 나서며 석심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인력을 배치해라. 유배지로 가는 길 내내 세자 곁을 호위해야 해.”석심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세자 부인, 설마 세자께서 가는 길에 기습을 당할 것이라 의심하시는 겁니까?”유소영은 낯빛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육황자의 계략이 실패했으니, 반드시 다음 수를 준비했을 거야. 그는 결코 세자를 가만두지 않겠지. 우리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석심은 즉시 명을 받들었다.“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자 부인께서는……”“내 걱정은 하지 마. 내 곁에도 사람들이 있으니.”그녀에게는 할머님이 내어주신 오백 명의 정예가 있었다.당장 그녀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오직 세자의 안위뿐이었다.유소영은 먼 곳을 응시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제왕을 모시는 일은 호랑이를 곁에 두는 것과 같다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아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씨, 세자께서 유배형에 그친 것만으로도 폐하께서 성은을 베푸신 것이라 들었습니다.”“예전에는 그저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가는 것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리 번듯한 명문세가도 자칫 까딱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으니 참으로 살얼음판이나 다름없네요.”그녀는 이제 아씨가 후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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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영선화는 고장훈을 한바탕 때리고 욕을 퍼부었지만, 전혀 분이 풀리지 않았다.마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세자 오라버니가 죽을 거예요! 죽고 말 거라고요! 고장훈은 어찌 그리 매정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어요!”왕씨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그만, 그만하렴. 네가 장훈이를 오해한 거야. 장훈이가 그리한 것도 다 후작부를 지키기 위함이었단다.”“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그가 세자 오라버니를 모함하지 않았다면, 후작부에 이런 큰일이 닥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가 이기적이어서, 자기가 죽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게 분명해요!”세자 오라버니처럼 좋은 분이 그런 결말을 맞이해서는 안 되었다.영선화는 슬픔에 겨워 숨이 넘어갈 듯했다.왕씨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선화야, 훗날 알게 될 거란다. 세상일이라는 게 겉보기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네 세자 오라버니를 해치려 한 이는 장훈이가 아니라 따로 있어. 장훈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다.”영선화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고장훈을 뼛속 깊이 원망했다.“설령 그에게 시집을 간다 한들,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의 아이는 낳지 않을 거예요!”“무슨 헛소리냐!”왕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영선화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유소영은요? 은전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럴 때 그걸 전부 털어서라도 사람을 구해야죠! 설마 세자 오라버니가 죽는 걸 이대로 지켜만 보겠다는 건가요!”왕씨 역시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어가는 마당에 군주를 모시겠다며 광화사에 머물고 있는 유소영의 태연함은 지독히도 매정해 보였다.부부란 본디 한 숲에 사는 새와 같아, 큰 재난이 닥치면 각자 살길을 찾아 날아간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왕씨뿐만 아니라 고장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영선화에게 몇 번 긁힌 것 때문에 무척 화가 났지만, 유소영이 형님에게 이토록 무정하게 구는 것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결 통쾌해졌다.사실 처음에는 유소영이 형님을 진심으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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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고준형이 병약한 탓에, 황제는 특혜를 내려 그가 유배를 떠나는 길에 족쇄를 차지 않아도 되도록 윤허했다.그가 유배를 떠나는 날, 배웅을 나온 동료들이 적지 않았다.이황자는 특히 더 비통해하며 그를 구해내지 못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세자, 내 이미 다 손을 써 두었소. 가는 길에 관차들이 자네를 잘 보살펴 줄 것이야.”고준형은 이황자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작별 인사를 올렸다.엽금서는 이황자의 곁에 서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대인, 이리 억울한 누명을 쓰시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저와 전하께서 반드시 대인의 억울함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인파 속, 강지영은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그녀는 고준형이 자신을 증오하고 혐오하여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배웅은 나와야만 했다.유배형을 받았으니 적어도 당장 참수형을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었다.고준형의 뛰어난 재질이라면 반드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황궁.구공주는 높은 곳에 서서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미 고준형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았으나, 그저 이 상황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고준형 같은 강직한 사내가 시해의 음모를 꾸몄을 리 만무했다.게다가 그는 양나라를 위해 전장을 누비며 생사를 넘나들지 않았던가.그런 큰 공을 세운 이의 말로가 이토록 비참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공주 마마, 바람이 찹니다.”몸종이 일깨웠다.구공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마치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 같았다.……성문 밖.고 부인이 압송을 맡은 관차들에게 은전을 쥐여 주자, 그들은 넙죽 받아 챙겼다.