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월 3일 밤 열한 시 사십 분. 백탑 뒤뜰.
기도 사흘 중 둘째 밤이었다. 성녀는 낮에 단 위에서 기도하고, 해가 지면 본당 제단 앞에서 기도해야 했다. 「밤낮으로.」 대주교 명. 본당 문 앞에 사제 둘이 지켰다.
성녀는 열한 시에 본당 제단 앞에서 일어났다. 사제들에게 말했다. 「거처에서 잠깐 몸을 씻고 오겠어요. 한 시간.」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기사가 따라가니까.
성녀가 6층에 올라가지 않았다. 4층에서 멈췄다. 오렌 사제 방 앞.
문이 열려 있었다. 오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발 옆에 커다란 바구니 둘. 천으로 덮인.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뿐이오.”
오렌이 천을 걷었다. 바구니 하나에 말린 약초. 버드나무 껍질, 쑥, 박하, 그리고 카일이 모르는 풀들. 다른 바구니에 소금 두 자루, 꿀 네 단지, 깨끗한 천 한 더미.
“신전 창고에서 꺼냈소. 장부에 「쥐가 먹음」이라고 적어 놨지. 쉰 해 동안 쥐가 먹은 걸로 적은 게 이번이 처음이오.”
성녀가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오렌을 올려다봤다.
“사제님…”
“고맙단 말은 하지 마시오. 고마운 사람이 하는 말이지, 쉰 해 늦은 사람이 들을 말이 아니오.”
카일이 바구니 하나를 들었다. 무거웠다. 소금 두 자루.
“어떻게 내려갑니까. 개구멍은 막혔습니다.”
오렌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웃었다. 이가 몇 개 빠진 웃음.
“나도 가오.”
†
자정 오 분 전. 뒤뜰 담 앞.
사람이 넷이었다. 성녀, 카일, 오렌. 그리고 루카스.
루카스는 열한 시 반에 뒤뜰 울타리에 나타났다. 카일이 낮에 부른 것도 아니었다. 혼자 왔다. 손에 종이 꾸러미. 꿀과자.
“대장님! 저 왔어요. 대장님이 요즘 밤마다 어디 가시는지 알아내려고 따라왔어요.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아무튼 왔어요. 근데 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아 사제님이시구나. 근데 바구니는 뭐예요? 근데 성녀님은 왜 여기 계세요? 기도 중이시라던데.”
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오래.
“…돌아가.”
“싫어요.”
“명령이다.”
“대장님 지금 임무 중이세요?”
카일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무 중이 아니면 명령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 덩치 크잖아요. 바구니 들 수 있어요.”
성녀가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 팔을 봤다. 굵은.
“소금 들어 주세요.”
“예!”
루카스가 소금 바구니를 번쩍 들었다. 한 손으로. 카일이 낑낑대던.
카일은 이마를 짚었다.
오렌이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지팡이를 짚고. 위아래로 훑었다. 금발 곱슬, 넓은 어깨, 꿀과자 꾸러미.
“젊은이, 이름이?”
“루카스요! 루카스 베르너. 기사단 3년 차요. 대장님 부하예요.”
“루카스. 입은 무겁소?”
루카스가 잠깐 생각했다. 진지하게.
“…아뇨. 근데 대장님이 말하지 말라는 건 안 해요. 진짜로요. 지렁이 얘기는 했지만 삽질 얘기는 안 했어요.”
오렌이 카일을 봤다. 카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렌이 웃었다.
“그럼 됐소. 입 무거운 놈보다 그런 놈이 낫지.”
루카스가 그 말이 칭찬인지 몰라서 카일을 봤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칭찬으로 받기로 했는지 활짝 웃었다. 그리고 꿀과자 하나를 오렌에게 내밀었다.
†
자정. 종이 울렸다. 열두 번.
하수 돌계단 꼭대기 경비병이 창을 어깨에 메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교대. 다음 경비병은 언덕 아래 초소에서 출발한다. 십오 분.
카일이 담 아래에서 깍지를 꼈다. 성녀가 맨발로 디뎠다. 넘었다. 어젯밤보다 빨랐다.
루카스가 바구니를 담 위로 올렸다. 성녀가 받았다. 둘 다.
이제 오렌이었다.
