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201 - Chapter 210

497 Chapters

제201화

참 아이러니했다. 이 비밀스러운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이 되어버렸으니.“무슨 일이죠?”강하율은 지극히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배윤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어디서 오는 길이지? 날도 추운데 땀까지 흘리고.”강하율은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누가 들어도 떠보는 뉘앙스였다.그러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성북구요. 이번 분기 실적 올리려고 그쪽 공장들이 연말에 단합 대회를 자주 열 거든요.”거짓말은 아니었다. 조금 전에 성북구 공장들에 전화를 돌리며 몇몇 행사 일정도 잡아둔 터였다.굳이 깊게 조사할 필요도 없이 예약 기록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이대로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제는 어디서 잤지?”강하율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질문 자체에 어젯밤 그녀가 귀가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배윤제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하율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이 언제부터 직원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죠?”“널 걱정하는 게 안 보여? 내가 뭐 하러 여기까지 데려왔겠냐?”배윤제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솔직히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서 찾아온 거야. 우리 여기 같이 왔었지? 아쉽게도 그때는 너랑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어줬지만.”그렇다. 또 미끼였다.정작 그때 사진 찍기를 거부했던 건 배윤제 본인이었다.강하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눈앞의 커피에 시선을 고정했다.아이스 아메리카노.배윤제는 한식 스타일의 아침을 선호하지만,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차리곤 했다.하지만 이곳의 아메리카노가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녀의 앞에 놓인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셔봐.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좋아한다고?강하율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그녀가 자신의 취향을 기억해 준 것에 감동했는지, 배윤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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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배윤제의 입에서 또다시 정다인의 이름이 튀어나왔지만 강하율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여자친구를 위해 그녀를 찾아온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분명 기소정 쪽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을 것이고, 정다인은 그 화살을 돌릴 희생양이 간절했을 터였다.강하율은 구구절절 말 섞기 싫었다.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켜서 조익현과 나눈 대화 창을 띄웠다.“보세요. 제가 만약 이 상황에서 선을 안 긋고 사적인 대화를 이어갔다면, 나중에 기소정 씨 귀에 들어갔을 때 과연 뭐라고 생각했겠어요?”배윤제는 해외 유학파다. 외국에서 상대방의 체취나 향수에 대해 논하는 게 얼마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인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더구나 조익현처럼 보통 신분이 아닌 남자와 스스럼없이 개인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증거가 확실한 만큼 배윤제도 더는 자신을 몰아세우지 못 하리라 믿었다.하지만 정다인을 향한 배윤제의 맹목적인 편애는 그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그는 화면을 대충 훑어보더니 오히려 서슬 퍼런 비난을 쏟아냈다.“다인이한테 들었어. 네가 먼저 꼬투리 잡힐 짓을 안 했다면 조익현이 왜 먼저 말을 걸었겠어? 아무리 공을 세우고 싶어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지. 이번 결혼식의 주인공은 기씨 가문이라는 거 잊지 마. 네가 비위를 맞춰야 할 사람은 기소정이지, 조익현이 아니란 말이야.”마지막 한 마디에 특히 힘이 실렸다.결국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 되었고, 증거 또한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강하율은 기분이 착잡했다. 배윤제가 무의식중에라도 그녀가 조익현에게 접근한 이유를 ‘유혹’이 아닌 ‘공로’ 때문이라 치부해 주니,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이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정다인 말이 무조건 다 맞다는 사람 앞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어요? 하지만 사과는 절대 못 해요. 애초에 잘못한 게 없으니까. 이 일로 저 프로젝트에서 제외하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일게요.”강하율이 순순히 물러날 수 있어도 정다인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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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한 마디 한 마디가 혹여나 오해라도 살까 봐 선을 긋기 급급한 모습이었다.강하율 역시 사무적인 태도로 응수했다.“상사랑 부하 직원 사이면 사무실 가서 얘기하시죠. 공적인 일 말고는 딱히 할 말도 없으니까. 그리고 사과는 절대 못 해요. 조익현 의도가 뭐였는지는 다른 사람이랑 물어봐서 확인해 봐도 상관없어요. 아, 참. 그분한테 나 추가하라고 시킨 거, 정다인이었어요.”“너 진짜...!”배윤제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율은 그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그녀가 뒤를 도는 순간, 노기를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아팠을 땐 왜 안 왔어?”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기에 참아왔던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헤어졌는데 왜 자꾸 질척거려요? 내 감정이 자존심이나 일, 그리고 인생보다 우선일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요? 더욱이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긴 하고?”배윤제는 침묵했다.