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
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
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
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
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
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
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
“너는 왜 따라왔어.”
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
“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
“…홈통을.”
“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
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
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
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쥐고.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웃지 않았다. 나흘 전 젖은 얼굴도 아니었다. 무엇을 정한 얼굴이었다.
카일은 탁자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서 있었다.
“도망갑시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카일이 말을 이었다. 나흘 동안 머릿속에서 수백 번 다듬은 말.
“남쪽 길 말고 서쪽 길. 강을 따라 사흘 내려가면 항구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면 바다 건너. 기사단 서쪽 경계 순찰로를 압니다. 경비가 안 서는 밤을 압니다. 말 두 필. 제 돈으로 삽니다. 9년 모은 게 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들꽃골로 편지를 보내면, 마르타를 데려올 수 있습니다. 1년 걸려도.”
성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주교는 성녀가 사라지면 승천했다고 할 겁니다. 그렇게 둡시다. 승천한 성녀는 아무도 안 찾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습니다. 단장님 증거는 그대로 남습니다. 단장님이 나중에 폐하께.”
“기사님은요?”
성녀가 물었다.
카일이 멈췄다.
“기사님은 기사단을 버려요? 9년?”
“…예.”
“단장님은요? 루카스 기사님은요?”
“단장님은 압니다. 루카스는…”
카일이 계단참 쪽을 봤다. 문틈으로 루카스 등이 보였다. 꿀과자 봉투.
“…루카스는 이해합니다.”
성녀가 카일을 오래 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한 번.
“안 가요.”
†
카일은 그 대답을 알았다. 나흘 동안 수백 번 말을 다듬으면서 알았다. 그래도 물어야 했다.
“…왜.”
성녀가 탁자 위 종이를 카일 쪽으로 밀었다.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한.
「잿골 소식. 한나 아줌마가 에마 엄마 여관으로 전했음.
토마스네 동생 열 남. 붉은 점 없음. 감기.
페터 할아버지 다리 다 나음. 지팡이 짚고 우물가까지 걸어감.
바울 기침 멈춤.
무두질 공방 새 일꾼 손 다침. 한나 아줌마가 쑥 붙임.
강가 어부 집 아기 태어남. 엄마 열 남. 한나 아줌마가 버드나무 물 먹임. 아줌마가 그러는데 아가씨 있었으면 더 잘했을 거래요.」
성녀가 종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마지막 줄.
“아가씨 있었으면 더 잘했을 거래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 건너 가면요. 저 거기서 살아요. 기사님이랑. 잘 살 거예요. 아마.”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근데 들꽃골 약은 영영 안 가요. 대주교님이 줄 긋는 거 아무도 안 막아요. 승천한 성녀 다음엔 다음 성녀가 와요. 남쪽에서. 비서 사제님이 그랬다면서요. 또 찾으면 된다고. 그 아이도 들꽃골 비슷한 데서 와요. 약 준다는 말 듣고. 그 아이도 맨발로 단 위에 서요. 그리고 4월 3일이 또 와요.”
카일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잿골이요. 한나 언니가 아무리 잘해도 장작이 떨어지면 끝이에요. 소금이 떨어지면 끝이에요. 신전은 봉쇄만 해요. 기도만 하고. 다음 열병 때 저 없으면, 그 겨울처럼 돼요.”
성녀가 카일 눈을 봤다. 촛불이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성녀 땋은 머리 끝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기사님 엄마처럼.”
방이 조용했다.
카일은 그 말을 들었다. 성녀가 그 말을 했다. 처마 밑에서 카일이 처음 한 얘기를. 그날 성녀는 「괜찮아요」도 「힘드셨겠어요」도 안 했다. 손등에 손을 얹었다 뗐을 뿐. 그 얘기를 성녀가 지금 꺼냈다.
“도망가면 저는 살아요. 근데 그 겨울은 또 와요. 잿골에도, 들꽃골에도. 제 다음 성녀한테도.”
성녀가 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손바닥을 위로. 하얀 흉. 촛불에 덴.
