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월 28일 오전 아홉 시. 백탑 2층 대주교 집무실.
열이 퍼졌다. 셋이 여덟이 됐다. 여덟이 열다섯이 됐다. 처음 셋 중 둘은 사흘째에 땀이 났다. 첫째 집 아이와 셋째 집 노파. 둘째 집 일꾼은 땀이 안 났다. 닷새째 새벽, 성녀가 그 손을 잡고 있을 때.
성녀는 그날 아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침 기도에서도. 축복에서도. 저녁에 다시 잿골로 내려갔다. 열다섯 집을 돌았다.
카일은 그레타에게서 아무 명령도 받지 못했다. 북쪽 경계도, 임무 끝도. 그레타는 침묵했다. 카일도 묻지 않았다. 매일 밤 장작을 패고 물을 길었다. 왼손 붕대는 닷새째에 풀었다. 성녀가 실을 뽑아 줬다. 우물가에서. 동트기 전에.
그리고 오늘 아침, 비서 사제가 6층에 올라와 말했다. 「대주교님이 부르십니다. 성녀님, 그리고 호위 기사님도.」
†
집무실은 넓었다. 벽에 금실 휘장. 창 셋. 큰 참나무 책상. 대주교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반지 여섯 개. 오늘은 일곱 개였다.
성녀가 책상 앞에 섰다. 카일은 문 옆에. 이번엔 문 밖이 아니라 안. 대주교가 불렀으니까.
“리아. 잿골 소식은 들었다.”
대주교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끝까지.
“열병이라더구나. 열다섯. 한 명은 이미 신께 갔고.”
성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 의회에서 신전에 협조를 청해 왔다. 잿골을 봉쇄한다. 오늘 정오부터. 강가 다리 둘, 언덕 길 셋, 하수 돌계단. 다 막는다. 아무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 열이 왕도로 번지면 안 되니까.”
카일 손이 주먹을 쥐었다. 왼손. 실 뽑은 자리가 당겼다.
“그리고.”
대주교가 책상 위 종이를 한 장 들었다. 왕실 인장은 없었다. 신전 인장.
“신전은 이렇게 하기로 했다. 다음 주 기적의 날. 성녀께서 앞뜰 단 위에서 잿골을 향해 기도하신다. 열병을 거두어 달라고. 사흘 동안. 밤낮으로. 세렌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대주교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기도가 끝나면 열병도 끝날 것이다. 신께서 성녀의 기도를 들으실 테니까.”
성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도로는 열이 안 내려요.”
집무실이 조용했다. 비서 사제가 숨을 들이켰다.
대주교가 성녀를 봤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리아.”
“기도로는 안 내려요. 버드나무 껍질이랑 찬물이랑 끓인 물로 내려요. 손 씻고 그릇 따로 쓰고 이불 삶으면 안 퍼져요. 봉쇄하면 약이 못 들어가요. 끓일 장작도 못 들어가요. 잿골엔 장작이 없어요. 강가라서 나무가 없어요.”
성녀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높이였다. 그게 더 컸다.
“사흘 동안 단 위에서 기도하면 그 사흘 동안 저는 잿골에 못 가요. 사흘이면 열다섯이 서른이 돼요.”
대주교가 일어났다. 천천히. 책상을 돌아 나왔다. 성녀 앞에 섰다. 키가 성녀보다 머리 두 개는 컸다. 하얀 수염이 성녀 이마 높이에서 흔들렸다.
대주교가 성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강림식 날처럼. 성녀 어깨가 굳었다.
“리아. 들꽃골을 생각해라.”
목소리가 낮아졌다. 카일에게도 겨우 들릴 만큼.
“너는 들꽃골 약을 위해 여기 왔다. 그 약은 신전이 보낸다. 신전은 기부금으로 움직인다. 기부금은 기적을 본 사람이 낸다. 잿골 사람들이 은화를 내느냐? 아니다. 앞뜰에서 성녀가 사흘 동안 기도하는 걸 본 귀족들이 낸다.”
대주교 손가락이 성녀 어깨를 조금 눌렀다.
“잿골 열다섯, 들꽃골 삼백. 셈은 어렵지 않다.”
성녀가 대주교를 올려다봤다. 아무 표정 없이. 강림식 날 단 위의 그 무표정.
카일은 문 옆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무의식적으로. 장화가 바닥을 디디는 소리.