사실 이황자가 진작에 손을 써 두었으나 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충용 후작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애비는 네가 결백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네 억울함은 언젠가 반드시 풀릴 게야!”고 부인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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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초왕과 고준형이 손을 잡게 된 것은, 육황자가 초왕부에 찾아가 자신을 태자로 밀어주지 않으면 운 측비의 추문을 세상에 폭로하겠다고 초왕을 협박했던 그날 밤에서 비롯되었다.그날 밤, 초왕부에는 연달아 세 명의 손님이 찾아왔었다.첫 번째는 육황자였고, 육황자가 다녀간 뒤에는 장공주가 찾아왔다.초왕은 당시 큰 혼란에 빠져 있었기에 장공주를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그리고 세 번째 손님이 바로 고준형이었다.그러나 고준형의 방문은 은밀하게 이루어졌기에 초왕과 심복 호위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들인 조담조차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때 고준형은 이미 육황자가 꿍꿍이를 품고 초왕부에 왔으리라 짐작했다.그래서 초왕과 그는 뜻이 맞아 곧바로 손을 잡게 된 것이었다.고준형의 계획은 이러했다. 초왕이 육황자에게 거짓으로 타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육황자의 진영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속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고준형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판에 뛰어들어 육황자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초왕이 움직일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또한 이는 초왕에게 건네는 일종의 신뢰의 증표이기도 했다.초왕이 조담의 이름을 빌려, 고준형이 강회산을 모함했다고 고발한 덕분에 육황자는 비로소 초왕을 믿게 되었다.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초왕이 문서를 한 무더기 꺼내어 고준형에게 건넸다.“이것은 내가 조사한 것이다. 알게 모르게 육황자와 왕래가 있는 관원들, 그리고 그들이 육황자에게 의탁한 시기가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고준형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수고하셨습니다, 전하.”초왕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이런 것들을 조사해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준형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팔 년 전,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 사건이 있었습니다. 육황자가 그 배후의 주동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과거 부정행위라니? 그것은 큰 중죄가 아니더냐!”초왕이 미간을 찌푸렸다.폐하께서는 인재를 높이 평가하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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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황성.황제 피습 사건의 전말이 마침내 천하에 드러났다.죄인들이 처벌을 받고 폐하께서도 의식을 회복하시자, 조정 관원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마침내 예전의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으나, 실상은 아직 풍랑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이 아니었다.그 짧은 안식이 사람을 가장 혹하게 만드는 법이었다.황궁 안에서는 몇몇 황자들이 번갈아 가며 황제에게 육황자의 행실을 고발하기 바빴다.“부황, 여섯째 아우가 무리를 지어 파벌을 형성하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그 흉심을 처벌해야 마땅합니다!”“부황, 셋째 형님은 분명 억울한 누명을 쓴 것입니다. 어찌 부황께 약을 썼겠습니까?”“부황, 소자 생각건대 만약 태자를 세우셔야 한다면, 넷째 형님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황제는 이 모든 말들을 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그만! 다들 입 다물라!”그가 모를 줄 아는가. 하나같이 태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나서진 못하고, 그렇다고 남이 나서는 것조차 두고 보지 못하는 꼴이다.지금 양나라는 사방이 불안정한데도, 저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비바람 한 번 겪어보지 않고서 바깥세상이 온통 화창한 봄날인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다.이토록 치열한 다툼의 형세 속에, 어찌 저리 우유부단하게 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충용 후작부.고 부인은 아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뒤로 내내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그녀는 고준형의 기구한 팔자를 슬퍼하며 울었고, 큰아들을 구하지 못한 남편의 무능함을 원망하며 울었다. 또한 고장훈을 탓하는가 하면, 이 틈을 타 작위를 민씨 배 속의 천한 핏줄에게 자연스레 넘겨주려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충용 후작도 처음에는 몇 마디 위로를 건네다가, 나중에는 아예 인내심을 잃고 조용한 곳을 찾아 남원으로 가 버렸다.민씨 부인은 그가 계속 남원에만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고 부인과 달리, 민씨 부인은 사내를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고소해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고 부인처럼 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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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공산 대사는 광화사의 주지로, 불법에 깊이 통달한 인물이었다.황실 사찰이라 외부 손님을 받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가 평소 사람들의 점괘를 풀어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대사님, 어떤가요?”복양 군주가 공산 대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는 유소영이 방금 뽑은 점괘를 든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복양 군주는 성질이 급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해했다.공산 대사는 그녀의 초조함을 개의치 않고 주름진 눈을 들어 유소영을 바라보았다.“시주, 이 점괘는 누구를 위해 뽑으신 겁니까?”유소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복양 군주가 대신 대답했다.