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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비상계단

『오늘 일정: 화요일 밤, 재단 수장고 작업 마무리』비상등이 켜졌을 때, 내 손은 작업대 끝을 잡고 있었다.이헌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불이 꺼지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셔츠의 접힌 소매가 보였다. 나는 손부터 내려다봤다. 풀을 닦아 낸 손가락에 종이 가루가 남아 있었다.“움직이지 마세요. 바닥에 상자가 있어요.”이헌이 발치의 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나는 그제야 한 발 물러났다. 작업대 모서리가 허리에 닿았다.천장 환풍기 소리가 멎어 있었다. 문 쪽에서 초록색 불이 들어왔지만 서가 안쪽까지 밝히지는 못했다.“책부터 덮을게요.”나는 작업대 위의 고서를 확인했다. 덧댄 종이가 아직 마르지 않아 책을 닫을 수는 없었다. 받침을 바로 놓고 위에 얇은 보호지를 얹었다. 도면 봉투는 이헌이 서류 가방에 넣었다.“그건 버리지 마세요.”“보관해 둘게요.”“제가 다시 보자고 하면요.”“보여 드릴 겁니다.”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시각을 확인하는 동안 이헌의 전화가 울렸다.이헌은 받자마자 수장고 쪽을 한 번 돌아봤다.“네. 지금 안에 있습니다.”수화기 너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복원 기록지를 접지 않고 가방 안쪽에 넣었다.“알겠습니다. 나가서 연락드리죠.”전화를 끊은 이헌이 문을 열었다.“보수 공사 중에 전원이 끊겼답니다. 복구에 시간이 걸려요.”“수장고에 사람 있는 건 모르셨대요?”“퇴실 확인이 빠졌다고 합니다.”나는 작업대 옆 습도계를 봤다. 전지가 들어가는 화면은 켜져 있었다.“전기 들어오면 제습기부터 확인해 달라고 해 주세요. 꺼졌다가 저절로 안 켜지는 기계도 있어요.”이헌은 휴대폰에 짧게 입력했다. 내가 문밖으로 나서기 전에 작업대를 한 번 더 살폈다.“잠금은 제가 합니다.”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 이헌이 내 뒤에서 문을 닫고 손잡이를 당겨 확인했다.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복도 끝 승강기 표시창은 꺼져 있었다.“주차장으로 나가죠. 계단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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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웨딩 스튜디오

『오늘 일정: 목요일 오후, 결혼사진 상담』경비는 손전등을 내리고, 정전 때문에 안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도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인사만 하고 주차장으로 먼저 나갔다. 차에 타서 거울을 보니 이헌은 경비와 함께 계단 문 앞에 서 있었다.◈이틀 뒤 오후, 스튜디오 문 앞에서 나는 문을 잡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경란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려는데 가방 끈이 손잡이에 걸렸다. 끈을 빼는 동안 직원이 다가와 문을 받쳐 줬다.“상담 예약하셨을까요?”“강주원 이름으로 했어요.”내 대답이 끝나기 전에 경란이 코트를 벗었다.“전화한 사람이 나예요. 아들은 조금 늦고요.”직원은 예약표를 확인하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주원에게 보낸 도착 문자는 아직 읽지 않은 채였다.상담실에는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경란이 가운데 앉아 가방을 옆자리에 올렸다. 나는 남은 의자를 당겼다.테이블 위에는 앨범과 천 견본이 있었다. 벽에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고 선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는 사진보다 액자 아래 들뜬 뒷종이를 먼저 봤다.“차는 뭘로 드릴까요?”“나는 따뜻한 물. 이 애도 같은 걸로 줘요.”가방을 무릎에 놓았다. 직원이 내 앞에 있던 커피 안내를 거뒀다.“신랑님 오시면 함께 보실까요?”“먼저 하죠.