“저 그거 막으려고 왔어요. 왕도에. 약 받으려고 온 게 처음엔 맞는데. 지금은 그거 막으려고 있어요.”
“…지하에 갈 수도 있습니다. 탑에서 떨어질 수도.”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요.”
카일은 성녀를 내려다봤다. 무엇을 정한 얼굴. 처음 왔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다. 강림식 날 단 위에서도. 카일이 그걸 못 봤을 뿐.
‘이 사람은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카일은 탁자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다. 앉았다. 처음으로 성녀와 마주 앉았다. 눈높이를 맞춰서.
“…다른 길.”
카일이 말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도망 말고. 다리 위에서 말하는 것도 말고. 탑에서 떨어지는 것도 말고.”
“있어요?”
“만들겠습니다.”
카일이 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성녀 손 옆에. 6월 편지 날의 한 마디 거리가 아니라. 바로 옆에. 손가락이 닿게.
“4월 3일. 축성 축제. 앞뜰에 수천 명이 옵니다. 대주교가 판 무대입니다. 그 무대에 폐하를 모십니다. 단장님이 합니다. 그리고 증거를 다 들고 갑니다. 장부, 증언 마흔셋, 남부 신전 기록, 제 스물두 장. 그리고 당신.”
“…저요?”
“당신이 말합니다. 폐하 앞에서. 끌려가지 않을 자리에서. 다리 위가 아니라. 단장님이 그 자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성녀 손가락이 움직였다. 카일 손가락 위로. 겹쳤다.
“그럼 승천은요?”
“제가 막습니다.”
“어떻게요?”
카일은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않았다.
“모릅니다. 근데 막겠습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오늘 밤.
“또 모른대.”
“…예.”
“기사님 요즘 모르는 거 많이 약속해요.”
“당신 때문입니다.”
성녀 웃음이 멈췄다. 카일을 봤다.
카일이 말을 고쳤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입니다. 모르는 걸 약속하게 된 게.”
†
계단참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크게. 콜록콜록콜록. 일부러.
루카스였다. 보르크가 올라오고 있었다.
카일이 일어났다. 성녀도 일어났다. 둘의 손이 탁자 위에서 떨어졌다.
창. 홈통.
카일이 창틀에 다리를 걸었다. 성녀가 창가로 왔다. 카일 왼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위로 돌렸다. 루카스 칼에 베였던 흉. 성녀가 쑥을 바르고 실을 뽑아 준.
성녀가 그 흉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천천히. 엄지 아래에서 새끼손가락 쪽으로. 한 줄.
“이거 잘 아물었어요.”
“…당신이 감았습니다.”
“닷새 말 들었어요?”
“사흘 만에 칼 잡았습니다.”
성녀가 카일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흉 위에 엄지를 꾹 눌렀다. 아프지 않게. 도장 찍듯이.
“다음엔 말 들어요.”
“…확인했습니다.”
계단참에서 루카스 목소리. 「경비대장님! 저 길 잃었어요! 화장실이 어디예요!」 보르크 목소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기사단 놈이!」 「꿀술 마시다가요! 화장실! 급해요!」
카일이 홈통을 잡았다. 내려가기 전에 위를 봤다. 성녀가 창틀을 짚고 내려다봤다.
“루카스 기사님 괜찮아요?”
“…저 녀석은 늘 괜찮습니다.”
카일이 홈통을 타고 내려갔다. 5층 차양. 5층 복도. 좁은 계단. 부엌.
부엌 뒷문에서 루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활짝 웃으며.
“대장님! 네모 턱이 저 화장실까지 데려다줬어요! 1층까지요! 그리고 쫓아냈어요!”
“…잘했다.”
루카스가 카일 옆에서 같이 뛰었다. 뒤뜰, 창고 지붕, 담. 루카스가 담을 넘다 또 기와를 깼다. 쨍그랑.
담 바깥. 언덕 덤불. 둘이 숨을 골랐다.
루카스가 카일을 봤다.
“대장님. 그럼 저도 공범이네요?”
“…처음부터 공범이었다.”
“지렁이부터요?”
“지렁이부터.”
