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ueil / 로맨스 / 불륜해드립니다. / Chapitre 121 - Chapitre 130

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21 - Chapitre 130

260

121.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

병실의 공기는 차갑고도 무기력했다.소독약 냄새가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형광등 빛은 사람의 피부를 조금씩 말려버리는 색이었다.바닥은 늘 반듯하게 닦여 있었지만, 그 반듯함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흐트러질 수 없다는 듯이.이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자세는 단정했지만, 단정함이라는 건 가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이 되기도 한다.손등 위로 손을 포개고, 숨을 고르면서도, 눈은 침대 위의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서종민.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오래, 너무 여러 번 버텨온 이름이었다.아버지의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김이 얇게 맺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반복이 마치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기계가 “살려 두고 있는” 방식이라는 걸.기계는 성실했다.삐..., 삐....간격을 어기지 않고, 감정을 섞지 않고, 단지 기능으로만 존재했다.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도 어느 순간 기계처럼 생각하게 된다.이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이건 유지하냐, 끊느냐.의사는 오늘도 같은 말을 했다.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의식이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수치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의 끝에는 늘 조심스러운 침묵이 따라붙었다.“결정은 가족이 하셔야 합니다.”그 말은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언제나 그 문장이 떠 있었다.가족. 이수는 속으로 그 단어를 한번 굴렸다.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고, 그 하나 때문에 이수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그리고 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은 ‘줄’이었다.당기면 이수가 움직이는 줄.민준은 그 줄을 잡고 있었다.이수가 처음 민준을 만난 것도 병원이었다.그때의 이수는 계산을 잘하지 못했고, 스스로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조차 정확히 몰랐다.대출, 사채, 수
Read More

122. 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

산소마스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투명한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줄.이게 사람의 생을 붙잡고 있다니, 그 사실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이수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그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눈꺼풀은 닫혀 있었고, 주름은 펴져 있었으며, 입가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이수는 속으로 물었다.아빠는 지금, 나를 원망할까.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들어 있을까.그 질문에 답은 없었다.답이 없다는 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마스크 끈을 건드렸다.순간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떨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마지막 반응에 가까웠다.그 반응을 넘어서야만, 이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어차피…”이수는 거의 소리 없이 말했다.“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지금 가셔도 서운하지는 않죠?”그 말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이수는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다음 순간을 넘길 수 없었다.마스크를 벗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빨랐다.끈이 풀리고, 플라스틱이 들리고,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이수는 그 얼굴을 끝까지 봤다.어떤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돌리면, 그건 도망이 될 것 같아서였다.기계음이 달라졌다.삐.., 삐...의 간격이 흔들렸다가, 어느 순간 길게 늘어졌다.이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소리를 듣는 건 확인이었고, 확인은 마음을 붙잡는다.이수는 마음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달랐다.소독약 냄새는 여전했지만,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척’하던 공기는 병실 안에만 남겨졌다.이수는 걷기 시작했다.도망치듯이, 그러나 무작정은 아니었다.‘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똑바로 섰다.아버지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도망.그게 너무 잔인하다는 걸 이수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준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이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수는 그걸 선택했을까.
Read More

123. 비가 그치지 않는 밤의 동행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도망치지도 않았다.그날, 이수는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고 누군가 곁에 서 있었다.그 곁은 따뜻한 곁이 아니라, 그저 비를 덜 맞는 곁이었는데도.이수는 그 곁이 낯설어서, 더 움직이지 못했다.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는데..""갈 곳은 있어요?"'갈 곳'이라는 단어가 이수를 찔렀다.이수에게 집은 이미 집이 아니었다.민준이 있는 곳이 집이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 같은 일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리고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없어요.”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주소는 있을지 몰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럼,”그가 말했다.“일단… 비 좀 피하죠.”“여기서 이러다 정말 쓰러져요.”이수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거절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통제나 목적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민준의 말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너를 내 안에 묶어두겠다’는 목적.그런데 지금 이 남자의 말에는 목적이 없었다.그게 이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우산 아래에서 한 발 옮겼다.그리고 또 한 발. 발걸음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수는 이상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그 남자는 이수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 밤에는 이름 같은 게 필요 없었다.이 밤은 그저, 살아남는 밤이었고, 숨을 이어붙이는 밤이었다.그렇지만… 이수는 몰랐다.이 낯선 남자와의 이 한 걸음이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옆에서 버티게 해줄 “동행”의 시작이 될 거라는 걸.그 남자가 강하빈이라는 것도,그가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이수의 일을 돕게 될 거라는 것도,그 모든 건 아직 알지 못했다.다만 이수는, 비가 그치지 않는 밤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혼자 도망치
Read More