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경란이 앨범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가방 위에 얹었다.직원이 첫 장을 폈다. 창가에 선 신부 사진이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밝은 실내 촬영이고요. 신부님께서는 이런 분위기와 정원 촬영 중에 어느 쪽을…….”“실내로 해요. 바깥은 날씨 맞추기 번거롭고.”경란이 다음 장을 넘겼다.“배경은 이게 낫겠네요. 너무 빈 곳은 사진이 허전해.”직원의 펜이 예약표 위에서 움직였다. 나는 사진을 더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장이 넘어가면서 모서리가 손등에 닿았다.“신부님은 평소에 사진 찍는 거 좋아하세요?”“많이 찍지는 않아요.”“그러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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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스튜디오 옥상

『오늘 일정: 목요일 오후, 결혼사진 상담·촬영 자리 보기』경란이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치웠다.“여기 앉아. 주원이가 뭘 골랐는지 봐 달래.”이헌은 의자를 당기기 전에 나를 봤다. 나는 내려놓은 펜을 예약표 위로 옮겼다.“안녕하세요, 실장님.”“안녕하세요.”직원이 이헌 앞에 정장 사진을 놓았다. 경란은 아까 고른 검은 재킷을 짚었다.“이거 어때? 주원이 평소 입는 것하고 비슷하지?”“본인한테 사진 보내시면 됩니다.”“보냈는데 답이 없잖아. 너는 같은 회사에 있었으면서 옷 크기도 모르니?”“같은 건물에 있었던 겁니다. 치수는 모릅니다.”직원이 예약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크기는 나중에 신랑님께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여하실지만 정해 주셔도 돼요.”“빌리지는 않을 거예요. 집에 있는 걸 입힐 거니까.”경란이 대답했다. 이헌은 정장 사진을 덮지 않고 직원 쪽으로 돌려놓았다.“그러면 가져올 옷을 확인할 날짜만 알려 주세요.”직원이 빈칸에 메모했다. 나는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넣었다. 주원에게 받은 문자가 화면에서 사라졌다.이헌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넥타이 매듭 아래를 손가락으로 당겨 느슨하게 하고 앉았다. 반듯하던 매듭이 옆으로 조금 돌아갔다. 나는 펼쳐진 앨범으로 눈을 내렸다.“드레스는 골랐습니까?”이헌이 물었다.“입어 볼 것만요.”“두 벌 준비하기로 했어요.”직원이 표시한 사진을 펼쳤다. 경란이 긴 소매 쪽을 손으로 눌렀다.“나는 이게 낫더라. 집안 어른들도 보실 건데.”이헌은 사진보다 내 앞에 놓인 예약표를 먼저 봤다.“윤나경 씨가 고른 건 어느 겁니까?”나는 짧은 소매가 달린 사진을 짚었다.“이쪽이요. 팔을 움직이기 편하대요.”“그럼 입어 보고 정하면 되겠네요.”“그러기로 했어.”경란이 앨범을 덮었다. 직원이 두 벌 모두 적혀 있는지 확인해 줬다. 나는 종이 사이에 끼워진 표시를 보다가 물잔을 들었다.“장소는 더 보실까요?”직원이 물었다.“실내는 다 봤고요. 옥상만 남았어요.”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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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경란의 차

『오늘 일정: 목요일 저녁, 상담 마무리』“사진 찍을 옥상 자리를 봤어요.”나는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생수병을 집었다. 뚜껑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다시 몸통을 쥐었다.경란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의자 쪽을 봤다.“직원은?”“다른 의자 사진을 가지러 내려갔어요. 회장님이 앉으실 건 등받이가 더 높아야 할 것 같아서요.”이헌이 벽 쪽 의자를 가리켰다.“팔걸이도 낮습니다. 일어나실 때 불편하실 겁니다.”경란의 눈이 의자에서 이헌의 목 아래로 옮겨 갔다. 나는 생수병을 가방에 넣었다.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지퍼를 열어 둬야 했다.“넥타이는 왜 그러니?”