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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왕좌를 포기하면

031. 왕좌를 포기하면“지금 당장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내가 먼저 말했다.레오니스는 젖은 셔츠 앞섶을 정리하다가 손을 멈췄다.“방금 방법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가능성을 찾았습니다.”나는 목욕실 벽에 걸린 마른 수건을 끌어와 손목을 닦았다. 물기가 사라지자 검푸른 문장도 천천히 흐려졌다.계승자는 왕좌를 선택하는 동안 구속된다.문장은 분명했다.문제는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지였다.황태자라는 지위 자체인지.즉위 의식에서 한 서약인지.왕좌를 원한다는 의지인지.혹은 단지 계승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상태인지.“계약은 단어 하나 잘못 읽으면 사람을 죽입니다.”레오니스가 수건을 건넸다.“그래서 그대가 있는 거겠지.”“맞습니다.”나는 바로 받았다.“그러니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선언하지 마십시오.”“왕좌를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도?”“특히 그건 하지 마세요.”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명령이군.”“치료상 권고입니다.”“그대는 마법사 아닌가.”“오늘부터 치료사도 겸합니다.”욕조 가장자리에는 아직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나는 젖은 손목을 다시 적셨다.문장이 떠올랐다.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선택’이라는 단어만 눌렀다.마력을 아주 조금 흘려보냈다.계약문이 반응했다.심장 가까운 쪽에서.레오니스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아픕니까?”“아니.”“거짓말.”그가 나를 봤다.“조금.”나는 바로 마력을 끊었다.“역시 상태만 읽는 계약이 아닙니다.”“무슨 뜻이지?”“전하가 왕좌를 포기할 가능성을 건드리는 것만으로 반응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레오니스는 자기 가슴의 문양을 내려다봤다.“그럼 누군가는 내가 왕좌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군.”“아직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왜.”“왕좌를 버리게 만들기 위해 고통을 주는 계약일 수도 있으니까요.”레오니스 눈빛이 달라졌다.나는 바로 덧붙였다.“방향은 둘 다 열어둬야 합니다.”누가 이 계약을 만들었는지.무엇을 강요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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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선택은 선언보다 먼저 반응합니다

032. 선택은 선언보다 먼저 반응합니다계승 의식 기록은 이미 세 번 읽었다.네 번째에는 문장보다 빈칸이 먼저 보였다.나는 별궁 작은 서재 바닥에 종이를 펼쳐 놓고 원본에서 베껴 온 문구를 다시 배열했다.계승권 수락.황실 결계 승인.후계 의무.혼인 승인.왕좌의 선택.레오니스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같은 걸 계속 보면 새로 나오나?”“같은 걸 다르게 보면 나옵니다.”“마법사는 원래 그렇게 말하나.”“좋은 마법사는요.”그가 웃을 뻔하다가 말았다.나는 펜끝으로 ‘수락’과 ‘선택’을 각각 동그라미 쳤다.“전하가 황태자가 된 건 태어나면서부터입니까?”“공식 계승권은 열다섯에 받았다.”“계약이 생긴 건 넉 달 전.”“마지막 계승 확인식 직후.”그 부분이 걸렸다.지위가 조건이라면 열다섯부터 반응했어야 한다.그런데 계약은 최근에 생겼다.나는 새 종이를 꺼냈다.“의식에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레오니스가 잠시 생각했다.“제국과 왕좌를 지키겠다고.”“정확한 문구.”“기억하고 있다.”그가 천천히 읽었다.“내게 주어진 계승권을 받아들이고, 왕좌가 요구하는 의무를 외면하지 않겠다.”펜이 멈췄다.받아들이고.외면하지 않겠다.두 문장 모두 의지였다.“전하.”“왜.”“계약은 황태자라는 신분보다 전하가 한 선택에 붙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레오니스가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그럼 내가 마음을 바꾸면?”“그게 문제입니다.”나는 빈 분석용 마석을 그의 앞에 놓았다.“선언하지 말고 생각만 해보세요.”“무엇을.”“왕좌를 원하지 않는다고.”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멈췄다.“생각만?”“말하면 안 됩니다.”나는 마석 위에 손을 올렸다.“계약이 의지를 읽는지 보겠습니다.”레오니스는 눈을 감지 않았다.그저 창밖을 봤다.몇 초.아무 반응도 없었다.나는 마석의 온도를 재면서 그의 얼굴도 같이 봤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오른손 엄지가 검지 옆을 한 번 눌렀다.처음 별궁에서 통증을 참을 때도 비슷한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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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까