루카스가 웃었다. 덤불 속에서. 소리를 죽이려다 못 죽이고.
카일은 루카스 웃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덤불 너머 언덕 아래를 봤다. 잿골 불빛. 대장간 화로. 한나가 아직 깨어 있었다.
“루카스.”
“예.”
“4월 3일에 너도 앞뜰에 있어야 한다.”
“당연하죠! 맨 앞줄요!”
“맨 앞줄 말고. 탑 아래. 바깥벽.”
루카스가 카일을 봤다. 웃음이 사라졌다. 눈치가 없는 녀석이 이번엔 눈치를 챘다.
“…대장님 혹시 홈통 타고 올라가시려고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저 밑에서 받을게요. 떨어지시면.”
“일곱 층이다. 못 받는다.”
“그래도요. 받을게요.”
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덤불 속 어둠. 루카스 얼굴이 진지했다. 카일은 그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4월 3일에 탑 바깥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떠올리려고. 아래에 이 녀석이 있다고. 받지 못해도 받으려고 서 있는 녀석이. 그런 녀석이 있으면 손이 덜 떨릴 것이다. 카일은 그걸 믿기로 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저 진짜 기뻐요. 공범.”
†
9월 21일 아침 일곱 시. 단장실.
카일이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 세 줄.
「창고 지붕. 쪽문. 홈통.」
그레타가 읽었다. 1초. 고개를 들었다.
“루카스는.”
“…따라왔습니다.”
“소리 냈나.”
“기와 넷 깼습니다.”
그레타가 파이프를 문 채 어깨를 흔들었다. 오래.
“그 아가씨는.”
카일은 대답을 세 줄로 줄이려다 실패했다. 그래서 한 줄만 했다.
“도망 안 간답니다. 4월 3일에 말한답니다. 폐하 앞에서.”
그레타가 웃음을 멈췄다.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창밖 백탑을 봤다.
“…그럼 우리가 그 자리를 만들어야겠군. 일곱 달 안에.”
그레타가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빈 종이. 맨 위에 썼다. 「4월 3일」. 그리고 카일에게 펜을 내밀었다.
“앉아. 오늘은 세 줄로 안 끝난다.”
『감시 보고서 — 9월 20일
대상: 도망 제안 거절.
특이 사항: 4월 3일. 다른 길. 손바닥 흉에 도장.』
(28화 끝)
9월 20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6층.나흘 뒤. 카일은 다시 왔다.이번엔 에마가 물동이를 엎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가 했다. 자정 십오 분 전, 신전 정문 경비 초소에서 꿀과자 상자를 열었다. 꿀과자가 아니었다. 꿀술. 루카스가 사비로 산 남부 꿀술 세 병. 「경비 형님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루카스 생일은 2월이었다.보르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6층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문 경비 초소에서 웃음소리가 커지자, 자정 무렵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소란이냐」 하면서. 에마가 4층 계단참에서 그 시간을 셌다.카일은 지난번 그 길로 올라왔다. 창고 지붕, 쪽문, 212칸.이번엔 루카스가 따라왔다. 그레타가 하지 말라고 한. 담 넘을 때 소리를 내는.루카스는 정말로 소리를 냈다. 창고 지붕에 내려서다 기와 두 장을 깼다. 쨍그랑. 카일이 루카스를 봤다. 루카스가 입을 막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문 초소 꿀술 웃음소리가 더 컸다.“너는 왜 따라왔어.”카일이 쪽문 앞에서 낮게 물었다.“대장님이 저번에 저 안 데려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에마가 그랬어요. 회색 아저씨 홈통 타고 내려갔다고. 저 그 홈통 보러 왔어요.”“…홈통을.”“예. 그리고 망보러요. 6층 계단참에서. 네모 턱 올라오면 제가 기침할게요. 크게.”카일은 루카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6층.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성녀가 창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갈색 잠옷. 이번엔 머리를 땋았다. 탁자 위에 촛불, 박하 사탕 봉지, 그리고 종이 한 장.카일이 들어갔다. 루카스는 계단참에 남았다. 벽에 등을 대고. 칼 대신 꿀과자 봉투를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