이헌이 매듭에 손을 댔다.내가 펴 놓은 셔츠 깃 끝이 조금 들려 있었다. 나는 가방 안쪽으로 물병을 더 밀었다.“옥상에 나와서 풀었습니다.”이헌은 자기가 느슨하게 한 매듭을 아래로 조금 내렸다. 경란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말했다.“추운데 올라와서 별걸 다 보고 있네. 내려와. 밑에서 기다려.”문이 닫히자 나는 가방에서 손을 뺐다. 이헌과 나 사이에 놓인 테이블 끝을 보고 있었다.“사진은 제가 받을게요.”“네.”이헌은 먼저 문을 열었다. 바람에 문이 밀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고 비켜섰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문을 지나갈 때 넥타이 끝이 보였다. 매듭을 바로잡느라 잡았던 자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계단 아래에는 직원이 의자 사진을 들고 서 있었다.“어머님께서 내려오시라고 하셔서요. 상담실에서 보실까요?”“네. 바닥 틈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나는 직원 옆으로 갔다. 이헌은 뒤에서 옥상 문을 닫았다. 계단이 끝날 때까지 발소리가 따라왔다.상담실에서 경란은 이미 내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코트를 받았다.“입어. 차 타면 바로 갈 거야.”“사진만 확인할게요.”직원이 새로 가져온 사진을 펼쳤다. 나는 팔걸이와 좌판이 함께 나온 것을 골라 예약표 위에 놓았다.“회장님 의자는 이걸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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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솔빛동 골목

『오늘 일정: 토요일 저녁, 작업실 정리』나는 작업표 귀퉁이에 적어 둔 말을 새 종이로 옮겼다.『해윤 부지 12월 말』접힌 쪽지를 읽을 수 있었던 건 경란이 상자를 닫기 전까지였다. 차에서 내린 뒤 바로 적었지만, 글씨 모양까지 옮기지는 못했다.나는 그 아래에 물음표를 찍었다.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공장 소리가 먼저 들렸다. 부지에 관한 연락이 왔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기계 점검 때문에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듣고 끊었다.휴대폰에는 아직 새 연락이 없었다.“그거 오늘 보낼 거야?”다은이 작업대 건너편에서 물었다. 나는 종이를 뒤집어 가죽 가방 안에 넣었다.“아니. 개인적으로 확인할 거.”“그럼 발송할 건 이걸로 끝이지?”다은이 묶어 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나는 주소를 확인하고 테이프 끝을 눌렀다. 오래된 사진첩을 맡긴 손님은 표지를 새로 씌우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닳은 모서리를 남긴 채 벌어진 부분만 붙였다.“월요일에 열어 보시고 연락 달라고 써 뒀어.”“좋아. 나 이제 청소한다.”다은이 빗자루를 가져왔다. 나는 프레스기에서 뺀 종이를 눕히고 무게추를 올렸다. 창밖에서는 붕어빵 틀을 닫는 소리가 났다.“냄새 올라온다.”다은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아까부터 네가 계속 말하잖아.”“네가 한 번도 사러 안 가니까.”나는 앞치마 끈을 풀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골목 입구입니다. 책 맡겨도 됩니까.』보낸 사람 이름을 확인한 뒤 창으로 갔다. 간판 아래 이헌이 서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내가 창문을 조금 열자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문자로 답하지 못한 채 눈이 마주쳤다. 이헌이 휴대폰을 넣었다.“누군데?”다은이 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책 맡기러 오셨어.”나는 창문을 닫고 앞치마를 벗었다. 주머니의 접지칼과 바늘을 꺼내 작업대에 올려놓았다.“손님이면 올라오시라고 해.”“금방 올게.”계단을 내려가다 셔츠 소매에 묻은 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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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작업대 셋째 칸