033. 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까시험은 끝났는데 레오니스가 돌아가지 않았다.나도 펜을 놓지 않았다.마석은 이미 식었고 계약도 안정됐다.굳이 같은 방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그런데 둘 다 그대로였다.레오니스가 먼저 말했다.“하나 묻지.”“치료 관련이면 말씀하십시오.”“치료 관련인지 모르겠군.”나는 고개를 들었다.그는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공식 제복도 망토도 없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린 평범한 차림.평범하다고 생각한 순간 이상했다.황태자에게 평범하다는 말을 붙인 적이 없었다.“내가 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나?”펜끝이 종이에 닿은 채 멈췄다.질문은 분명 술식에서 시작됐다.왕좌를 포기하면 계약이 풀릴 수 있다.그러면 치료가 끝난다.의뢰도 끝난다.나는 연구실로 돌아간다.대답은 간단해야 했다.“계약이 풀린다면—”“그 이야기가 아니다.”레오니스가 잘랐다.나는 입을 다물었다.그는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기다렸다.최근에 자주 봤던 방식이었다.손을 뻗을 수 있는데 기다리고.대신 답할 수 있는데 기다리고.내가 먼저 선택할 때까지.“무엇을 묻는 겁니까?”질문으로 돌려보냈다.레오니스가 잠깐 웃었다.“그대가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군.”“그럼 나중에 물으십시오.”“도망가는군.”“보류입니다.”“마법사들은 편리한 말을 쓰는군.”나는 펜을 내려놓았다.“전하께서 황태자가 아니면 계약 조건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와의 대체 계약도 다시 계산해야 하고요.”“그래서?”“그래서 중요합니다.”“그대에게?”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그 사실이 싫었다.나는 시선을 종이로 내렸다.왕좌.계승자.구속.그 아래에 새 단어 하나를 적으려다가 멈췄다.레오니스.지위가 아니라 이름.잉크가 펜촉 끝에서 조금 번졌다.“비비안.”“지금은 답을 못 하겠습니다.”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레오니스는 더 묻지 않았다.“알겠다.”그 한마디로 끝냈다.평소라면 한 번 더 비틀어 물었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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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대답하지 못한 질문

034. 대답하지 못한 질문다음 날 아침.나는 연구 기록 맨 위에 전혀 연구답지 않은 문장을 적었다.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는가.그리고 바로 줄을 그었다.쓸데없다.다시 적었다.왕좌 포기 시 계약 해제 가능성.이건 연구였다.아래에 조건을 붙였다.1. 계승권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2. 왕좌를 원하지 않는 의지만 생기는 경우.3. 계승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4. 황실이 강제로 계승권을 박탈하는 경우.네 번째까지 쓰고 손이 멈췄다.레오니스가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누군가 빼앗는 건 완전히 다르다.계약도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그런데 머릿속에는 다른 질문이 남아 있었다.황태자가 아니어도.나는 왜 상관해야 하지.처음에는 돈을 받고 왔다.그다음에는 계약 때문에 붙어 있었다.키스도 필요해서 했다.손도 거리 제한 때문에 잡았다.마차에서 가까이 있었던 것도 들키면 안 됐기 때문이다.연회에서 허리를 잡은 것도.목욕실에서 품 안으로 숨은 것도.전부 이유가 있었다.그러면 이유가 사라지면 끝이다.논리적으로는.문이 두드려졌다.마리벨이었다.그녀는 내 앞에 아침 쟁반을 놓다가 기록지를 봤다.“또 밤새우셨어요?”“아닙니다.”“촛불이 세 개나 다 탔는데요.”“한 번에 켜놓았습니다.”마리벨이 나를 가만히 봤다.거짓말을 잘못했다.그녀가 종이 위를 읽으려 하기에 손으로 덮었다.“연구입니다.”“아무것도 안 읽었어요.”“그럼 됐습니다.”마리벨이 웃음을 참았다.“전하께서는 오늘 오전 회의라 늦게 오신대요.”펜이 멈췄다.내가 묻지도 않았는데.“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전속 시녀니까요.”당연한 대답이었다.그런데 나는 시계를 봤다.계약 안정 시간은 충분했다.오늘 오전에는 가까이 있을 필요가 없다.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시계를 한 번 더 봤다.마리벨이 나가고 방이 조용해졌다.오전 회의는 두 시간.황태자궁에서 별궁까지 돌아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세 시간 가까이 얼굴을 못 본다.예전이라면 그게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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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황후의 두 번째 조사

