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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연무

مؤلف: moominkiller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7-27 18:23:32

연무의 무릎이 돌바닥에 닿았다.

쿵.

일곱 명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으나 위지헌의 신 끝이 그쪽 길을 막고 있었다.

"회암역에 군령을 보냈느냐."

병풍 뒤의 물음은 짧았다.

연무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인은 전달만 했습니다."

평상에 누운 오상궁이 들것째 정전 안으로 들어왔다. 의원이 곁에 붙어 있었다.

오상궁의 목소리는 갈라졌으나 끊기지 않았다.

"패는 저자가 가져왔습니다."

허도겸이 불에 탄 압송문을 펼쳤다.

가장자리의 검은 재가 상 위에 떨어졌다.

형부 도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허도겸이 두 공문을 같은 상 위에 펼쳤다. 한쪽은 불에 그슬렸고 다른 쪽은 형부의 붉은 인 아래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글자는 달라도 사람을 끌어가라는 마지막 한 줄은 같았다.

허도겸은 마지막 한 줄이 겹치도록 두 종이를 포갰다.

불에 탄 구멍 사이로 형부 공문의 같은 글자가 드러났다.

종이를 조금 움직일 때마다 병부 참의의 인이 재 아래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가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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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60. 두 개의 봄

    북에서 세 번째 서신이 온 날, 남에서도 한 가지가 왔다.두 가지가, 같은 저녁에 왕부에 닿았다.*북의 서신은, 여전히 한 줄이었다.'골짜기 둘을 되찾았다. 봄이, 조금 가까워졌다.'월령은 그 한 줄에 잠깐 웃었다. 봄이 가까워졌다는 말은, 그가 무사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친 데를 적지 않는 사람이라, 그녀는 그 짧은 안부에서 무사만을 읽어 냈다.그러나 그 웃음은, 함께 온 군보 앞에서 곧 걷혔다.그 아래, 군보 한 장이 함께 있었다.되찾은 마을에서 흑령의 진막을 뒤지다, 낯선 물건 하나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땅의 눈과 길을 그린 지도였다. 흑령의 거친 글씨가 아니었다. 도성의 손이 그린 지도였다.그 지도의 귀퉁이에, 향을 먹인 자국이 있었다.향을 먹인 종이는 오래 두어도 좀이 슬지 않았다. 귀한 문서에나 쓰는 손질이었다. 국경 밖으로 나가는 지도에 그 손질을 한 자는, 그 지도를 오래 쓰려 한 자였다. 한 철의 노략이 아니라, 여러 해의 셈을 그린 자였다.월령은 그 군보를 읽고, 남쪽 절터의 향을 떠올렸다.북의 능선 뒤에 선 그림자와, 남의 절터에서 향을 대는 그림자가, 한 그림자일지도 몰랐다. 두 개의 봄이, 하나의 그늘 아래 있었다.*같은 저녁, 마 어멈이 통에서 새것 하나를 꺼내 왔다.이번에는, 종이가 아니었다.마른 꽃 한 송이였다.여러 번 접힌 종이 대신, 마른 붉은 꽃 한 송이가 통 바닥에 놓여 있었다.월령은 그 꽃을 보았다.그리고, 숨이 한 박자 멎었다.적련초였다.*붉은 다섯 잎이, 마른 채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여느 꽃이라면 마르며 빛이 죽었다. 적련초는 독을 품은 채로 말라, 붉은빛만 남았다.월령은 그 꽃을 전생에 딱 한 번 보았다. 어머니의 약사발 곁에, 마른 잎 몇이 떨어져 있던 날. 그날 그녀는 그것이 무슨 꽃인지 몰랐다. 알았을 때는, 어머니가 이미 없었다.전생에, 그 꽃이 어머니를 죽였다.유씨는 그 붉은 꽃의 독을 먹고, 딸보다 먼저 갔다. 이번 생에, 월령은 그 꽃이 피기 전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9. 강무진이 본 얼굴