124. 도망이 아니게, 나를 데려온다

“괜찮아.”이수가 말했다.습관처럼 나오는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하빈은 이수를 잠시 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괜찮다는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믿어주는 편이 더 나은 순간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미용실 문 밖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비가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이수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숨이 편해졌다.가위와 빗을 꺼내 놓으며 이수는 문득, 아버지 병실의 형광등을 떠올렸다.그곳의 빛은 늘 똑같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여기처럼 아침과 낮이 나뉘지 않았고,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는 빛이었다.이수는 그 기억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붙잡지 않는 법을 이미 충분히 배웠기 때문이다.“오늘 일정은?”하빈이 물었다.“예약 두 명.”이수가 말했다.“그리고… 오후에 한 사람 더 올 수도 있어.”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의 뒷부분을 이해했다.‘머리를 하러 오는 손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걸.“무리하지 마.”그가 말했다.이수는 웃었다.짧게, 아주 작게.“그 말,”이수가 말했다.“너한테 들은 지 벌써 몇 년 된 것 같아.”“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알아.”이수는 가위를 들었다.손끝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이 손은 한때 산소마스크의 끈을 잡았고,문을 밀고 나왔고, 비를 맞으며 떨었고,이제는 사람의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같은 손이었다.그 사실이 이수를 조금 이상하게 만들었다.사람은 이렇게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같은 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하빈은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는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누군가 옆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수는 그 감각을 아주 오래 붙잡아 왔다.하빈은 묻지 않았다.그 밤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이수가 왜 이 일을 선택했는지,왜 남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는지,왜 위험한 방
Read More

125. 기억 속에 남는 조용한 향기

미용실 문을 여는 손끝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장미 미용실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리문은 늘 같은 무게였지만,오늘은 이상하게도 한 번 더 밀어야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문이 아니라,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이수는 불을 켜고 안쪽을 한 번 훑어봤다.의자는 제자리에 있었고, 거울은 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인데도, 그 안에 서 있는 자신만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머리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손목에 남은 고무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사라지지 않는 건 늘 이런 것들이었다.눈에 잘 띄지도 않고, 굳이 설명할 수도 없는 흔적들.하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원래라면 이 시간쯤 커피를 들고 들어왔을 텐데, 오늘은 그 기척이 없었다.이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빗자루를 집어 들고 바닥을 쓸었다.소리가 크지 않게, 바닥을 긁지 않게. 쓸고 또 쓸면서 생각은 자꾸 다른 데로 흘러갔다.병원 복도. 차가운 바닥.기계음이 일정하게 이어지던 그 밤.이수는 빗자루를 멈췄다.멈춘 김에, 숨도 잠깐 고르고 있었다.과거는 이렇게, 아무 예고 없이 끼어들었다.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문득 비슷한 공기가 닿으면 스며들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일찍 와 있었네.”하빈의 목소리였다.평소보다 낮았고, 조금 느렸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너도 늦었네.”“어제 좀… 정리할 게 있어서.”그는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하나는 이수 앞에, 하나는 자기 앞에 말없이 내려놓는 동작이 익숙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의 몸짓이었다.이수는 컵을 만지작거리다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먼저 왔고, 뒤늦게 고소함이 남았다.괜히 그 순서를 기억해두었다.“어제,”하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괜찮았어?”‘괜찮다’는 말은 참 애매했다. 무사했다는 뜻도 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도 되니까.“응. 그냥… 생각이 좀 많았어.”“그렇겠지.”그는 더 묻지 않았
Read More

