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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제4조, 빠진 건 나인가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37:55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밑줄이 없는 조항. 그래서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표시가 없다.)

토요일 오전, 서윤은 노트북을 켜고 새 문서를 열었다.

기획자는 감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기준을 세우고, 항목을 나누고, 점수를 매긴다. 5년 동안 그렇게 일했다. 차이현과 싸워서 이긴 스물네 번도 전부 그렇게 이겼다.

그녀는 표를 하나 만들었다. 제목 칸에서 커서가 한참 깜빡였다. 결국 이렇게 적었다.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 (참고용)'

참고용이라는 말을 붙이자 조금 덜 창피했다.

항목 하나. 그 사람의 커피 취향을 안다.

서윤은 체크하려다 멈췄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여름에도. 그건 누구나 보면 아는 거라고, 이현이 그랬다. 체크하지 않았다.

항목 둘. 그 사람의 말투를 따라 한 적이 있다.

'방금 생겼어요'. '공수가 더 들어요'. '확률상 있을 수 있는 일'. 민지가 토씨 하나 안 틀린다고 했다. 체크.

항목 셋. 그 사람이 없는 회의를 상상하면 심심하다.

서윤은 눈을 감고 상상해 봤다. 반박이 없는 회의실. 노트북을 덮는 소리가 없는 회의실. 기획서가 한 번에 통과되는 회의실.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편한 게 이상하게 싫었다. 체크.

항목 넷. 그 사람의 문자를 기다린다.

휴대폰은 노트북 옆에 화면을 위로 한 채 놓여 있었다. 아침부터 세 번 확인했다. 알림은 없었다. 체크.

항목 다섯. 그 사람의 어떤 부위가 사흘째 생각난다.

서윤은 그 문장을 지웠다. 이상하게 읽혔다. 다시 썼다.

항목 다섯. 그 사람의 젖은 왼쪽 어깨가 사흘째 생각난다.

더 이상하게 읽혔다. 그래도 사실이었다. 체크.

항목 여섯. 그 사람이 한 말을 혼자 있을 때 다시 재생한다.

'싸우려면 봐야 하니까요.' '좋은 문장은 오래 가요.' '제 서비스의 유일한 유저.' 체크.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은 휴대폰을 뒤집으려다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차이현: 감기 안 걸렸습니다. 보고 드립니다.]

사진이 한 장 따라왔다. 냄비에 끓고 있는 김치찌개. 두부가 반듯하게 썰려 있었다. 두부까지 반듯한 사람이었다.

[정서윤: 보고 접수. 두부 크기가 다 똑같네요.]

[차이현: 자취 9년 차라서요.]

[차이현: 까치 일정은 안 밀립니다.]

[정서윤: 김치는 어디 거예요?]

[차이현: 어머님이 보자기에 같이 넣어 주신 거요. 솔뫼리 김치.]

[정서윤: 우리 엄마 김치를 왜 차이현 씨가 먹어요. 저도 아직 안 뜯었는데.]

[차이현: 오시면 드릴게요.]

서윤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오시면. 어디로. 답장 칸에 '어디로요'라고 쳤다가 지웠다. 대신 '됐어요'라고 보냈다. 이현에게서는 답 대신 김치 뚜껑을 닫은 사진이 왔다. 뚜껑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서윤 씨 몫'.

서윤은 답장을 보내고 한참 동안 그 두부 사진을 봤다. 그리고 표로 돌아가 한 줄을 더 적었다.

항목 일곱. 그 사람이 보낸 두부 사진을 오 분 넘게 봤다.

체크.

항목 여덟.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싫다.

이건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상해 봤다. 약사 선. 이현 어머니가 찾고 있다는 새 후보. 누군가 이현 맞은편에 앉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이현이 그 사람 컵 옆에 매직으로 무언가를 적어 주는 장면.

서윤은 노트북을 탁 덮었다.

덮고 나서야 알았다. 방금 그 소리가, 회의실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덮는 소리와 똑같았다.

여덟 개 중 여섯 개. 마지막 하나는 체크할 필요도 없었다.

월요일 오전, 기준표의 여덟 번째 항목은 예고 없이 실전이 됐다.

디자인팀에 새로 온 신입이 까치 이미지 파일을 들고 개발팀 쪽으로 갔다. 단발머리에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현의 자리 옆에 쪼그려 앉아 모니터를 가리켰다.

"선임님, 까치 날개가 이렇게 접히는 게 맞아요?"

이현이 의자를 돌려 화면을 봤다. 뭐라고 설명했다. 신입이 웃었다. 이현이 무언가를 포스트잇에 적어 신입에게 건넸다.

포스트잇. 반듯한 글씨.

서윤은 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입안에서 뭔가가 납작해지는 감촉이 났다.

"선배." 민지가 속삭였다. "빨대요."

서윤은 입에서 빨대를 뺐다. 끝이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컵 안의 라떼는 한 모금도 줄지 않았는데.

"……회의 자료 보다가."

"회의 자료가 개발팀 쪽에 있어요?"

서윤은 빨대를 새것으로 바꿨다. 그리고 속으로 여덟 번째 칸에 체크했다. 굵게.