오렌이 담을 올려다봤다. 지팡이를 짚고. 담이 카일 키보다 높았다. 오렌은 카일 어깨에도 안 닿았다. 등이 굽어서.
“…생각보다 높구먼.”
“업겠습니다.”
“기사 양반이 날 업고 담을 넘는다고?”
“담은 루카스가 넘깁니다.”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등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업히세요! 저 힘 세요!”
오렌이 루카스 등에 업혔다. 지팡이를 쥔 채로. 루카스가 일어났다. 카일이 담 아래에서 깍지를 꼈다. 루카스가 오렌을 업은 채로 카일 손을 디뎠다. 카일 팔이 휘었다. 두 사람 무게. 이를 악물었다. 들어 올렸다.
루카스가 담 위에 손을 걸었다. 오렌이 루카스 목을 꽉 끌어안았다. 「으으으」. 루카스가 담 위로 기어올라 갔다. 담 꼭대기에 엎드렸다. 오렌을 등에 업은 채로.
담 너머에서 성녀가 손을 뻗었다. 오렌 지팡이를 받았다.
루카스가 담 너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털썩. 넘어지지 않았다. 오렌이 루카스 등에서 내려왔다.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웃었다.
“일흔둘에 담을 넘었소. 브루노가 보면 배를 잡겠군.”
카일이 마지막으로 넘었다. 망토를 먼저 던지고. 담 너머에 내려서자 시계를 셌다. 머릿속으로. 자정 오 분.
“십 분.”
†
하수 돌계단. 바구니 둘. 사람 넷.
성녀가 앞장섰다. 맨발. 한 손에 버드나무 바구니. 카일이 그 뒤에서 오렌 팔을 잡고. 오렌이 지팡이로 계단을 한 칸씩 짚었다. 루카스가 맨 뒤에서 소금 바구니.
돌계단은 중간에 꺾였다. 꺾인 자리에 시 경비대 초소 불빛이 보였다. 언덕 아래. 다음 경비병이 막 나오고 있었다. 창을 메고. 하품을 하며.
“칠 분.”
카일이 속삭였다.
오렌 걸음이 느렸다. 한 칸, 쉬고. 한 칸, 쉬고. 카일이 오렌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사제님, 업겠습니다.”
“아니오. 내 발로 갈 거요. 쉰 해 동안 이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소. 한 번은 내 발로 내려가 봐야지.”
오렌이 지팡이를 짚었다. 한 칸. 한 칸.
“오 분.”
경비병이 언덕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하수 돌계단 꼭대기 쪽으로. 횃불. 계단 꺾인 자리까지 빛이 닿기 시작했다.
성녀가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오렌을 봤다. 그리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돌계단 위에.
성녀가 다시 올라왔다. 오렌 다른 팔을 잡았다. 카일 반대편에서.
“같이 가요.”
오렌이 성녀를 봤다. 카일을 봤다. 양쪽에서 팔을 잡힌.
“…허허.”
오렌이 웃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루카스에게 넘겼다. 두 팔이 다 잡혔으니 지팡이가 필요 없었다.
셋이 같이 내려갔다. 한 칸씩. 오렌 지팡이 소리에 맞춰. 달각. 달각.
루카스가 뒤에서 소금 바구니와 성녀가 내려놓은 버드나무 바구니를 같이 들었다. 양손에. 그리고 따라 내려갔다. 아무 말 없이. 처음으로 루카스가 아무 말도 안 했다.
계단 꺾인 자리를 지났다. 횃불 빛이 등 뒤로 지나갔다. 경비병이 꼭대기에 섰다. 「아 졸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막힌 개구멍 앞에 창을 세우고 기대섰다.
“…십오 분.”
카일이 말했다. 계단 끝. 잿골 첫 골목.
†
새벽 한 시. 대장간 앞.
한나가 뛰어나왔다. 바구니를 보고, 오렌을 보고, 루카스를 보고. 입을 막았다.
“신부님까지?”
“사제요. 신부가 아니라.”
“그게 그거지!”
한나가 오렌을 끌어안았다. 오렌이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루카스가 주웠다.
오렌이 한나 어깨 너머로 잿골을 봤다. 대장간 화로 불빛. 집집마다 덧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촛불. 강물 소리. 오렌이 중얼거렸다.