『오늘 일정: 월요일, 시집 해체』“어디서 보셨습니까.”이헌이 접은 소매를 누르며 물었다. 나는 시집 아래의 받침을 조금 옮겼다.“모르겠어요. 표지 천 때문인가.”“천이 흔한 겁니까.”“이런 건 많이 썼어요. 안쪽으로 접어 붙인 모양이 눈에 익어서요.”기울여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책을 눕히고 벌어진 등 쪽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헌이 가까이 오려다 작업대 모서리에서 멈췄다.“안쪽도 봐야 알겠어요.”“오늘 다 보실 겁니까.”“아뇨. 월요일에 시작할 거예요. 뜯기 전 상태부터 남겨야 해서요.”나는 접수표의 작업 항목을 짚었다. 표지와 책장을 떼어 낸 뒤 끊긴 실을 걷어 내야 했다. 이헌은 설명을 듣고 펜을 들었다.“남겨야 할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버릴 건 따로 모아 둘게요. 낡은 실도요.”이헌이 서명한 접수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시집을 보관함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이헌의 손은 빈 안주머니 앞에 잠깐 머물렀다. 나는 보관함을 작업대 셋째 칸에 놓았다.◈월요일 오후, 나는 같은 칸에서 보관함을 꺼냈다.다은은 창가에서 가계부를 싸고 있었다. 천을 씌운 표지가 포장지 밖으로 조금 나왔다.“끈은 아직 묶지 마. 할머니 오시면 안쪽부터 보실 거야.”“알아. 벌써 전화 두 번 하셨어.”“또 찢어질까 봐 걱정하시더라.”“그래서 펼쳐 놓고 기다린다고 했어.”다은이 끈을 내려놓고 내 작업대로 왔다. 나는 앞치마에서 바늘을 꺼내 도구 받침에 놓았다. 바늘을 굴려 휜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카메라를 켰다.“드디어 삼촌님 책 하는 거야?”렌즈 덮개를 놓칠 뻔했다.“손님 책이야.”“손님 이름이 강이헌이잖아.”“그러니까 이름으로 불러.”“네 약혼자 삼촌이라며. 그럼 나도 조심해야지.”다은이 보관함에 붙은 접수표를 봤다. 나는 시집을 꺼내며 팔로 접수표를 가렸다.“앞에서는 그러지 마.”“앞에서는 실장님이라고 했어.”“그럼 뒤에서도.”다은은 대답 대신 책 받침을 가져왔다. 늘 쓰던 쐐기 받침이었다. 내가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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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작업실 소파

『오늘 일정: 월요일 저녁, 작업 정리』“조금 남았어요. 연락하고 오시지.”나는 앞치마에서 손을 떼고 작업대 옆으로 나왔다. 주원은 코트 단추를 풀며 창가부터 안쪽 방까지 둘러봤다.“근처에 왔다가. 전화하면 바쁘다고 할 것 같아서.”“바쁘면 오셔도 똑같아요.”“앉아는 있어도 되잖아.”주원이 소파를 가리켰다. 포장용 천과 종이 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천을 접어 상자 위에 올렸다.“가방은 바닥 말고 여기 두세요. 종이 가루 묻어요.”“나보다 가방 걱정부터 하네.”“가죽에 풀 묻으면 닦기 어려워요.”주원이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소파 가운데가 꺼지자 무릎 위 코트 자락을 당겼다. 연회장 의자에서는 보지 못한 자세였다.나는 작업대로 돌아가 시집을 덮었다. 받침은 건드리지 않고 종이만 얹었다. 주원이 등 뒤에서 물었다.“그건 아직도 고쳐?”“오늘 시작했어요.”“다 뜯어 놓은 것 같은데.”“상태부터 보려고요. 어디가 어떻게 끊어졌는지 알아야 다시 묶죠.”주원은 대답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나는 작은 가위를 닫고 칼날에 덮개를 씌웠다. 보관함 옆 휴대폰에는 이헌이 보낸 문자가 남아 있었다.기다리겠다는 말 아래로 답을 쓰지 못했다.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다은은 문을 팔꿈치로 밀고 들어왔다.“나경아, 국물 따로 담아 달랬는데…….”말을 멈춘 다은이 주원과 나를 번갈아 봤다. 봉투 안에서 용기가 기울어 나는 얼른 한쪽을 받았다.“손님 오신 줄 몰랐어요.”“갑자기 왔습니다. 강주원입니다.”“고다은이에요. 나경이 친구고 여기서 같이 일해요.”주원이 일어나려 하자 다은이 빈손을 들어 말렸다.“그냥 앉아 계세요. 여긴 식탁도 접어야 나와요.”나는 벽에 세워 둔 상을 폈다. 다은이 용기를 꺼내는 동안 작업대 쪽 문을 닫았다. 종이를 둔 방과 소파 사이에 문 하나가 놓였다.“두 분 드세요. 난 잠깐이면 돼.”주원이 말했지만 다은은 뚜껑을 열고 수저를 셌다.“나눠 먹으면 돼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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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갈월 추모공원