월요일 점심, 서윤은 민지와 회사 앞 국숫집에 갔다. 수저를 놓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민지야, 친구 얘긴데."

"네, 선배 얘기요."

"친구 얘기라니까."

"네에, 친구 얘기. 들을게요." 민지가 턱을 괴었다. 표정이 전혀 친구 얘기를 듣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랑 약속을 했어. 서로 좋아하게 되면 그 약속을 끝내기로."

"그런 약속을 왜 해요?"

"……그러게."

"아니, 진짜 왜요? 좋아하게 되면 끝내는 약속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건 약속이 아니라 저주죠."

서윤은 국수를 한 젓가락 크게 떠 넣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냅킨에 그 조항을 쓴 사람이 자기였다.

"근데 그 친구가 좋아하게 됐어요?"

"……그런 것 같대."

"상대방은요?"

"그 사람은 약속할 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했대."

민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신중한 얼굴이었다.

"그럼 방법은 두 가지네요. 하나, 끝까지 들키지 않는다."

"둘은?"

"상대방도 좋아하게 만든다. 그럼 둘 다 약속 위반이니까 쌤쌤이죠."

"그게 되면 누가 고민을 해."

"선배, 아니, 선배 친구분은요. 기획자예요?"

"……왜?"

"그냥요. 말하는 게 꼭 기획자 같아서."

"기획자 아니야."

"그럼 다행이다. 기획자면 큰일이거든요."

"왜?"

"기획자는 약속 문구를 너무 잘 써요. 빠져나갈 구멍 없이." 민지가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저희 선배가 딱 그래요. 기획서에 구멍이 없어서 차 선임님이 맨날 공수로만 공격하잖아요."

서윤은 냅킨 위의 조항들을 떠올렸다. 구멍이 없었다. 제4조에는 예외도, 유예도, 밑줄도 없었다.

서윤은 국물을 마셨다. 뜨거웠다. 민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계산할 때 서윤의 몫까지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친구분 힘내시라고."

그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찬 다 먹었느냐, 보자기는 돌려 달라, 설에는 몇 시에 오느냐. 서윤은 이불 속에서 네, 응, 몰라, 로 대답했다.

"이현이는 잘 지내니?"

"엄마, 그 차 씨가 또……."

5년 동안 수백 번 한 문장이었다. 그 뒤에는 늘 흉이 따라왔다. 회의에서 또 내 기획을 깎았다, 또 공수 타령이다, 또 사람을 무시한다.

서윤은 그 뒤를 잇지 못했다. 한참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말했다.

"……또 커피를 사 왔어."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그게 흉이야?"

"……아니."

"그럼 뭔데."

"몰라."

"서윤아."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너 걔 흉볼 때마다 목소리가 올라갔거든. 근데 지금은 내려갔어."

"……엄마, 나 잘게."

"그래, 자라. 이현이한테 보자기 안부 전해."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한 통 들어왔다.

[할머니: 손주며느리 잘 자라]

[할머니: 이현이도 잘 자라 햇다]

서윤은 두 번째 줄을 오래 봤다. 할머니가 이현에게도 똑같이 보냈다는 뜻인지, 이현이 할머니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고 했다는 뜻인지. 받침 빠진 문장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알았으면 잠을 못 잤을 것이다.

[정서윤: 할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지갑을 열었다. 카드칸에서 냅킨을 꺼냈다. 스탠드 불빛에 펼쳤다. 앞면에 네 조항, 뒷면에 한 조항.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즉시. 조항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서윤이 적었다. 리스크 관리라고 하면서.

그녀는 그날 밤 편의점 파라솔을 떠올렸다. 이 조항을 말했을 때, 이현은 피식 웃었다. 회의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커피도, 우산도, 치과 대기실의 사십 분도. 전부 '계약 관리'였다. 그 사람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남들 보기에 질투처럼 보여야 가짜 연애가 진짜처럼 보인다고. 논리적이었다. 개발자다운 설계였다.

그리고 서윤이 입을 여는 순간, 그 설계는 끝난다. 제4조. 즉시 파기.

파기되면 어떻게 될까. 설에 할머니 떡국은 없다. 아빠는 사위를 잃는다. 비상계단의 종이컵도, 컵 옆의 '시럽 1/2'도 없다. 그리고 회의실 맞은편에는 다시, 5년 동안의 원수가 앉는다.

아니, 원수보다 나빴다. 이제는 서윤만 아는 원수였다.

서윤은 냅킨을 접었다. 모서리를 두 번, 반듯하게. 누구한테 배운 건지 알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기획자답게, 가장 리스크가 적은 안.

들키면 끝이다. 그러니까, 들키지 않으면 된다.

그러려면 예전처럼 굴어야 했다. 5년 동안 했던 대로. 반박하고, 째려보고, 커피를 받으면 고맙다는 말 대신 시럽이 많다고 트집을 잡는 것.

서윤은 불을 끄고 누웠다. 눈을 감고 내일 회의 안건을 떠올렸다. 까치 편지의 금칙어 목록. 싸울 거리는 충분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열 시, 정서윤은 회의실에서 차이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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