126. 기척

손님의 머리를 말리는 동안, 이수는 손끝에 집중하려 애썼다.드라이어의 열이 일정하게 흐르고, 빗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흩어지던 생각들이 잠시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일은 늘 이런 식이었다.집중하면, 생각이 잠잠해졌다.“여기만 조금 더요.”손님의 말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거울 속에서 눈이 잠깐 마주쳤다가 떨어졌다.괜찮은 하루처럼 보이는 얼굴.그 얼굴이 연기인지 아닌지는 이수 본인만 알고 있었다.손님이 나간 뒤, 미용실은 잠깐 조용해졌다.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대였다.이수는 수건을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창밖을 봤다.햇빛이 생각보다 강했다.어제의 흐린 공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하빈은 계산대 옆에 서서 메모를 보고 있었다.업무 메모였다.날짜, 이름, 간단한 상황 정리.겉으로 보면 평범한 기록이지만,그 안에는 누군가의 결심과 누군가의 삶이 얽혀 있었다.“오늘은 좀 한가하네.”이수가 말을 건넸다.굳이 이유는 없었다.그냥, 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잠깐일 거야.”하빈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경험에서 나오는 말이었다.한가함은 늘 예고 없이 끝났다.이수는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혼자는 하지 마.’그 말은 아직도 이수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명령도 아니고, 부탁도 아닌 말.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을 붙들었다.“하빈아.”“응.”“만약에.”말을 꺼냈다가, 이수는 잠깐 멈췄다.‘만약’이라는 말은 늘 조심스러웠다.상상을 부르고, 상상은 때로 현실보다 무거웠다.“아니야.”“왜, 말해.”하빈이 고개를 들었다.이수는 그의 눈을 보았다.피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지금은 괜찮아서.”하빈은 더 묻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그 태도는 늘 같았다.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태도.그날 오후, 예약 전화가 한 통 들어왔다.이수는 전화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메모를 했다.이름, 시간, 간
Read More

127. 말을 삼키는 시간

비는 밤새 그쳤다.아침 공기는 맑았지만, 어제의 흔적이 완전히 씻긴 느낌은 아니었다.젖었다가 마른 바닥처럼, 어딘가에 눌러 붙은 기척이 남아 있었다.이수는 장미 미용실 문을 열며 안쪽을 한 번 더 훑어봤다.불을 켜자 거울들이 차례로 빛을 받아냈고, 그 빛은 익숙한 얼굴을 여러 개로 나누어 보여줬다.오늘의 얼굴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다만, 어제 삼켜버린 말들이 아직 안에서 가라앉지 않았을 뿐이었다.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다가 이수는 문득 손을 멈췄다.어제 소주잔 속에 비치던 불빛,하빈의 말투, 끝내 하지 못한 이야기.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남아 있었다.문이 열렸다. 하빈이었다.손에 든 봉투에서 따뜻한 김이 조금 새어 나왔다.“아침 안 먹었지.”“응.”“국.”설명은 없었다. 이수도 묻지 않았다.말을 줄이는 방식이 서로 닮아가고 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봉투를 열자 속을 데워주는 냄새가 퍼졌다.이수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잠시 멈췄다.“하빈.”“응.”“어제 말이야.”하빈은 고개를 들었다.이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삼킨다고 했잖아.”“했지.”“그럼… 지금도 그래?”하빈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짧지 않은 침묵이었다.대답을 고르는 시간이라기보다,자기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에 가까웠다.“조금은.”“왜.”“지금 말하면,”그가 낮게 말했다.“네가 더 무거워질까 봐.”짐이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이수는 알아들었다.“난,”이수가 천천히 말했다.“짐이 되는 게 제일 무서운 건 아니야.”하빈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짐인 척하면서 혼자 버티는 게 더 무서워.”하빈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그 소리가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그건,”그가 말했다.“네가 제일 잘하는 방식이잖아.”칭찬이 아니라는 걸 이수도 알고 있었다.“그래서,”이수가 말했다.“이제는 좀… 덜 잘하고 싶어.”하빈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 한숨엔 체념보다는 결심이 가까웠다.“그럼,”그가 말했다.“다음부
Read More