    강무진이 그 밤 왕부에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없던 것이 있었다.과묵한 자의 얼굴에, 서두름이 있었다.강무진이 서두르는 것을, 월령은 처음 보았다. 저잣거리 그림자로 사는 자였다. 급보를 옮길 때조차 걸음을 고르던 사람이었다. 그가 걸음을 고르지 못했다는 것은, 본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었다."약방 골목에서, 석중이 다른 하나 앞에서 갓을 벗었습니다.""누구지.""금군의 교위입니다."월령의 손끝이 잠깐 식었다.*금군은 궁성을 지키는 군이었다. 궁문을 여닫고, 어전을 지키고, 후궁 처소를 드나드는 걸음을 살피는 자들이었다.그 금군의 교위가, 성 밖 절터 심부름꾼의 앞이 아니라 그 심부름꾼의 윗자리에 서 있었다.'연'의 실이 성 밖 역참과 남쪽 절터를 지나, 궁성의 문을 여닫는 자리에까지 닿아 있었다.궁의 밤 가마가 표를 떼고도 성문을 자유로이 드나든 까닭이, 거기 있었다. 문을 지키는 자가 한편이면, 표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성 밖의 향집이 성 안의 처소와 잇닿고, 그 사이를 금군의 교위가 지킨다면—그것은 자녕궁의 그늘이 다시 궁성의 문을 쥐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지난겨울, 섭정왕에게 순검이 돌아가며 자녕궁의 손이 문에서 밀려났다. 그 손이 순검이 반쯤 예부로 돌아간 이 봄을 틈타, 다시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섭정왕이 북에 있는 동안, 도성의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그 교위의 이름은.""방준이라 합니다."월령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러나 강무진이 옮긴 그 얼굴의 생김—왼 눈썹을 가르는 오래된 흉—은, 처음이 아니었다.전생의 마지막 밤.폐위된 그녀를 냉궁으로 끌고 간 것은 석중이었다. 그리고 그 냉궁의 문을 밖에서 잠근 것은, 왼 눈썹에 흉이 있는 금군의 교위였다.같은 흉이 이 봄에, 성 밖 절터와 궁성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월령은 그 흉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전생의 그 밤, 냉궁의 문이 밖에서 잠기던 소리를 그녀는 아직 기억했다. 빗장이 내려가던 둔한 소리. 그 소리를 낸 자의 왼 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8. 사흘에 한 번

    세임을 당하는 사람이, 세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저쪽이 물어 온 물음에, 고른 답을 내주는 것이었다.월령은 마 어멈을 통해, '연'에게 한 가지를 흘렸다. 왕부의 안주인이 사흘 뒤 저녁, 남쪽 어느 약방에 든다는 것이었다. 지어낸 걸음이었다. 그러나 지어낸 걸음일수록, 저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끼를 숨기지 않고, 미끼인 줄 알면서 내놓은 미끼였다.저쪽이 그 미끼를 물면,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아직 왕부의 눈을 제 것이라 믿는다는 것과, 왕부 안주인의 걸음을 실제로 노린다는 것.물지 않으면, 그것대로 답이었다. 저쪽이 이미 왕부의 눈이 돌아선 것을 알아챘다는 답.*그 사흘 동안, 유씨가 왕부에 다녀갔다.딸이 홀로 왕부를 지키는 것이 마음에 걸린 어미였다. 손에는, 딸이 어릴 적 좋아하던 약과 한 함이 들려 있었다."혼자 있느라, 끼니를 거르지는 않느냐.""방어멈이 오히려 저보다 잘 먹어요."월령이 웃었다. 유씨도 옅게 웃었다.두 생을 건너, 어미가 딸의 왕부에 약과를 들고 오는 봄이었다. 전생에는 없던 봄이었다.유씨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딸의 살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 시집보낸 어미의 예였다. 다만 돌아가기 전, 딸의 안색을 한 번 오래 보았다."낯빛이 여위었다.""봄이라 그래요.""…봄이라 그렇다면, 봄이 지나면 낫겠지."유씨는 그 이상 캐지 않았다. 딸이 무엇을 세고 있는지 다 알지는 못했으나, 무언가를 세고 있다는 것만은 어미의 눈으로 알았다.월령은 그 약과를 한 조각 물었다. 단맛이 입에 도는 동안만은, 남쪽 절터도 궁의 밤 가마도 잠깐 뒤로 물러났다.*사흘째 저녁, 월령은 그 약방에 들지 않았다.대신, 강무진이 그 약방 골목을 멀리서 지켰다.저녁이 깊자, 골목 어귀에 낯선 자 둘이 들었다. 병을 얻은 자의 걸음이 아니었다. 누군가 들기를 기다리는 걸음이었다.강무진은 그 둘을 오래 보았다. 하나는 골목 어귀에서 드는 사람을 살폈고, 하나는 약방 처마 그늘에 몸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7. 되찾은 우물가