『오늘 일정: 수요일, 시집 표지 확인』휴대폰이 울려 나는 풀 묻은 붓을 받침에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강이헌 실장님이라고 떠 있었다.전화를 받기 전에 작업대의 시집부터 봤다. 분리한 표지 위에 얇은 종이를 덮어 둔 참이었다.“네, 실장님.”“표지에 있던 글자, 사진이 있으면 도움이 됩니까.”“어떤 사진인데요?”“어머니가 책을 들고 계신 사진이에요. 앞표지가 보입니다.”나는 덮어 둔 종이를 들어 올렸다. 제목 아래는 가죽이 벗겨져 글자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도움이 돼요. 보내 주실 수 있어요?”“지금 가진 건 없습니다. 사진이 있는 곳에 가려는데, 같이 가겠어요?”붓 끝에서 떨어진 풀이 받침에 고였다. 나는 붓을 물통에 담갔다.“어디로 가는데요?”“갈월 추모공원이요.”대답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작업 기록지에 적어 둔 서은숙이라는 이름이 보였다.“오늘이 어머니 기일입니다.”나는 의자에서 등을 뗐다.“그럼 다른 날 가도 돼요. 사진은 급하지 않아요.”“오늘 가는 길이라 물었어요. 불편하면 사진만 찍어 오겠습니다.”시집 옆에는 어제 적은 의뢰서가 있었다. 원래 형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없어진 부분을 만들지 않겠다고 써 뒀다.“같이 갈게요. 직접 보고 여쭐 것도 있어요.”“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통화가 끊긴 뒤 달력을 확인했다. 오후에 오기로 한 손님은 없었다. 나는 다은에게 외출 시간을 말하고 시집의 치수를 적은 수첩을 꺼냈다.“그 책 때문에 가?”다은이 포장 끈을 자르며 물었다.“응. 원래 표지가 나온 사진이 있대.”“책은 두고?”“지금은 움직이면 안 돼.”나는 표지 위에 종이를 다시 얹었다. 가방에 수첩과 휴대폰을 넣고, 목에 걸린 실이 옷깃 밖으로 나왔는지 확인했다.다은은 묻지 않고 내 앞치마를 받아 걸었다.◈검은 세단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이헌은 차 밖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검은 코트 안으로 넥타이가 보였다. 스튜디오 옥상에서 고쳐 줬던 매듭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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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돌아오는 국도

『오늘 일정: 수요일 저녁, 추모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이헌이 내 앞을 가로막지 않고 옆에 섰다. 석진의 비서는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무슨 일입니까.”이헌이 묻자 비서가 화면을 내려다봤다.“부회장님께 연락드리던 중입니다.”“여기 온 것도 형님 지시예요?”“확인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이헌은 더 묻지 않았다. 비서는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비서의 얼굴보다 주머니 밖에 남은 손을 봤다.“가시죠.”이헌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나는 타기 전에 비서를 돌아봤다.“사진 찍으셨어요?”차 열쇠를 꺼내던 비서의 손이 멈췄다.“부회장님께 전화드리려던 겁니다.”찍지 않았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가방을 먼저 좌석에 놓았다.“저희가 같이 왔다고 전하실 거면, 시집 표지 사진을 확인하러 왔다고도 전해 주세요.”비서가 이헌을 봤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 탔다.문이 닫힌 뒤에도 이헌은 잠시 밖에 서 있었다. 