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재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주연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차갑지 않은 미소였다."사람이 행복해질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그녀의 마지막 말이 룸 안에 조용히 머물렀다.재혁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건축가를 만나 봤다.누군가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이야기했고,누군가는 랜드마크가 될 건물을 꿈꿨다.하지만 사람의 행복을 먼저 이야기하는 건축가는 처음이었다.잠시 후 재혁이 조용히 물었다."그래서 행복나무 보육원 설계도 그렇게 나온 거군요."주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이 하루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잖아요.""공간 하나가 아이들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재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회의 때도 느꼈지만...""행복나무 이“듣자 하니 요즘 그 녀석이 아가씨 주위를 맴돌며 성가시게 하는 모양인데…….” 이경환이 지혜를 똑바로 바라봤다. “두 사람은 정확히 어떤 관계입니까?” 지혜는 잠시 숨을 골랐다. “……민성 씨와는 깊은 관계가 아닙니다.” 지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일 뿐이에요.” 이경환은 잠시 지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럼 다행이네.” 지혜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무슨 뜻이신가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서로 복잡해질 일은 없겠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 처음부터 이 자리를 만든 이유가 분명해졌다. 이경환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김지혜 씨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습니다.” 지혜의 표정이 굳었다. “저를…… 조사하셨다고요?” “보육원 출신에, 임대아파트 거주.” 이경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복지센터 직원.” 지혜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움켜쥐어졌다. 불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이 말하지 않은 인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연이 떠난 뒤, 지혜의 집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전에는 늘 혼자였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주연과 함께 살며 온기를 나눴던 몇 달간의 시간 탓인지 요즘은 해가 진 뒤 텅 빈 집으로 돌아올 때면 묘한 공허함이 밀려왔다.현관문을 열어도—“왔어?”하고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거실의 불도 꺼져 있었고,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며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예전에는 몰랐다.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조용한 일인지.그래서일까.요즘은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복지센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민성의 그 뻔뻔할 정도로 다정한 얼굴이 은근히 반갑고 고마웠다.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자신도 모르게 창밖을 한번 바라보게 되었다.오늘도 왔을까.그의 차가 보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수요일 오전.지혜는 평소처럼 복지센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아이의 상담기록을 정리하고 있는데 동료가 다가왔다.“지혜 씨.”“네?”“밖에 어떤 분이 찾아오셨어요.”“저를요?”“네.”지혜는 고개를 갸웃했다.약속된 상담이 있었나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밖으로 나가자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김지혜 씨 맞으십니까?”“네. 그런데요?”남자는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이경환 사장님 비서입니다.”지혜의 표정이 굳었다.이경환.“이민성 씨 아버님이십니다.”지혜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저를 왜…….”“사장님께서 잠시 뵙고 싶어 하십니다.”지혜는 잠시 남자를 바라봤다.좋은 느낌은 아니었다.민성의 아버지가 자신을 왜
“그분이…… 아빠였어요?”주연의 놀란 목소리에 이창수는 조용히 딸을 바라봤다.재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주연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재혁이 어린 시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재혁은 다시 이창수를 바라봤다.“오래전 어린 저를 알아봐 주시고 손을 내밀어주셨던 그 순간부터…… 제 마음에 아버지는 늘 특별한 분이셨습니다.”식탁이 조용해졌다.“그 뒤로도 학교 다닐 수 있게 도와주시고, 제가 성적 잘 받으면 누구보다 먼저 잘했다고 해주셨잖아요.”이창수는 아무 말 없이 사위를 바라봤다.“그때는 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재혁이 잔잔하게 웃었다.“그런데 지금은 정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해졌다.“비록 돌고 돌았지만 이렇게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이창수의 눈빛이 흔들렸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재혁아.”이창수가 처음으로 식탁에서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나는 말이다.”잠시 주연을 바라본 그가 다시 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주연이에게 2년 전 그 일이 없었어도…… 언젠가는 너를 이 아이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이번에는 재혁도 놀랐다.“저를요?”“그래.”이창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 딸을 맡겨도 되는 사람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주연이 아버지를 바라봤다.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아빠…….”이창수는 딸의 시선을 마주했다.“다만 내가 방법을 잘못 선택했지.”주연의