대주교가 카일 쪽을 봤다. 처음으로. 그리고 웃었다. 부드럽게.
“호위 기사. 자네도 들었지. 봉쇄 기간 동안 성녀님 거처 밖 출입은 자네가 책임진다. 밤에 혹시라도 성녀님이 기도 중에 바람을 쐬고 싶어 하시면, 자네가 모셔 드리게. 탑 안에서.”
카일은 대주교를 봤다. 미소와 눈이 따로 노는 사람. 눈은 웃지 않았다.
‘알고 있다.’
밤의 외출을. 대주교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일에게 막으라고 하고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대주교가 만족한 얼굴로 성녀 어깨에서 손을 뗐다.
“좋아. 가 보거라. 리아, 다음 주 기적의 날까지 거처에서 몸을 아끼거라. 사흘 기도는 길다.”
†
집무실 문이 닫혔다. 복도.
성녀가 걸었다. 계단으로. 빠르게. 맨발이 복도를 디딜 때 소리가 컸다. 탁, 탁, 탁.
카일이 따라갔다. 세 걸음 뒤.
계단 3층 참. 성녀가 멈췄다. 돌아섰다. 카일을 올려다봤다. 처음으로 표정이 있었다. 화난 얼굴. 카일에게 화난.
“확인했습니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주교님한테 확인했습니다라고 했어요. 저 막겠다고요?”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성녀 목소리가 계단에 울렸다. 위로, 아래로. 빙글빙글.
카일은 성녀를 봤다. 화난 얼굴. 처음 보는. 눈 끝이 빨갰다. 화가 나서 빨간 게 아니었다.
“회랑에서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보고하실 거냐고 물으셨을 때.”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보고했습니까.”
성녀가 카일을 봤다. 오래. 눈 끝의 빨간 게 조금 옅어졌다.
“…안 했어요.”
“그럼 오늘도 그 뜻입니다.”
성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쉬었다. 길게. 어깨가 내려갔다. 대주교 손이 얹혔던 어깨.
“봉쇄는 정오부터입니다.”
카일이 말했다. 낮게.
“다리 둘, 언덕 길 셋, 하수 돌계단. 경비는 시 경비대입니다. 기사단이 아닙니다. 시 경비대는 밤 교대가 자정입니다. 교대할 때 십오 분 빕니다. 9년 동안 그랬습니다.”
성녀 눈이 커졌다.
“그리고 오늘 정오 전까지는 봉쇄가 아닙니다.”
카일이 계단 창을 봤다. 해가 아직 동쪽에 있었다. 아홉 시 반.
“두 시간 반 남았습니다.”
†
열 시. 뒤뜰.
성녀가 창고에서 보따리를 쌌다. 쌀 수 있는 건 다. 버드나무 껍질 말린 것 세 다발. 쑥 말린 것. 카밀레 싹을 뜯어 말린 것 조금. 천 띠. 오렌 사제가 몰래 준 소금 한 자루. 꿀 단지 둘.
카일은 기사단으로 뛰었다. 왕성 다리를 건너 숙소. 사비를 털었다. 은화 열둘. 시장에서 장작 두 수레. 마부를 불렀다. 「잿골. 정오 전에.」 마부가 「열병 동네 아니오」 했다. 카일이 은화 셋을 더 얹었다. 마부가 고삐를 잡았다.
열한 시 반. 장작 수레가 언덕 길을 내려갔다. 카일이 수레 옆에 붙어서. 성녀는 하수 돌계단으로. 보따리를 이고. 낮에. 처음으로 낮에 하수 돌계단을 내려갔다. 사제 몇이 뒤뜰 창에서 봤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정오 전이었으니까.
열한 시 오십 분. 잿골 대장간 앞. 한나가 장작 수레를 보고 주저앉았다.
“이게 다 뭐야.”
“나흘 치라고 했습니다.”
카일이 장작을 내리기 시작했다. 대장장이 남편이 거들었다. 동네 남자들이 나왔다. 열 안 난 사람들. 장작이 대장간 뒤에 지붕 높이까지 쌓였다.
성녀가 보따리를 한나에게 넘겼다. 하나하나 설명했다. 버드나무 껍질 달이는 양. 쑥 쓰는 법. 소금물 비율.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웠다. 입술로 따라 했다.
“아가씨는?”
“저는 올라가야 해요. 정오에 막혀요.”
