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대표님은 왜 직접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챙기시는 건가요?"
주연의 질문이 조용한 룸 안에 머물렀다.재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었다.잠시 후.그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누군가에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받은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주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 한마디는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빚이요?"재혁은 희미하게 웃었다."돈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살다 보면...""도저히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던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주연은 알 수 있었다.그에게도 누구에게도 쉽게 말박지민은 한동안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조용한 공간에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이경환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절박했다. 박지민은 외동딸이었다. 아버지 박승찬은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누구보다 반듯하게 살았다. 촌지 한번 받지 않았고, 학교 물품 하나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린 지민에게도 늘 같은 말을 했다. “지민아, 사람이 돈보다 중요한 거다.” “네, 아빠.”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괜찮아. 대신 남한테 부끄럽게 살면 안 된다.” 어릴 때 지민은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커가면서도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성실하게 일했지만 아버지에게 남은 재산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마저 잃을 위기가 찾아왔다. 오랜 친구의 부탁으로 선 보증 하나가 문제였다. 친구의 사업은 무너졌고, 당사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거액의 빚이 보증인인 박승찬에게 돌아왔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박승찬은 결국 사채에까지 손을 댔다. 그 돈의 주인이 이경환이었다. 지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빠, 왜 그런 돈을 빌렸어!” 지민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큰소리를 냈다. 박승찬은 딸의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한 게 문제가 아니잖아.” “집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민은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이 늙어서 자신이 살아온 집 하나를 지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박지민은 차분하게 인사를 건넨 뒤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 화면에 조금 전 통화했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이민성. 지민은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물론 자신과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상대에게 헛된 기대를 갖게 하는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생각했던 사람과는 조금 다른가…….’ 지민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경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지민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민성 씨와 약속 잡았습니다.” 그제야 이경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잘했어.” 지민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경환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민성이 마음만 잘 잡아준다면…….” 지민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지난번에 약속한 건물 명의는 지민 씨 앞으로 해주지.” 순간 지민의 손끝이 굳었다. 청담동 건물.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아버지가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월급만 모아서는 가질 수 없는 재산이었다. 그 엄청난 재산을— 이 남자는 자신의 아들 마음을 얻는 대가로 주겠다고 했다. 지민은 잠시 침묵하다 씁쓸하게 웃었다. “사장님은 정말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시네요.” 이경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어렵게 할 필요가 있나?” “사람 마음도요?” 이경환의 시선이 지민에게
민성은 고개를 뒤로 젖혀 시트에 기대었다. “……결혼까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야 그 여자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가고 있는데 지혜에게는 이미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가 있었단다. 그렇다면 자신은 뭐였을까. 귀찮게 따라다니던 남자? 잠깐 밥이나 먹어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그저 재혁의 친구라 몇 번 어울려준 것뿐이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하지만 지혜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처음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날 그녀를 모텔 앞까지 데려간 순간 자신은 지혜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을 좋은 감정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멍청한 자식…….” 민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생각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후회였다. 그때였다. 우웅― 우웅― 조수석에 던져놓았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성의 심장이 순간 뛰었다. 혹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혜가 아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민성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대로 두려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에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민성 씨 맞으세요?”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여자는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민성의 눈빛이 굳었다. 박지민.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곧 기억났다. 어젯밤 아버지가 말했던 여자. 중학교 교장을 지낸 박승찬의 딸. 자신에게 한번 만나보라고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민성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아…….” 짧은 대답이 나왔다. 지민도 그의 반응에서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듯 잠시 말이 없
통화가 끊겼다. 민성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전화기 너머를 바라보듯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지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과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민성은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통화 종료 화면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름. 김지혜. 그 이름을 바라보는 민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른 남자?”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민성은 지혜가 근무하는 복지센터 앞에 서 있었다. 한쪽 팔에는 아직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사고 이후 몸은 많이 회복됐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민성을 괴롭히는 것은 몸의 불편함이 아니었다. 지혜였다.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생각하면 몇 번이고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사과했고, 다시 연락했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 민성은 결국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지혜 씨, 내일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꼭 할 말이 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답은 없었다. 민성은 결국 직접 복지센터를 찾아왔다.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왜 그날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그 이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리고 자신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복지센터 직원에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김지혜 선생님이요?” “네.” “오늘 연차 내셨어요
오후가 되면서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아침보다 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지혜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수액은 일정한 속도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고, 지혜는 침대에 기대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은 그런 친구를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아침에 민성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부터 지혜의 말수가 부쩍 줄어 있었다.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했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주연은 알고 있었다. 지혜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때였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웅― 우웅― 지혜의 시선이 천천히 화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화면에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이민성. 주연도 그 이름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 역시 전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저 화면만 바라보았다. 전화는 한참을 울리다 끊어졌다. 병실에 다시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연은 지혜의 표정을 살폈다. “…….” 지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불 위에 올려놓은 손끝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주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웅― 우웅― 또다시 같은 이름이었다. 이민성. 이번에는 지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전화기는 계속 울렸다. 꼭 지혜가 받을때까지 계속 울릴듯이… 결국 지혜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고 싶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지혜가 주연을 바
늦은 밤. 병실 안에는 희미한 조명만 켜져 있었다. 주연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든 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열제를 투여받고 수액까지 맞고 있었지만 지혜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끔 힘겨운 듯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주연의 마음도 함께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진동으로 해놓은 지혜의 휴대전화가 침대 옆 테이블 위에서 길게 울렸다. 우웅― 우웅― 주연은 무심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멈칫했다. 이민성. 주연의 시선이 잠든 지혜에게 향했다. ‘민성 씨…….’ 전화를 받아야 할까. 지혜가 병원에 있다고 알려줘야 할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주연이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짧은 진동음이 다시 울렸다. 메시지였다. 화면에 메시지 일부가 떠올랐다. 지혜 씨, 내일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꼭 할 말이 있습니다. 주연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지혜를 바라보았다. 열에 지친 얼굴.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괜찮은 척 농담하지도 못한 채 힘없이 잠들어 있는 친구. 주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지혜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도 아픈 사랑을 하고 있구나.” 어쩌면 자신과 지혜는 전혀 다른 사랑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닮아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 주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의사는 지혜의 상태를 확인하고 차트를 살펴보았다. “아직 열이 많이 높네요.” “많이 안 좋은 건가요?” “검사상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열이 계속되고 몸 상태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오늘 바로 귀가시키는 것보다는 하루 이틀 입원하면서 경과를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연은 안도의 숨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