035. 황후의 두 번째 조사 전속 시녀 비비에게 배정된 방은 별궁 후관 끝에 있었다. 작았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서랍장 하나. 시녀 방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안에 시녀가 절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마리벨은 며칠 전부터 방을 ‘사람 사는 것처럼’ 만들어 놓으라고 했다. 빗에는 실제로 머리카락이 몇 올 끼어 있었고, 세탁한 시녀복도 두 벌 걸려 있었다. 서랍에는 싼 비누와 바느질 도구까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층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방이었다. 고대 황실어 필사본. 마력석 세 개. 계약문 복사본. 아르망 계열 봉인술 해설서. 그리고 비비안 아르델 이름으로 발행된 왕립 마도학회 신분패. “이걸 다 숨겨야 합니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에드윈이 문 앞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황후궁 시녀감과 기록관이 십오 분 안에 옵니다.” “왜 내사국이 아니죠?” “공식 이유는 시녀 배치 점검입니다.” “비공식 이유는.” “비비가 비비가 맞는지 보려는 거겠죠.” 좋지 않았다. 카시안은 절차로 조사했다. 황후는 생활 흔적을 볼 것이다. 시녀가 정말 이 방에서 자는지. 무엇을 읽는지. 어떤 글씨를 쓰는지. 나는 학회 신분패를 손에 쥐었다. “연구 자료는 작은 서재로 옮기겠습니다.” 나는 가장 위험한 물건부터 골랐다. 신분패. 마력 서명은 위조할 수 없다. 이걸 들키면 ‘비비가 비비안의 물건을 훔쳤다’고 둘러대는 것도 어렵다. 두 번째는 계약문 필사본. 레오니스의 가슴에 있는 문장과 같은 구조가 적혀 있다. 세 번째는 아르망 해설서. 하나만 들켜도 설명이 필요했다. 셋이 같이 나오면 설명이 아니라 체포 순서를 고민해야 했다. “복도에서 마주칩니다.” 에드윈이 창밖을 봤다. “후원 쪽도 막혔습니다.” 시간이 줄었다. 나는 계약문 필사본을 침대 매트리스 아래로 밀어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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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침대 아래에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036. 침대 아래에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침대 아래는 생각보다 낮았다. 그리고 먼지가 많았다. 나는 첫 번째로 시녀 방 청소 상태를 평가했다. 두 번째로 다시는 침대 아래에 숨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바깥에서 문이 완전히 열렸다. “전하?” 황후궁 시녀감 목소리에 당황이 섞였다. 레오니스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 시야에는 그의 부츠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비비의 방을 확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지금 내 심부름 중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료를 옮기라는 그의 명을 받고 있었다. 지금은 침대 아래에 있을 뿐. “방을 잠깐 보겠습니다.” “보게.” 시녀감과 기록관의 신발이 들어왔다. 나는 숨을 줄였다. 레오니스의 부츠가 내 얼굴에서 손 하나 거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약 허용 거리 같은 건 따로 계산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가까워서 굳이 잴 필요도 없었다. 가죽 부츠에서 젖은 돌바닥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오전 회의실에서 바로 온 사람이 이런 먼지 많은 방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계약은 조용했다. 내 심장만 그렇지 않았다. 침대 아래 밀어 넣은 계약문은 내 왼쪽 어깨 바로 옆.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는다. 문제는 종이 끝이 침대 바깥으로 아주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오니스의 발끝이 움직였다. 종이 위를 밟았다. 정확하게. 내 손이 멈췄다. 그는 아래를 보지 않았다. 시녀감이 옷장을 열었다. 옷걸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시녀복이 두 벌뿐이군요.” “세탁 중인 게 하나 있습니다.” 마리벨이 문밖에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빗은 쓰고 있고, 비누도 줄었네요.” 이번에는 정말 생활 검사였다. 나는 침대 아래에서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남의 비누가 얼마나 닳았는지까지 확인하는 직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시녀감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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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발끝 하나