기억을 잃은 척한 상태라 감정적인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간 꼬투리를 잡힐 수 있었다.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강하율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나갔다.카페를 나서는 순간, 배윤제가 곁에 있던 커피잔을 내동댕이쳤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당장이라도 달려가 강하율의 목을 움켜쥐고 말해주고 싶었다.당연하다고, 자신은 언제나 그녀의 전부였다고!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라고.이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배윤제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커피 얼룩이 점점 번져갔다.장천우는 휴대폰을 훑어보고는 그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도련님, 방금 미행하던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배 대표님의 별장을 드나든 사람은 비서뿐이고, 여자는 없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계속 배 대표님 곁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에요.”배윤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강하율이 붙인 탐정 쪽은 별다른 움직임 없어?”“상대가 워낙 노련한 인간이라 매번 미리 몸을 숨기곤 합니다만, 그래도 동선에서 단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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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우리 싸운 게 아니라고 해도 계속 걱정되나 봐.]문자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곁에서 슬쩍 내용을 확인한 안혜슬은 헛구역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완전 여우네. 일부러 너 엿 먹이려는 거잖아.”“개한테 물렸다고 똑같이 해줄 순 없잖아.”강하율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애써 무시하려 했다.하지만 정다인은 사람 기분 잡치는 데 선수였다.[윤제 씨가 그러는데, 너 무조건 사과해야 한대. 안 그러면 기씨 가문 결혼식 행사에서 빠져야 할지도? 하지만 걱정 마, 내가 잘 말해뒀으니까. 앞으로도 옆에서 서포트만 해줘. 나한테 고마워하는 마음만 잊지 말고.]강하율은 속이 뒤집혔다.곁에 있던 안혜슬도 분통이 터지는지 연신 가슴을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이걸 참는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억지로 빚까지 지게 생겼잖아.”강하율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진정해. 참는다고 한 적 없어. 미리 밑밥 좀 깔아뒀거든.”“무슨 밑밥?”“허지연.”강하율은 오늘 카페를 나서며 건물 외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다.사진 구석에는 배윤제의 차량 번호판 일부가 의도치 않은 듯 슬쩍 노출되어 있었다.평소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타입인 허지연은 이미 그녀와 배윤제가 나란히 찍힌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그러니 번호판의 숫자만 보고도 단번에 배윤제를 떠올릴 게 뻔했다.이 사진을 발견한 순간, 둘이 여전히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확신할 터였다.아니나 다를까, 강하율이 한 사람만 볼 수 있게끔 사진을 업로드하자마자 허지연의 부계정에 새 게시물이 올라왔다.[추억의 맛을 찾아서. 혹시 이 카페 이름 아는 분 계신가요? 몇 년 전에 갔던 곳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허지연은 알고리즘의 무서움을 모르는 모양이었다.부계정이라도 쓰면 사생활을 완벽히 감출 수 있을 거라 믿었겠지만 ‘금수저’ 컨셉질을 시작한 바로 다음 날, 알고리즘은 보란 듯이 그 계정을 강하율에게 추천해 주었다.처음엔 강하율도 무심하게 넘겼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실크 잠옷을 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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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이모, 저도 이제 다 컸어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러니까 굳이 윤제 오빠 연락할 필요 없어요.”강하율이 목소리를 낮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안 돼, 네 부모님께 너 하나만큼은 잘 돌보겠다고 약속까지 했잖니. 말이 좋아 돌본 거지, 사실 네가 워낙 순해서 그동안 내가 신경 쓸 구석이 어디 하나 있었니? 그런 애를 어떻게 마음고생 하게 그냥 놔둬. 게다가 내 마음속에 넌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집 며느리였다니까.”이 화제를 언급할 때마다 조윤서는 유독 기뻐했다.강하율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조윤서는 두 사람이 한때 사귀었다는 것도, 지금은 관계가 처참히 망가졌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더군다나 정다인과 배윤제는 이미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임을 선포한 상태였다.강하율은 결국 화두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그나저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네가 보고 싶어서 그렇지. 며칠 뒤 내려가니까 그때 꼭 밥 먹으러 오렴. 나랑 같이 시간도 좀 보내고.”“그게...”강하율은 배씨 가문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조윤서의 기대를 저버리긴 싫었다.“네, 꼭 갈게요.”“하율아, 너무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모는 네 편이란다. 내 마음속에서 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니까.”이는 정다인을 배윤제의 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강하율이 다급히 해명했다.“이모, 감정이라는 게 강요한다고 생기진 않잖아요. 게다가 윤제 오빠는 정다인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요.”조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나중에 윤제랑 다시 얘기해 보마.”“네.”강하율은 말을 아꼈다. 어찌 됐든 그건 모자 사이의 일이었으니까.전화를 끊고 나니 최근 배윤제가 보인 행보가 떠올라 내심 걱정이 앞섰다.안혜슬이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하율아, 왜 그래?”“딱히 즐거운 식사 자리가 아닐 것 같아서 걱정이야. 괜히 또 나만 독박 쓸까 봐 겁나네.”