“세자 부인의 남편이요! 대사님, 어서 말씀해 보세요. 길인가요, 흉인가요?”공산 대사는 유소영을 응시했다.“출가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노승은 고 세자와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으나, 일찍이 예외를 두어 그의 점을 쳐준 적이 있지요. 그의 일생에는 두 번의 옥살이를 할 액운이 있습니다.”유소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두 번이라고?그렇다면 이번이 첫 번째일 텐데…….“두 번째가 있다는 건, 이번에는 무사하다는 뜻이잖아요!?”복양 군주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외쳤다.공산 대사는 더 이상 말을 아끼며 점괘를 거두었다.복양 군주는 이를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유소영의 팔을 끌어안았다.“정말 다행이에요! 공산 대사님까지 저렇게 말씀하셨으니, 세자 부인도 이제 마음을 푹 놓아도 되겠어요!”유소영은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는 위로를 받은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산 대사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감사합니다, 대사님.”그러고는 복양 군주와 함께 자리를 떠나려 했다.바로 그때, 공산 대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시주, 노승이 한 말씀만 더 올리지요. 혈육의 인연이 얕은 자는 무리해서 억지로 맺으려 하지 마십시오.”유소영은 멈칫했다.그녀의 집안은 원래 다섯 식구였으나 지금은 아버지와 자신 둘뿐이니, 혈육의 정이 얕은 것은 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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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석심의 안배로 유소영은 군주에게 서신을 한 통 남긴 뒤, 아민과 함께 마차에 올라 밤을 틈타 광화사를 떠났다.“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그녀가 석심에게 물었다.석심은 마차를 몰며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세자께서 우선 부인을 모시고 황성을 떠나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차 안에서 아민은 유소영을 부축하며 덩달아 초조해했다.“아씨,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요? 육황자께서 너무 몰아붙이시는 것 아니예요?”유소영의 안색이 무거워졌다.그녀는 오직 세자가 위험에 처했을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다음 날.이른 아침.복양 군주가 유소영을 찾아와 문을 밀자 그대로 열렸다.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녀가 몇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이상하네, 어디 갔지?”복양 군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발견했다.열어보니 유소영이 자신에게 남긴 것이었다.이 바보 같은 여인! 남편에게 일이 생기자 후작부에서 자신의 재산을 노릴까 봐 두려워 이렇게 도망쳤다니!복양 군주는 화가 치밀었다.우리는 친한 친구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상의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거야!그녀가 채 불평을 끝내기도 전에, 몸종이 다급히 달려왔다.“군주! 군주! 육황자께서 오셨습니다!”복양 군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여긴 웬일이야!”광화사는 외부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육황자 또한 황실 자제였다.게다가 이번에는 폐하의 윤허를 받아 사람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오늘 아침, 고준형이 유배 도중 도주하여 행방이 묘연하다는 급보를 받았다. 하여 본 황자는 그 처인 유씨를 체포해 조사에 임하게 하고자 친히 행차한 것이다!”그의 명분이 워낙 그럴듯하여 아무도 막아설 수 없었다.오직 복양 군주만 빼고 말이다.복양 군주가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선방 마당 앞을 가로막았다.“유소영은 계속 나와 함께 있었어요. 고준형이 실종된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요!”육황자가 오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유씨를 감싸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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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얼마 지나지 않아 육황자가 도착했다.“소자, 부황께…….”부황이라는 두 글자가 채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어찌하여 쫓기는 적을 궁지로 몰지 말라고 하는지 아느냐!”육황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부황께서 소자를 이리 부르신 까닭이 고작 병법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까?”황제는 빙빙 둘러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짐이 고준형에게 유배형을 내린 것은 네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를 길들이라는 것이지, 죽이라고 한 것이 아니야!”“당장 네 놈의 수하들을 거두어들여라!”“만약 고준형에게 털끝만 한 문제라도 생긴다면, 태자 자리에 오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육황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자 책봉에 관한 일도 부황께서 각별히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일단 수긍한다고 해서 그에게 손해 될 것은 없었다.진정으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적을 베려다 도리어 제 발등을 찍는 꼴이 될 터였다.황제의 시선이 깊어졌다.“원나라 사신이 곧 황성에 당도할 것이다. 그때 네가 짐을 대신해 그들을 맞이하거라. 양국의 동맹을 무사히 성사시킨다면, 짐이 너를 태자로 책봉하더라도 문무백관이 진심으로 승복할 것이다.”육황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부황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소자가 반드시 흡족한 결과를 안겨 드리겠습니다!”……궁 밖.호위가 육황자에게 지시를 청했다.“황자 전하, 고준형을 암살하러 파견한 이들을 정말 철수시켜야 합니까?”육황자가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드러내 놓고 할 수 없다면, 은밀하게 처리하면 그만이다.”고준형을 자신의 사람으로 부릴 수 없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예. 분부 받들겠습니다!”이어서 육황자가 물었다. “고준형의 계집은 어찌 되었느냐? 찾았느냐?”“황자 전하께 아룁니다. 성문을 엄중히 지키고 있으나, 아직 유씨를 찾지 못했습니다.”“쓸모없는 놈들! 계속 찾아라!”“예.”같은 시각.유소영 일행은 진작에 황성을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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