유리 너머로 비서의 입이 움직였지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헌이 운전석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안전띠를 채우고 있었다.“제가 말하지 않는 게 나았어요?”“아니요.”이헌이 시동을 걸었다.“윤나경 씨가 설명할 일은 아니었어요.”“그럼 실장님만 설명하실 거예요?”이헌은 출발하기 전에 거울을 봤다. 비서는 아직 차 옆에 서 있었다.“오늘 같이 온 이유는 제가 말할게요.”나는 가방 손잡이에 걸린 실밥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추모공원 입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이헌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국도로 들어서자 길가의 가게들이 드문드문 끊겼다. 유리 아래쪽으로 더운 바람이 나왔다. 나는 코트 단추를 풀고 무릎 위에 가방을 눕혔다.휴대폰에는 아까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틀 가장자리까지 나온 것과 책만 크게 찍은 것이 나란히 있었다. 책 사진을 열어 흐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뒤 화면을 껐다.“사진은 잘 나왔어요.”“다행이네요.”“표지 작업은 내일부터 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 선이 있어서 방향을 정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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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주차장 2층

『오늘 일정: 수요일 밤, 집 근처 공영주차장』이헌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셔츠 끝을 누르던 엄지가 내려갔다. 손을 놓으려 하자 이헌이 손바닥을 위로 돌렸다.나는 손목에서 손바닥으로 손을 옮겼다.“대답 안 하셨어요.”“들었어요.”“듣기만 하실 거예요?”이헌이 우리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맞닿았지만 깍지를 끼지는 않았다.“피하지 않겠다는 말, 없던 걸로 못 하겠습니다.”“없던 걸로 하라고 안 할 거예요.”“나중에 마음이 달라지면 말해 줘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의 손가락이 내 손을 감쌌다. 오른손 검지에 붙인 밴드는 건드리지 않았다.앞유리 너머에서 화물차가 움직였다. 전조등이 차 안을 비췄다가 지나갔다. 나는 손을 빼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렸다.“가야겠어요.”“네.”대답하고도 이헌은 잠깐 그대로 있었다. 내가 먼저 손을 놓고 안전띠를 맸다. 이헌이 거치대의 종이컵을 들었다.“남았어요?”“조금요.”“식었을 텐데.”“마실 수 있어요.”나는 남은 율무차를 마셨다. 컵 바닥에 붙은 가루를 보다가 내려놓았다. 이헌은 빈 컵을 겹쳐 차 안의 봉투에 넣었다.차가 국도로 나갔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주원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이헌을 봤다.“지금 할게요.”이헌이 소리를 낮췄다. 길을 안내하던 목소리가 작아졌다.주원은 신호가 한참 간 뒤에 받았다.“나경 씨,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오늘 실장님하고 갈월 추모공원에 다녀왔어요. 맡기신 시집 표지를 확인할 사진이 있어서요.”“삼촌이랑?”“네. 어머님 사진에 책이 찍혀 있었어요.”이헌은 앞을 보고 운전했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조금 더 붙였다.“그 책 아직 안 고쳤어?”“확인할 게 남았었어요. 이제 표지 작업할 수 있어요.”“그렇구나. 난 또 집에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네.”주원이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잠깐만, 하고 말했다.“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다른 데서 들으시기 전에 말씀드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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