강하율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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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정다인이든 조익현이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은밀히 접촉했다는 건 분명 뒤에서 불순한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였다.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강하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급히 확인해 보니 허지연의 부계정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길 가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딱 마주침! 무려 커피까지 한 잔 사주심.]사진 속 허지연은 평소 일할 때보다 훨씬 과감하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한쪽 귀퉁이에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살짝 노출되어 있었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슈트와 꼿꼿한 체격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댓글 창은 벌써 동화 같은 로맨스를 꿈꾸는 반응들로 도배되었다.[이건 백 퍼센트 님한테 꽂힌 거예요. 이런 남자가 아무 여자한테나 커피 사 줄 리 없지.][뒷모습만 봐도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글쓴이 파이팅!]허지연은 기세등등해졌는지 재빨리 답글을 달았다.[서로 번호도 주고받았어요. 진전이 있으면 다음에 또 알려드릴게요.][대박!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또 한 편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건가요?]내용을 꼼꼼히 살핀 강하율 역시 부계정을 하나 만들어 댓글을 남겼다.[어? 왠지 익숙한 뒷모습인데... 제가 알기로 저분 여자친구 있지 않아요?]확인 버튼을 누르자마자 순삭당했다.화면에 뜬지 1분도 되지 않았다.안혜슬이 휴대폰으로 게시물을 훑어보며 한마디 했다.“성급하기도 해라.”강하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서두르지 않고 어떻게 기회를 잡겠어?”“다음 계획은?”“기회를 좀 만들어 줘야지. 그러고 나서 판을 한번 키워볼까 해.”예전의 강하율이었다면 그저 좋게 좋게 넘기려 애썼을 터였다.하지만 오랜 사회생활 끝에 뼈저리게 깨달은 점이 있었다. 남을 공격할 마음이 없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지킬 방어 기제는 반드시 갖춰야 한다는 것을.만약 허지연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다.그녀가 기어이 검은 욕망을 드러낼 땐 제 발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 터였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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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그 말에 허지연은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헤어졌다고 했지, 차였다는 게 웬 말이에요?”강하율이 맞받아쳤다.“나도 전 남친이랑 헤어진 거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왜 사방팔방에 내가 버림받았다고 떠들고 다녀요? 헛소리는 허지연 씨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나?”“이...!”허지연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때, 버스 기사가 큰소리로 호통쳤다.“앉으세요, 차량 이동 중에 서 있으면 위험합니다.”허지연은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러다 고개를 숙여 손에 든 텀블러를 보더니 다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적어도 난 대시하는 남자가 끊이질 않았죠. 누구처럼 혼자 속앓이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라면서 왜 떠벌리고 다닌담.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강하율의 일침에 허지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강하율은 다시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어느새 배윤호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응.]오늘의 대화도 역시 여기까지였다.다행이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배윤호가 사진 한 장을 더 보내왔다.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안혜슬이 먼저 침을 꼴깍 삼키며 소리를 질렀다.“대박! 미쳤다, 몸매!”강하율은 급히 화면을 가렸다.배윤호가 약을 잘못 먹기라도 했나?대체 왜 이런 나체와 다름없는 사진을 보낸 거지?상처가 옆구리 쪽에 있어서 약을 바르려면 바지춤을 꽤 아래로 내려야 했을 텐데.그 덕에 선명한 복근과 아찔한 허리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안혜슬은 강하율의 팔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너 진짜 좋은 건 혼자 다 보고 살았구나?”강하율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아, 아니거든?”이때, 허지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무슨 소리예요? 몸매가 어쨌다고요?”강하율이 얼른 둘러댔다.“아, 혜슬이가 살 뺐냐고 물어봐서.”안혜슬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맞아요.”허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그렇게라도 관심 끌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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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허지연은 비상구 문 뒤로 몸을 숨기는 뒷모습을 발견하고 바짝 따라붙었다.그리고 입구에 다다르자 안에서 강하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자꾸 불러내시는 거예요? 전 이제 대표님이랑 더는 엮이기 싫다니까요?”“그리고 선물 좀 그만 보내요. 지금 아파트에 발 디딜 틈도 없어요. 그런 고가 명품들은 들고 다니지도 못해요.”“어떤 미친 사람이 회사 오면서 몇억이 넘는 목걸이를 해요? 너무 튀잖아요.”“네? 별장으로 옮기라니? 싫어요. 부자 아니면 연예인들 사는 곳인데, 제가 가면 뭐가 되겠어요?”“알겠어요. 일단 만나서 다시 얘기해요. 호숫가 산책로를 거닐면서 대화 좀 나눠요. 저 준비하고 금방 나갈게요.”허지연은 곧바로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강하율은 비상구를 슬쩍 살피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혜슬아, 협조해 줘서 고마워.”안혜슬이 팔을 긁으며 질색했다.“네 말 듣는데 몸에 닭살이 다 돋더라. 그나저나 진짜 호숫가 산책로 가려고? 사람도 많은데 혹시라도 누가 보면 어떡해?”“걱정하지 마. 어차피 못 가.”“그게 무슨 소리야?”“보면 알아. 이따가 사진 찍는 거 잊지 말고.”