037. 발끝 하나보였다.내 신발 끝이.나는 움직이지 못했다.발을 당기면 바닥에서 소리가 난다.그대로 두면 들킨다.기록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그 순간 레오니스의 부츠가 옆으로 움직였다.내 신발 끝 앞을 정확히 가렸다.그는 침대 곁에 서서 외투 자락을 자연스럽게 내렸다.“기록관.”“예, 전하.”“안전 점검 명령서를 보여라.”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레오니스는 받지 않았다.“황후궁 직인만 있군.”“예.”“황태자 별궁 내부 구역을 조사하려면 궁무부 공동 승인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침묵.나는 침대 아래에서 눈을 깜빡였다.저 규정이 진짜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하지만 기록관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추가 승인을 받아오겠습니다.”“그리하지.”발소리가 멀어졌다.문이 닫혔다.그래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레오니스가 기다렸다.복도에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제 나와도 된다.”나는 천천히 몸을 밀어냈다.먼지가 머리카락에 붙었다.치마에는 회색 자국이 났다.무릎으로 기어 나온 뒤 첫 번째로 한 말은 정해져 있었다.“다시는 침대 아래에 안 숨습니다.”레오니스가 내려다봤다.“내 침대 밑은 아니었는데.”“어느 침대든요.”“편하지 않았나?”나는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를 떼었다.“전하 부츠가 너무 가까웠습니다.”“내가 가린 건데.”“그래서 더 가까웠습니다.”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나는 웃지 않았다.그러려 했는데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레오니스가 그걸 봤다.시선이 잠깐 멈췄다.나는 바로 계약문을 꺼냈다.“자료부터 확인하겠습니다.”“지금?”“다시 올 수 있습니다.”그는 더 놀리지 않았다.침대 위에 종이를 펼쳤다.구겨진 모서리.부츠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나는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이건 연구 자료입니다.”“미안하군.”“배상하실 겁니까?”“얼마면 되지?”고개를 들었다.“종이는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그럼 뭘 배상하지?”나는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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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계약은 숨을 곳을 가리지 않습니다

038. 계약은 숨을 곳을 가리지 않습니다황후궁 조사 인원은 그날 다시 오지 않았다.대신 궁무부 승인 요청이 올라갔다는 소식만 들어왔다.시간을 번 셈이었다.나는 별궁 작은 서재로 자료를 전부 옮겼다.이번에는 침대 아래에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레오니스가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정말 아무것도 안 남겼나?”“확인하시겠습니까?”“침대 아래까지?”나는 그를 봤다.“전하.”“농담이다.”요즘 저 사람은 농담이 늘었다.내가 원인인지 아닌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어젯밤부터 정리한 거리 반응표를 펼쳤다.숨었을 때.마차 안.서가 틈.연회장.목욕실 가림막.그리고 침대 아래.상황은 전부 달랐다.그런데 공통점이 있었다.가까워질수록 계약은 안정됐다.이건 이미 아는 사실이다.문제는 최근 변화였다.“이제 같은 거리에서도 반응이 덜합니다.”레오니스가 종이를 봤다.“좋은 건가?”“대체 계약이 적응한 걸 수도 있고, 원래 계약이 약해진 걸 수도 있습니다.”“그대에게 부담이 옮겨가서 그런 건?”손목을 봤다.28화에서 처음 전이된 문양은 지금 거의 흐려져 있었다.“그 가능성도 있습니다.”레오니스 표정이 굳었다.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나쁜 징후만은 아닙니다.”“그대가 아픈데?”“지금은 안 아픕니다.”“그때는.”“그때는 아팠고요.”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대신 내 손목에 손을 뻗다가 멈췄다.닿기 직전.나는 그 손을 봤다.“확인하셔도 됩니다.”그제야 손가락이 손목 안쪽에 닿았다.문양을 확인하려는 접촉이었다.그런데 계약은 이미 안정적이었다.필요 없는 접촉.20화 때와 같은 종류의 생각이 떠올랐다.나는 바로 손을 빼지 않았다.레오니스도 힘을 주지 않았다.잠깐.그 정도 뒤에 내가 먼저 손을 거뒀다.“정리하면.”목소리가 조금 빨랐다.“계약은 숨을 곳을 가리지 않습니다.”“그건 알아.”“침대 아래든, 서가 사이든, 목욕실이든 같은 거리면 비슷하게 반응합니다.”레오니스가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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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비비안의 세계

