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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애니
투심위가 끝난 뒤, 회의실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

그제야 가슴 깊숙이 눌러놓았던 통증이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강서이의 머릿속에는 병원 천장의 희뿌연 조명이 떠올랐고, 코끝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소독약 냄새가 스며들었다.

차가운 수술대와 임신중절수술 후의 서늘함.

그 기억은 강서이의 몸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아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느꼈던 통증도.

‘돌이켜 보면... 아기가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난 거겠지.’

‘마치 나 대신 아픔을 가져가려고 온 것처럼.’

가슴 안쪽이 묵직하게 조여 왔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노아리는 김설에게 말했다.

“김설 씨, 방금 회의록 정리된 거 있으면 보내주세요.”

김설은 속에 쌓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대답했다.

“아직 정리 안 됐어요.”

노아리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말했다.

“그럼 정리되면 바로 보내주세요.”

하지만 김설은 손에 들린 서류를 정리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지금 바빠서요.”

노아리는 잠시 김설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김설은 여전히 씩씩대며 회의실 구석의 자료를 챙기고 있었다.

그녀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강서이가 다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아, 감정을 일에 끌고 들어오면 안 돼. 여기서는 그게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야. 프라임로드투자에서 오래 버티고 싶으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면 안 돼.

특히 너보다 직급 높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김설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저는 그냥 언니가 너무 억울한 것 같아서요.”

강서이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얻고 잃는 게 어디 있어. 그냥 그런 거야.”

강서이의 표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강서이는 알고 있었다.

감정은 반드시 보상받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민도하에게 잘해준 건 오직 자기 선택이었다.

민도하가 어떻게 반응하든 그 또한 그의 선택이었다.

이 둘을 억지로 맞추려 한다면 결국 다치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강서이는 민도하를 사랑했기에 유학 기회도 포기하고, 커리어도 걸고, 이 남자의 성공을 위해 그림자처럼 보조해왔다.

결과는 기대와 달랐지만 후회는 없었다.

‘붙잡지 말고 인정하고 내려놓는 게 제일 빠른 길이지.’

‘결국 나를 가둔 건 내가 만든 마음의 틀이었어.’

그렇다 해도, 사랑이 끝나면 어찌 됐든 사람은 누구나 상처받는다.

버틴 마음의 무게가 천천히 내려앉아 피곤함으로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강서이는 그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것이다.

...

퇴근 한 시간 전쯤, 강서이는 노아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IB본부 3부의 프로젝트 자료가 모두 정리됐다는 내용이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주겠다고 덧붙였다.

노아리의 답은 매우 빨랐다.

[강 비서님, 그 자료 도하 사무실로 좀 가져다주세요. 제가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국내 시장 환경이 아직 익숙하지 않거든요. 도하가 좀 봐줘야 해서요.]

메시지 속 ‘도하’라는 호칭은 아무렇지 않게 친밀했다.

강서이는 노아리가 무심하게 부르는 호칭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이 몹시 익숙해 보였다.

민도하는 그 호칭을 단 한 번도 고친 적 없었다.

강서이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민도하는 회사에서 직함을 생략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이 7년 동안 강서이는 회사 안팎에서 단 한 번도 그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항상 ‘민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강서이는 순간 스치는 허무함을 느꼈다.

‘이제 보니, 그 규칙은 결국 나한테만 적용된 거지.’

‘나는 그저 외부인이었고.’

‘민도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구나.’

짧은 한숨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강서이는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네.]

강서이는 정리된 자료들을 챙기며 서류 사이에 사직서를 함께 끼워 넣었다.

민도하가 과연 서명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절차는 밟아야 했다.

자료를 품에 안고 강서이는 곧바로 민도하의 사무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문을 두드린 뒤, 기다림 없이 문을 열었다.

수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민도하가 유일하게 허락했던 특권.

업무 효율을 위해 강서이가 곧바로 드나들 수 있게 했던 방식.

그래서 강서이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문을 밀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앞 장면이 강서이의 심장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노아리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고, 상체를 기울여 민도하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민도하의 얼굴은 노아리의 상체와 가까워져 있었으며, 불필요하리만큼 친밀해 보였다.

“어머!”

노아리는 강서이가 들어오자 움찔하며 몸을 뒤로 젖혔고, 그 움직임에 균형을 잃어 민도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민도하는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노크 좀 하고 들어와. 사람이 기본도 안 돼 있어?”

강서이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두드렸다고 말하려 했지만, 변명은 무의미해 보였다.

“이렇게 일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기본이 하나도 없어?”

냉정하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강서이에게 허용했던 그 특권은, 민도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듯했다.

강서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음엔 안 그럴게요.”

‘애초에... 다음은 없으니까.’

노아리는 민도하 품에서 몸을 세우며 얼굴을 붉힌 채 웃었다.

“도하야, 그렇게까지 뭐라고 해. 강 비서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그리고는 강서이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강 비서님, 자료 가져다주러 오신 거죠? 그냥 책상 위에 두세요. 제가 손이 좀 불편해서요.”

강서이는 조용히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에 결재 서류도 있습니다. 민 대표님 서명 필요해요.”

노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일단 나가 계세요.”

민도하도 이어서 말했다.

“일 없으면 함부로 들어오지 마.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가슴이 조여 들었지만, 강서이는 억지로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강서이는 어떻게 그 답답한 공간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문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노아리가 민도하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 속에 또렷했다.

민도하는 노아리를 떼어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도하는 내가 방해해서 화난 게 맞아.’

‘7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어.

그 냉정함도, 이성도... 전부 껍데기였을까.’

‘남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대낮에, 그것도 사무실에서 그런 모습까지 보인 거겠지.’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강서이는 조용히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 일어섰다.

비서실 직원들은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프라임로드투자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 하면 강서이를 떠올릴 정도였다.

특히 IB본부 3부를 대리로 맡은 뒤로는 거의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랬던 강서이가,

정시에 퇴근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조규찬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화를 바로 끊거나 사무적인 이유로 부드럽게 거절했을 것이다.

조규찬은 헤드헌터 회사의 대표로, 여러 번 강서이를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서이가 아무 망설임 없이 전화받았다.

[강 비서님? 통화 괜찮으세요?]

조규찬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떨렸다.

강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 대표님,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 같이하실래요?”

조규찬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예! 당연하죠! 강 비서님이랑 식사라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자극적이지 않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위가 좀 안 좋아서요.”

[네! 문제 없습니다! 금방 맞는 곳 찾아서 위치 보내드릴게요! 곧 뵙겠습니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강서이는 집으로 향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강서이가 사는 집은 회사와 가까워서 출퇴근과 야근이 편했다.

월세는 꽤 높았지만, 시간 절약이 더 중요했다.

예전에 민도하는 강서이의 집을 이해하지 못했다.

좁고 정리할 시간이 부족해 늘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와 보고는 다시는 발걸음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민도하는 강서이에게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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