    북의 봄은, 골짜기마다 눈이 녹는 속도가 달랐다.위지헌은 그 속도를 셈에 넣었다. 눈이 먼저 녹는 골짜기는 길이 열렸고, 늦게 녹는 골짜기는 아직 저들의 방패가 되었다. 지난겨울 살구골에서 저들을 몰아넣던 셈을, 이번 봄에는 거꾸로 저들이 쓰고 있었다.누군가, 저들에게 이 땅의 눈을 가르쳐 준 자가 있었다.*흑령이 지키던 마을 하나를, 북경군이 사흘 만에 되찾았다.싸움은 겨울보다 길었다. 저들은 약탈하고 물러나는 대신, 담을 쌓고 버텼다. 담을 깨는 데, 사람이 상했다.되찾은 마을의 우물가에, 북경군 열둘의 주검이 뉘였다.위지헌은 그 열둘의 이름을 군보에 적게 했다. 지난겨울 회암역의 일곱을 월령이 이름으로 지켰듯, 그도 이 열둘을 이름으로 남겼다.숫자로 세면 열둘이었으나, 이름으로 세면 열두 집이었다.열두 집에는, 아직 그 소식이 닿지 않았다. 봄이 되면 돌아올 아비를, 아들을 기다리는 집들이었다. 위지헌은 그 집들이 소식을 받는 날을 알았다. 이름을 적는 붓이, 그 날을 미리 무겁게 적었다.전장을 오래 오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적는 일에는, 오래되어도 무뎌지지 않는 데가 있었다.*심도윤이 그 우물가에 함께 섰다."저들이 달라졌습니다."노장이 낮게 말했다."흑령은 본디 셈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눈이 어디서 녹는지, 담을 어디에 쌓는지, 이제 저들이 압니다. 누가 가르쳤습니다."위지헌의 눈이 북쪽 능선으로 향했다.능선 너머에, 저들의 뒤에 선 자가 있었다. 그자가 흑령의 창을 직접 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흑령에게 이 땅의 셈을 쥐여 준, 도성 쪽의 그림자였다.도성의 남쪽 절터에서 향을 대는 자와, 북의 능선 뒤에서 흑령에게 눈을 가르치는 자가, 한 그림자인지 다른 그림자인지—위지헌은 아직 알지 못했다.다만, 봄이 깊어질수록 그 그림자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있었다.흑령은 창을 들었고, 그 그림자는 셈을 들었다. 창은 막을 수 있었으나, 셈은 막는 법이 달랐다. 위지헌은 그 셈을 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6. 내명부의 봄