“쉰 해 전에 브루노가 매일 밤 여기 내려왔소. 약초 바구니 들고. 나는 따라오지 않았지. 신전 일이 바쁘다고. 장부 적어야 한다고.”
오렌이 한나를 놓았다. 루카스에게서 지팡이를 받았다.
“이제 왔소. 늦었지만.”
열병 환자가 스물둘이었다. 사흘 사이에 일곱이 늘었다. 그런데 처음 열다섯 중 열이 땀이 나서 나았다. 한나가 성녀 처방대로 했다. 끓인 물, 버드나무, 발, 손 씻기, 그릇 따로. 장작이 있어서 가능했다.
“아가씨가 단 위에서 기도하는 동안 내가 다 했어. 아가씨 말한 대로. 하나도 안 빼고.”
한나가 성녀 손을 잡았다. 성녀가 한나를 봤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다, 한나를 끌어안았다. 바구니를 들고 있던 손으로.
“언니가 기적이에요.”
성녀가 말했다. 한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나가 웃었다. 울면서.
“무슨 소리야. 기적은 저기 신전에 있다며.”
†
새벽 세 시. 스물두 집을 다 돌았다. 첫째 집 아이는 다 나아서 문 앞에 나와 앉아 있었다. 카일 회색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로. 열흘 전 덮어 준 그대로. 아이가 카일을 보고 망토를 벗으려 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더 입어.」 아이가 망토를 끌어안고 웃었다.
성녀가 버드나무를 달였다. 오렌이 대장간 화로 앞 의자에 앉아 꿀물을 탔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잔씩. 한나가 그걸 집집마다 날랐다.
루카스는 장작을 팼다. 카일보다 빨랐다. 두 손이니까. 그리고 덩치가 컸다. 장작더미가 금방 쌓였다. 대장장이 남편이 루카스 등을 두드렸다. 「자네 대장장이 해도 되겠어.」 루카스가 활짝 웃었다.
카일은 물을 길었다. 우물에서 대장간까지. 대장간에서 집집마다. 물동이 두 개. 왼손이 다 나아 있었다.
새벽 세 시 반. 카일이 물동이를 내려놓고 숨을 고를 때 루카스가 옆에 왔다. 도끼를 어깨에 메고. 땀범벅.
루카스가 대장간 쪽을 봤다. 화로 불빛 아래 성녀가 쪼그려 앉아 버드나무 솥을 젓고 있었다. 맨발. 땋은 머리가 반쯤 풀려 있었다. 옆에서 오렌이 꿀 단지를 들고 졸고 있었다.
루카스가 카일을 봤다. 그리고 물었다.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로.
“대장님, 우리 지금 성녀 감시하는 거 맞죠?”
카일은 물동이를 봤다. 대장간을 봤다. 성녀를 봤다.
“…맞다.”
“그럼 성녀님이 봉쇄 넘어서 잿골 오신 거, 단장님한테 보고해요?”
“…안 한다.”
“왜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기다렸다. 도끼를 내려놓고. 오래.
“…감시 대상이 하는 일이 맞는 일이니까.”
카일이 말했다. 결국.
루카스가 카일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알겠어요. 그럼 저도 안 해요.”
“너는 원래 보고할 일이 없다. 임무 아니니까.”
“그래도요. 안 하는 거랑 할 게 없는 거랑은 달라요.”
루카스가 도끼를 다시 들었다. 장작더미로 갔다. 두 걸음 가다 돌아봤다.
“근데 대장님. 아까 성녀님이 할아버지 팔 잡고 같이 내려올 때요. 대장님 표정 처음 봤어요.”
“무슨 표정.”
루카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웃었다. 그리고 장작을 패러 갔다. 쩍. 쩍.
카일은 물동이를 다시 들었다. 대장간 화로 쪽을 봤다.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카일을 봤다. 불빛 속에서. 땀에 젖은 얼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카일도 끄덕였다.
새벽 다섯 시 교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넷이 같이 하수 돌계단을 올랐다. 오렌은 이번엔 루카스 등에 업혔다. 「올라가는 건 내 발로 안 해도 되오. 내려가 봤으니.」
『감시 보고서 — 6월 3일
대상: 기도 둘째 날. 낮에는 단, 밤에는 본당.
특이 사항: 없음.』
(14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