강하율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이내 사무실로 향해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일부러 선명한 색깔의 립스틱을 덧발랐다.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되었다.“와, 팀장님! 립스틱 진짜 잘 어울려요. 이런 컬러 바른 거 처음 봐요.”“고마워요. 제품명과 색상 알려드릴까요? 여기 브랜드 꽤 괜찮더라고요.”원래도 예쁜 얼굴이 미소를 머금자 한층 더 화사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대부분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허지연은 강하율이 관심을 뺏는다고 생각했는지, 손에 든 텀블러를 꽉 움켜쥐었다.잠시 후 서류를 들고 문득 앞으로 나섰다.“강 팀장을 꼭 집어서 찾는 고객님이 계시는데, 지금 카라디움에서 기다리고 있대요.”카라디움은 호숫가 산책로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강하율은 즉시 책상 위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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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아침 댓바람부터 예식장 세팅 보러 가더니, 이제야 좀 안심돼?”“사람들이 호텔이라면 환장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여긴 그냥 대충 꾸며도 분위기가 확 살아요. 맨날 보는 똑같은 식장이랑 아예 차원이 다르다니까.”기소정이 신이 나서 말했다.두 모녀는 아침 식사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그렇다면 정다인이 왜 룸에서 나온 거지?곧이어 문을 열어주는 조익현을 보자 정다인이 만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객 인사카드에 따르면 조익현의 집안도 꽤 부유한 편이지만 기씨 가문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하물며 배윤제는 더 할 것도 없었다.따라서 둘이 무언가를 모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강하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문득 허지연이라는 카드를 미리 던져두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카라디움.강하율은 여기서 한 시간 정도 머물면서 고객사들에게 안부 전화나 돌릴 생각이었다.그런데 창가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 배윤호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대표님이 여긴 왜...”“오늘 저녁 기씨 가문에서 파티를 주최하는 거 모르나 보군.”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남자의 자태에선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묻어났다.어디를 다쳤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호수 위로 피어오른 아침 안개가 난간을 스치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 풍경 속에 녹아든 배윤호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였다.강하율은 적잖이 당황했다. 정말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고개를 들어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직감했다.이내 크게 심호흡하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아침 호숫가의 찬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자 자극이 됐는지, 연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순간, 눈앞에 따뜻한 찻잔 하나가 놓였다.강하율은 차를 받아 들며 말했다.“고마워요. 그... 상처는 좀 괜찮아졌나요?”그녀는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허리를 숙여 바짝 다가갔다.배윤호는 멈칫했다. 코끝을 스치는 여자의 은은한 머릿결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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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배윤호는 강하율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슬쩍 쳐다보기만 했다.강하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서야 요동치는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곧이어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죄송해요. 제가 주제넘게 참견했네요.”배윤호가 되물었다.“네가 언제부터 기씨 가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강하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배윤제와 기씨 가문의 사이가 그토록 각별한데 배윤호가 어찌 내막을 모르겠는가.결국 고민 끝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뱉었다.“윤호 오빠...”배윤호의 눈썹이 까딱했다.“오빠? 너 진짜...!”강하율은 그제야 눈치챘다. 부탁할 때가 되니 저도 모르게 또 ‘오빠’라고 부른 것이다.그녀는 민망함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배윤호에게 쫓겨날 마음의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정작 그는 먼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기씨 가문도 십여 년 전에는 세원시에서 새로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지. 우리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시기였어. 세원시 경제가 지금 수준에는 못 미쳤어도 노력만 하면 누구나 첫 밑천을 거머쥘 수 있었던 때였으니까.”강하율은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마침 강씨 가문이 한창 번창하던 시기와 일치했다.그때, 배윤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하지만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 부는 언제나 소수의 전유물이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밑바닥 일은 누가하고, 우월감은 어디서 느끼겠어? 겉으로는 다 같이 성장하자고 외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실상은 철저한 약육강식이야. 당시 수많은 기업이 일어선 만큼 망한 가문도 부지기수였어. 기씨 가문은 그중 살아남은 쪽이고.”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강하율도 대충은 짐작했다. 지금 기씨 가문이 누리는 영광도 아마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은 아닐 터였다.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전쟁터와 같으니 승패가 갈리기 마련이었다.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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