    세임을 당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다.숨거나,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이거나.월령은 마 어멈을 통해, 저쪽이 물어 온 종이에 답을 돌려보냈다. 왕부의 안주인은 요즘 내명부 다회에 든다는, 사실이되 무해한 답이었다. 감출 것을 감추려면, 감춰도 될 것 하나는 먼저 내주어야 했다.그러고는, 제가 세일 차례를 세는 대신 저쪽을 세러 궁으로 들었다.*두 번째 다회에서, 월령은 지난번보다 더 오래 앉았다.말은 여전히 아꼈다. 다만, 지난번에 그려 둔 자리의 지도를 다시 폈다. 누구의 처소가 밤에 조용하고, 누구의 처소가 밤에 문을 여는지.류담희가 그 곁에서, 여전히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재잘거렸다."왕비마마, 저는 밤에 잠이 없어서요. 청화각 뒤뜰에 앉아 있으면, 가끔 다른 처소 가마 나가는 소리가 들려요.""가마가, 밤에 나가더냐.""예. 한 처소가 사흘에 한 번쯤, 밤에 가마를 내보내요. 표도 없이요. 저는 그게 신기해서, 세어 봤어요."류담희는 그 말을 아무 셈 없이 했다. 신기한 것을 신기하다 말하는 얼굴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아무 무게 없이 받았다. 다만, 사흘에 한 번이라는 말을 마음에 눌러 두었다.석중이 남쪽 절터에 드는 것도, 사흘에 한 번이었다.우연일 수도 있었다. 궁의 어느 처소가 밤에 가마를 내보내는 사흘과, 성 밖의 사내가 절터에 드는 사흘이 그저 나란히 놓인 것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월령은 우연을 셈에 넣지 않는 법을 오래전에 배웠다. 두 개의 사흘이 같은 걸음으로 도는 것을, 우연이라 부르기에는 걸음이 너무 고왔다.*월령은 그 처소를 바로 짚지 않았다.류담희의 뒤뜰에서 보이는 처소는 하나가 아니었다. 밤에 가마를 내보내는 처소가 어디인지를 짚으려면, 한 번의 다회로는 부족했다.다만, 궁 안에 사흘에 한 번 밤 가마를 내보내는 처소가 있고, 그 가마가 표를 떼고 남쪽 절터에 든다는 것만은 두 개의 점으로 이어졌다.월령은 그 두 점을 장부에 적지 않았다. 궁 안의 일을 종이에 적으면, 그 종이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5. 절터의 가마

    강무진이 남쪽 절터를 멀리서 지킨 지, 이레가 지났다.이레 동안, 절터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병을 얻은 자들이 향 대는 어른을 찾아 들었고, 그 앞에서 갓을 벗었다. 석중은 그 문을 지키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강무진은 그 어른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다. 향 대는 어른은 낮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들일 때도,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만 말했다.강무진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림자로 사는 자의 이레는, 조바심으로 세는 이레가 아니었다. 그는 절터 건너 마른 갈대밭에 몸을 낮추고, 드는 자와 나는 자를 하루하루 세었다.병을 얻어 드는 자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나오는 자들의 얼굴에는, 절박함 대신 옅은 홀림이 있었다. 향 한 대에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향 한 대에 마음이 기우는 것임을, 강무진은 그 얼굴들에서 보았다.*이레째 저녁, 절터에 가마 하나가 들었다.병을 얻은 백성의 가마가 아니었다. 휘장이 깨끗했고, 가마꾼의 걸음이 훈련된 걸음이었다.강무진은 그 가마를 오래 보았다.궁에서 나온 가마였다. 다만 궁의 어느 처소에서 나왔는지를 알리는 표는, 떼어 내고 있었다. 표를 뗀 가마는, 보이면 안 되는 걸음을 하는 가마였다.가마가 절터 앞에 멎자, 향 대는 어른의 발 안쪽에서 사람이 나와 그 가마를 맞았다. 백성을 맞을 때와 걸음이 달랐다. 허리가 더 깊이 숙여졌다.병자를 맞던 향집이, 그 가마 하나에만은 예를 갖추고 있었다. 병을 고치러 온 가마가 아니라, 향집이 받드는 윗사람의 가마라는 뜻이었다.가마는 향 대는 어른의 발 안으로 들었다가, 향 한 대가 탈 동안 머물고 나왔다.강무진은 그 가마를 뒤쫓지 않았다. 뒤쫓으면, 절터가 왕부의 눈을 알아챘다. 다만 그 가마가 성문 어느 쪽으로 드는지만, 멀리서 세었다.가마는, 궁성 쪽으로 들어갔다.*그 밤, 강무진이 왕부에 낮게 옮겨 왔다."절터에 궁의 가마가 들었습니다. 표를 뗀 가마였습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향 대는 어른의 절터에, 궁의 사람이 몰래 다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3. 매듭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2. 틈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1. 실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0. 붓끝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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