039. 비비안의 세계왕립 마도학회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부터 달라졌다.시녀 비비처럼 반걸음 뒤에 설 필요가 없었다.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었다.회색 시녀복 대신 짙은 남색 로브를 입고, 머리도 평소처럼 높게 묶었다.가슴에는 정회원 표식.비비안 아르델.내 이름이 제대로 적혀 있었다.레오니스는 정식 자문을 받는 황태자 자격으로 함께 왔다.에드윈이 외부에 공개할 명목도 만들었다.황실 고대결계 문법 검토.실제 목적과 아주 멀지는 않았다.학회 문이 열리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잉크.마석 가루.오래된 종이.그리고 누군가 태운 실험약 냄새.문지기가 내 정회원 표식을 보자 별다른 확인도 없이 문을 열어줬다.“오랜만입니다, 아르델 경.”“삼 주밖에 안 됐습니다.”“여기서는 사흘만 안 보여도 실종입니다.”그 말에 옆의 레오니스가 나를 봤다.나는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별궁에서는 내가 사라지면 계약이 흔들렸다.여기서는 사흘만 안 보여도 동료들이 찾는다.같은 ‘필요’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아르델 경!”복도 끝에서 한 연구자가 달려왔다.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실험실 또 태웠어요?”“이번에는 제 방 아닙니다.”“그 말은 누군가의 방은 태웠다는 뜻이네요.”주변에서 웃음이 났다.나도 웃었다.아주 자연스럽게.그제야 레오니스가 옆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개를 돌리자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호박색 눈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왜 그러십니까?”“아니.”대답이 짧았다.나는 더 묻지 않았다.학회 안쪽 회의실에는 고대 계약어 자료가 준비돼 있었다.내가 요청한 건 ‘선택’과 ‘계승’을 함께 쓰는 옛 문장 사례였다.황실 계약이라고 밝히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었다.연구원들은 문법만 보면 된다.나는 로브 소매를 걷고 바로 책을 펼쳤다.“이 판본은 틀렸어요.”맞은편 연구원이 당황했다.“첫 장도 안 보셨는데요.”“서문 연도가 안 맞습니다.”책을 뒤집어 판권 기록을 보여줬다.“후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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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그 남자는 왜 웃게 합니까

040. 그 남자는 왜 웃게 합니까“비비안.”그 이름을 학회에서 듣는 건 자연스러웠다.문제는 부른 사람이 너무 자연스럽게 가까이 왔다는 점이었다.데미안 로셰르.왕립 마도학회 계약술 연구원.몇 번 같이 검증 작업을 했고, 한 번은 내 의뢰인이기도 했다.그는 회의실 문에 기대 서서 웃고 있었다.“황궁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맞았네요.”나는 펜을 던질 뻔했다.“잡혀간 게 아닙니다.”“그럼 왜 한 달 가까이 학회에 얼굴도 안 비쳤습니까?”“국가 기밀입니다.”“그 말이 더 잡혀간 것 같은데.”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데미안은 예전부터 말을 저렇게 했다.진지한 얼굴로 쓸데없는 결론을 내리고, 내가 반박하면 더 즐거워했다.“로셰르 경.”에드윈이 먼저 황태자를 소개하려 했다.데미안이 뒤늦게 레오니스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전하. 결례했습니다.”“괜찮다.”레오니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그런데 나는 알았다.조금 더 짧았다.데미안은 내 옆에 쌓인 자료를 봤다.“계승 계약 문법?”“비슷한 겁니다.”“‘선택’ 때문에 왔죠?”손이 멈췄다.“어떻게 알아요?”“아르델 경이 이런 낡은 판본까지 뒤질 때는 보통 단어 하나가 마음에 안 들 때니까.”그가 책 한 권을 꺼냈다.“이거 봤습니까?”내가 찾던 문법 주석서였다.“어디 있었어요?”“내가 빌려갔죠.”“반납일 지났잖아요.”“그래서 직접 가져왔습니다.”“연체료 내세요.”“연구자끼리 너무하네.”“규정입니다.”데미안이 웃었다.나도 따라 웃었다.책을 받으려 손을 뻗는 순간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책이 꼭 필요한가?”레오니스였다.나는 그를 봤다.“네. 지금까지 찾은 것 중 가장 정확합니다.”“그렇군.”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데미안이 책을 내게 건넸다.손가락이 잠깐 닿았다.아무 일도 없었다.계약도 반응하지 않았다.당연했다.그런데 레오니스의 시선이 그 짧은 접촉에 머문 걸 봤다.“전하?”“왜.”“문양이 불편하십니까?”“아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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