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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등록 되지않은 이름》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21:56:11

“제작사 명단에 은서율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습니다.”

매니저의 말이 떨어지자 촬영장 입구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태혁은 잡고 있던 서율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오늘 등록된 대역 배우는 윤채린이라는 사람입니다. 한서인 씨와 체형이 비슷한 전문 대역 배우고요.”

매니저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출연자 명단에는 분명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채린.

그 아래에는 프로필 사진과 연락처, 소속 업체까지 등록되어 있었다. 서율과 관련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율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분명 은서율 이름으로 계약했어요.”

“계약서를 가지고 있습니까?”

태혁의 질문에 서율이 급히 가방을 열었다.

메일로 받은 전자 계약서를 보여 주려 했지만, 아무리 화면을 내려도 해당 메일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있었는데…….”

검색창에 업체 이름을 입력해도 결과는 없었다. 계약서를 전달했던 담당자와의 메시지 역시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서율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삭제한 적 없어요.”

태혁은 말없이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메일 휴지통에도, 보관함에도 흔적이 없었다.

“처음 연락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대역 배우 구인 사이트에 올린 프로필을 보고 연락했다고 했어요. 어제 저녁에 전화가 왔고, 오늘 아침에 계약서를 보냈어요.”

“계약금은요?”

서율이 고개를 저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 전액 지급한다고 했어요.”

“신분증 사본이나 계좌번호는 보냈습니까?”

그 질문에 서율의 얼굴이 굳었다.

“보냈어요.”

매니저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

태혁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그러나 그가 차분해질수록 주변의 긴장은 더 짙어졌다.

“연락한 번호로 전화해 보세요.”

서율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고객님의 사정으로 현재 수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도 같았다.

세 번째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누가 일부러 이 사람을 현장에 들여보낸 겁니다.”

매니저가 말했다.

“그런데 왜죠?”

서율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저 같은 사람을 여기에 보내서 얻는 게 뭔데요?”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촬영장 안쪽을 돌아봤다. 수십 명의 스태프와 장비, 실시간으로 오가는 촬영 자료.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현장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보안 사고였다.

그런데 서율은 단순히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가장 민감한 장면을 촬영할 대역으로 배치됐다.

“오늘 촬영 영상은 어디까지 저장됐습니까?”

태혁이 물었다.

촬영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직 본 촬영은 안 들어갔고 리허설 영상만 있습니다.”

“모든 카메라와 모니터 저장 장치 확인하세요. 외부로 전송된 파일이 있는지도요.”

“태혁 씨,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감독이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단순한 업체 착오일 수도 있습니다.”

“업체 착오라면 존재하지 않는 계약서를 보내고, 등록되지 않은 배우를 정확한 시간과 장소로 들여보낼 수 있습니까?”

감독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혁은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안팀 부르고 출입 기록부터 확인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채린이라는 사람에게도 연락하세요. 오늘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매니저가 급히 자리를 떠났다.

서율은 가방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저도 경찰에 가야 하나요?”

“가야 합니다.”

태혁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신분증과 계좌 정보가 넘어갔으니까 명의 도용 가능성도 확인해야 해요.”

서율은 고개를 숙였다.

돈이 급했다.

그 생각 하나로 낯선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넘겼고, 촬영 내용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이곳까지 왔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왜 또 사과합니까?”

“저 때문에 촬영도 멈추고, 다들 피해를 보고 있잖아요.”

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신을 속인 사람이 잘못한 겁니다.”

“그래도 제가 조금만 더 확인했으면—”

“절박한 사람을 골라 속이는 쪽은 그 절박함까지 계산합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율은 고개를 들었다.

태혁은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울렸다.

그때 매니저가 다시 달려왔다.

“태혁 씨, 윤채린 씨와 연락됐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오늘 촬영은 어젯밤에 취소됐다고 통보받았답니다. 제작사 쪽 사정이라고요.”

“누가 연락했죠?”

“최 실장 번호로 왔다는데…….”

모두의 시선이 제작사 직원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촬영장 한쪽에 서 있던 최 실장은 보이지 않았다.

태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최 실장 어디 있습니까?”

스태프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가 말했다.

“아까 통화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걸 봤습니다.”

매니저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받지 않았다.

잠시 후 촬영장 입구에서 보안요원이 뛰어 들어왔다.

“차태혁 배우님.”

“말하세요.”

“최 실장이 방금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을 타고 나갔습니다.”

“출입 기록은요?”

보안요원이 태블릿 화면을 내밀었다.

“은서율 씨는 최 실장의 방문자로 등록돼 있습니다.”

서율은 숨을 삼켰다.

태혁이 기록을 확인했다.

방문 목적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개인 초청 배우.

그 순간, 서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번호였다.

태혁과 서율의 시선이 동시에 화면으로 향했다.

서율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변조된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약서는 잘 받으셨습니까, 은서율 씨?”

서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혁이 즉시 휴대전화를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

“누구지?”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차태혁 씨도 거기 계시는군요.”

목소리는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역시 은서율 씨를 고르길 잘했네요.”

전화가 끊겼다.

태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촬영장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작게 깜박이는 붉은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정식 장비 목록에는 없는 카메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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