128. 폭우

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다.예보도 없었고, 그럴 기색도 없던 하늘이었다.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앞이 흐려질 만큼 굵어졌다.이수는 유리창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이런 비는 대개 사람을 집 안에 붙잡아두거나, 아니면 어디로든 밀어내버린다고.“이 정도면,”하빈이 말했다.“오늘은 문 닫아도 되겠다.”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괜히 고개만 끄덕였다.아직은 닫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그때, 문 위에 달린 종이 한 번 크게 울렸다.조심스러운 소리가 아니었다.문이 반쯤 밀리며 억지로 난 소리였다.둘 다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여자가 서 있었다.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머리카락은 얼굴에 붙어 있었고, 옷은 물을 먹어 무거워 보였다.신발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여자는 문을 완전히 닫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숨을 고르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가슴이 빠르게 들썩였다.“저기…”목소리가 떨렸다.너무 떨려서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이수는 말없이 다가갔다.이런 사람에게 처음부터 질문을 던지는 건 늘 잘못된 선택이었다.여자는 이수를 보자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거의 무너진 목소리로 말했다.“살려주세요.”그 말이 비 소리보다 먼저 공기를 갈랐다.“남편이…”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하다가 끝내 참지 못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남편이 저를 죽일지도 몰라요.”그 순간, 이수는 움직이지 못했다.얼굴에 남은 붉은 자국. 급히 닦아낸 듯 번진 화장.소매 끝 아래로 보이는 손목의 멍.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이 보였다.하빈이 먼저 움직였다.아무 말 없이 수건을 가져와 여자에게 건넸다.“일단…”그가 낮게 말했다.“좀 닦으세요.”여자는 수건을 받아 들었지만어디에 대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춰 있었다.손이 떨리고 있었다.“앉으세요.”이수가 말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여자는 그 말에 그제야 다리가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
Read More

129. 유혹이 아니라 함정이어야 했다

미정은 말을 멈춘 채 손에 쥔 수건만 바라보고 있었다.수건은 이미 젖어 있었고, 그 위로도 물이 조금씩 떨어졌다.비 때문인지, 손 때문인지는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이수는 서두르지 않았다.이런 순간에 질문을 먼저 던지면 사람은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된다.지금 필요한 건 변호가 아니라 고백이었다.“술은…”이수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자주 드세요?”미정은 고개를 저었다.아주 작게.“남편이요.”그 말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상과 다르지 않았다.“처음에는,”미정이 말했다.“회사 회식 때문이라고 했어요.”“그 다음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고요.”미정은 웃으려다 말았다.웃음이 아니라 습관처럼 올라온 표정이었다.“이제는 이유를 말하지도 않아요.”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하빈은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필요할 때만 개입하는 거리. 이수는 그 존재가 지금은 든든했다.“금주 센터도 다녔었어요요.”미정이 말했다.“병원도요.”“몇 달은 괜찮았어요. 정말로.”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근데,”“술을 안 마시는 게 괜찮은 게 아니라…”“술이 없으면 불안해져요.”미정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자기도 모르게 몸 어딘가를 달래는 움직임이었다.“잠을 못 자고,”“괜히 화가 나고,”“제가 뭘 하고 있든 다 의심해요.”이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정리했다.알코올 의존.금주 실패.그리고 통제 욕구.가장 위험한 조합이었다.“오늘은,”이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더 심했던 것 같아요?”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제가,”“술 좀 그만 마시라고 했어요.”그 말은 너무 평범해서 그래서 더 무서웠다.“그게…”미정은 고개를 숙였다.“그 사람한테는 도발이었나 봐요.”그 순간, 이수의 기억 어딘가가 아주 낮게 울렸다.말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말.그 한마디가 폭력을 불러왔던 순간들.“그때,”미정
Read More

130. 설계

미정은 이수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 명령처럼 들렸기 때문이 아니라,그 말이 너무 오랜만에 자기 편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제가…”미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뭘 해야 하죠.”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미정 앞에 놓아주었다.손이 조금 덜 떨리게 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단계였다.“아무것도 새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이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말투는 차분했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지금까지 해오던 걸 조금만 다르게 하시면 돼요.”미정은 고개를 들었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남편분은,”이수가 말을 이었다.“술을 마시면 미정 씨를 의심하죠.”“네.”“그리고, 그 의심을 말로 풀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요.”미정의 손이 다시 수건을 쥐었다.“그건 폭력이고,”이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유예요.”미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그런데,”이수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자기 행동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하빈이 그 말을 받았다.“정당화하고 있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술 때문이라고 하고,”“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고,”“미정 씨가 말을 안 들어서라고 하겠죠.”미정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이미 수없이 들어온 말들이었다.“그래서,”이수가 말했다.“이 경우에는 설명이 아니라 기록이 필요해요.”“기록이요?”“네.”이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를 열었다.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였다.“미정 씨는 이제부터 하루에 한 가지만 하시면 돼요.”“뭐죠.”“시간.”이수는 펜으로 노트 위에 ‘시간’이라고 적었다.“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시간.”“집에 들어온 시간.”“말투가 바뀌는 시간.”“눈이 달라지는 순간.”펜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그리고, 그때마다 무슨 말을 했는지.”미정은 조
Read More
Dernier
1
...
1112131415
...
26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