휴대전화를 든 주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몇 년 동안 단 한 통의 안부 전화조차 나누지 않았던 오빠 진성에게 먼저 연락을 건넨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전화를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진성 역시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이름을 한동안 바라봤다.이주연.저장되어 있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잘못 걸었나 싶었다.그래서 전화를 받으면서도 조금 의아했다.그런데 정말 주연이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린 끝에 저쪽에서 낮고 무뚝뚝한 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오빠, 나야. 주연이.”전화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진성은 주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온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하려는 듯 잠시 말을 잃었다.“……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진성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오늘 나…… 재혁 씨 집으로 완전히 들어왔어.”주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엄마, 아빠 모시고 저녁 먹기로 했거든.”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오빠도 시간 되면 와줬으면 해서.”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주연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가만히 기다렸다.진성은 곧바로 거절하려 했다.“내가 거길 왜 가냐?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사실 정해진 약속은 없었다.그저 가고 싶지 않았다.아버지와 마주 앉는 것도 싫었고—주연과 재혁이 행복한 신혼부부처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오빠.”주연이 그를 불렀다.평소보다 조금 더 간절한 목소리였다.진성의 손이 멈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재혁의 아파트는 예전의 그 차갑고 삭막했던 공간이 아니었다.그동안 주연이 틈 날 때마다 백화점이나 소품 숍에서 하나둘 사 모았던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들, 거실 한켠을 화사하게 밝히는 작은 화분들, 그리고 벽마다 걸린 따뜻한 색감의 그림 액자들까지. 집안 곳곳에 주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냉기만 돌던 모던한 인테리어는 이제 완벽하게 ‘진짜 사람이 사는 온화한 신혼집’으로 변모해 있었다.두 사람은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두고 거실에 나란히 서서 집안을 둘러보았다."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우리 집 같네."주연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둘러보자, 재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당연하지. 이제 온전히 내 아내가 채워 넣은 우리 집이니까. 앞으로 여기서 매일 눈을 뜨고 잠들 거라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데."“오늘 저녁 때 아버님, 어머님 오시라고 했어.”재혁은 현관에 놓인 주연의 캐리어를 바라봤다.“딸이 신혼집에 제대로 들어온 첫날인데 부모님도 오셔야지.”주연은 잠시 재혁을 바라보다 웃었다.말은 태연하게 했지만—그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다.주연은 집을 한 번 둘러 보았다.소파 위에는 주연이 고른 쿠션이 놓여 있었고—거실 한쪽에는 작은 화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벽에는 며칠 전 주연이 고미혜와 함께 고른 작은 그림 액자와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할 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그리고 주방에는 새로 산 그릇과 조리도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집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재혁이 말했다.“이제야 집 같아.”그녀는 말없이 재혁의 손을 잡았다.“앞으로 더 많이 바뀔 거예요.”“얼마든지.”“나중에 마음
토요일 아침. 평소 주말이면 조금은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던 재혁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너무 이른가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다시 누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주연이 오는 날이었다. 재혁은 침대 옆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내일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자리에 주연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틀이 이렇게 길 줄이야.” 혼잣말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재혁은 집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일찍부터 유명 베이커리에 들러 주연과 지혜를 위해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정성스럽게 포장한 재혁은 지혜의 아파트 현관문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밝은 얼굴의 주연이 그를 맞이했다. 지혜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주연이 빨리 데려가고 싶어서 아침까지 사 들고 오신 거죠?” 재혁은 잠시 지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들켰네요.” 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정이라도 하셔야죠.” “사실인데 굳이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