한나가 성녀 손을 잡았다.
“올라가면 못 내려오잖아.”
“내려올 거예요.”
“어떻게?”
성녀가 카일을 봤다. 장작을 내리던 카일이 손을 멈췄다.
“…자정 교대 때 십오 분 빕니다.”
카일이 말했다. 한나에게.
한나가 카일을 봤다. 그리고 웃었다. 크게. 한 달 만에 처음.
“기사 양반, 당신 감시 하러 왔다며.”
“감시 중입니다.”
“뭘?”
“…시 경비대 교대 시간.”
†
정오. 종이 울렸다. 백탑 꼭대기. 열두 번.
언덕 길 셋에 시 경비대가 섰다. 창을 들고. 강가 다리 둘에도. 하수 돌계단 꼭대기, 신전 뒷담 개구멍 앞에도 하나. 젊은 경비병. 개구멍을 보고 「이게 뭐야」 하더니 돌로 막았다.
성녀와 카일은 정오 오 분 전에 뒤뜰로 돌아와 있었다. 둘 다 진흙투성이. 장작 부스러기가 카일 머리에 붙어 있었다.
성녀가 뒤뜰 담 앞에 섰다. 돌로 막힌 개구멍을 봤다. 담 너머 하수 돌계단. 그 아래 잿골. 대장간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한나가 불을 때고 있었다.
카일이 성녀 옆에 섰다.
“담 넘는 거 할 줄 압니까.”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못 해요. 키가 작아요.”
“그럼 오늘 밤부터 배우십시오.”
“기사님이 가르쳐 줘요?”
“감시 대상이 담에서 떨어지면 보고서가 길어집니다.”
성녀가 웃었다. 진흙 묻은 얼굴로. 소리 내서. 짧게.
†
6월 2일. 기적의 날. 앞뜰.
성녀가 단 위에 섰다. 하얀 옷. 맨발. 대주교가 단 옆 높은 의자에. 앞뜰에 사람이 가득. 귀족 의자 백이십 개가 다 찼다. 헌금함이 단 앞에 넷.
「성녀께서 잿골 열병을 거두어 달라고 사흘 밤낮 기도하십니다.」
비서 사제가 외쳤다. 박수.
성녀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았다.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움직였다.
카일은 단 아래 세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 입술을 봤다.
기도문이 아니었다. 기도문 박자가 아니었다. 본당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그런데 이번엔 카일이 그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잿골에서 들은 말들이었으니까.
‘버드나무 껍질 한 줌. 물 세 사발. 반이 될 때까지.’
‘쑥 다섯 잎. 꿀 한 숟가락.’
‘소금 한 꼬집. 물 한 사발. 끓여서 식혀서.’
약초 이름. 달이는 양. 성녀는 앞뜰 수천 명 앞에서, 단 위에서, 무릎 꿇고 손 모으고, 잿골 처방을 외우고 있었다. 한 번, 또 한 번. 잊지 않으려고. 아니면 그게 성녀의 기도였는지도 몰랐다.
앞뜰 사람들은 성녀 입술을 보지 않았다. 손을 봤다. 빛이 날까 봐.
빛은 나지 않았다. 오늘 성녀 소매 안에는 인광 가루가 없었다. 카일은 아침에 그걸 봤다. 성녀가 소매를 털어 가루를 다 뒤뜰 흙에 버리는 걸.
대주교가 높은 의자에서 성녀 손을 봤다. 빛이 안 나는 손. 미소가 조금 굳었다.
카일만 성녀 입술을 봤다.
그날 밤 자정. 시 경비대 교대. 하수 돌계단 꼭대기 경비병이 내려가고 다음 경비병이 올라오기까지 십오 분.
카일이 뒤뜰 담 아래에서 깍지를 끼고 손을 내밀었다. 성녀가 그 손을 디뎠다. 맨발로. 카일이 들어 올렸다. 성녀가 담 위에 손을 걸고, 다리를 걸고, 넘어갔다. 처음치고 잘했다.
담 너머에서 성녀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기사님도 빨리요.”
카일이 담을 넘었다. 망토가 가시에 걸리지 않았다. 이번엔 망토를 벗어서 먼저 던졌다.
『감시 보고서 — 6월 2일
대상: 기적의 날. 앞뜰 단에서 잿골을 위해 기도.
특이 사항: 성실히 기도함. 손에 빛은 나지 않음.』
(13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