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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비워 둔 칸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6 11:57:04
가례 사흘 뒤, 위지헌이 조정에 들었다.

넉 달을 비운 자리였다. 삭원의 겨울을 하루에 끝내고 돌아온 섭정왕에게, 대신들의 예가 한 뼘씩 깊어졌다.

경화제가 순검패를 돌려주었다.

한 달 전 거둔 도성 순검권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친정 승전의 상으로 삼지 않았다. 다만 정무를 논하는 자리에서, 지나가듯 예부에 명했다.

"섭정왕의 순검을 전과 같이 둔다."

돌려주는 말치고는, 무게가 실리지 않은 말이었다.

위지헌은 그 가벼움을 읽었다. 가볍게 돌려준 것은, 가볍게 다시 거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관이 그 명을 받아 적었다. 붓이 종이를 지나는 소리가, 넓은 정전에서 유난히 작게 들렸다.

삼황자 위명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난겨울 자녕궁과 반걸음 어긋난 뒤로, 위명서는 어전에서 말수가 줄었다. 순검패가 섭정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예전처럼 눈에 힘을 주지 않았다. 다만 비워 둔 결재 칸을, 한 번 오래 보았다.

그 빈 칸을 읽는 눈이, 위지헌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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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신호냐.""등롱이요. 기와 위에서요. 세 번 켰다 껐어요. 그러고 손이요.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가락 셋을요."초비가 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가락 셋을 들어 보였다."삼경이에요, 마마님. 오늘 밤이요. 묵아가 그렇게 읽었고, 저도 그렇게 읽었어요.""등롱을 든 게 설련이인 건 확실하냐.""손이 궁인 손이 아니에요. 물지게 지던 손이 아니에요. 삼경까지는 아직 있어요, 마마님."월령이 아이를 보았다. 열이 오르는 사흘의 마지막 밤이었다."청아야.""예, 마마님.""봄이는 네가 안아라. 어멈은 수건을 갈고. 나는 삼경에 담에 간다.""마마님, 아기씨가 이런데요.""안다. 그래서 너한테 맡긴다."청아가 더 말하지 않고 아이를 받아 안아 뜨거운 것을 제 가슴에 댔다. 방어멈이 수건을 짰다. 할 말이 없어서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삭원 고개는 성터 위에 있었다.산으로 빠진 흑령 본대 이백이 그 고개 하나에 앉아 있었다.위지헌이 말 위에 있었다. 왼 어깨의 붕대는 대창포 안에 감추어 밖으로 보이지 않았다."저 고개를 넘으면 흑령 땅이다. 놈들이 저기 앉아 있는 한 염로도 살구골도 남의 것이다. 좌익은 명서다. 열아홉하고 북문군 오십을 데리고 고개 왼쪽 비탈에 서라. 본대가 정면에서 밀면 놈들이 왼쪽으로 빠진다. 거기서 막아라.""막습니까, 칩니까."위명서가 종이를 품에 넣은 채 물었다."오늘은 막는다. 내일 친다.""예, 숙부.""명서야.""예.""막는 것이다. 비탈 밖으로 나가지 마라.""막기만 하겠습니다."위명서가 돌아서자 위지헌이 그 등을 보았다. 품 안의 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은 지 이틀째였다."왕야, 삼전하 앞에는 아무도 안 세우십니까.""정무가 내 앞이니 명서 앞은 비었다. 그래서 막으라고만 했다."정무가 왼팔에 붕대를 감은 채 앞에 섰다. 붕대 감은 사람 셋이 한 줄에 서 있었다.*밤이 되기 전에 고개 위에서 화살이 내려왔다.아래의 수를 세어 보려는 시험이었다. 북경군이 방패를 올렸다. 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8. 도성의 봄

    새벽 세숫물이 미지근했다.방어멈이 봄의 이마에 얹을 수건을 적시려고 그것을 부었다. 찬물이 필요한데, 부엌에서 길어 온 물이 밤새 방 안에 있어서 미지근해져 있었다."미지근해요. 우물에 갔다 올게요.""어멈, 내가 갈게.""아씨는 애 옆에 계세요. 이런 건 늙은 다리가 하는 거예요."방어멈이 혀를 차고 우물로 갔다.봄이 요 위에서 울지 않았다. 우는 것보다 그것이 나빴다. 눈을 반쯤 뜨고 천장을 보고 있었고, 뺨이 붉었고, 손을 대면 뜨거웠다. 어제 저녁부터였다.월령이 밤새 그 곁에 앉아 손을 아이 가슴에 얹고 숨을 세었다. 빠르다, 빠르다, 조금 느리다, 다시 빠르다.*곤원전에서 보낸 태의가 회색 옷에 목패를 달고 왔다.아이의 손목을 짚고, 눈꺼풀을 뒤집고, 입을 벌려 혀를 보았다."열병이옵니다. 아이들 것이요. 돌 전에 한 번씩 앓는 것이옵니다. 사흘 오르고 사흘 내립니다.""역병이 아니고요.""아니옵니다. 그 소문은 소인도 들었습니다만, 이건 아이들 열입니다."청아가 아침에 우물에서 그 소문을 듣고 왔다."마마님, 우물가에서 벌써 그래요. 왕부 아기씨가 열병이라고요. 어머, 누가 그렇게 빨리 퍼뜨렸을까요."지난여름 소문이 반나절 만에 되돌아왔다."약은 안 씁니다. 돌 전 아이 몸에는 약이 열보다 셉니다. 찬 수건을 갈아 주시고, 젖은 먹는 만큼만 먹이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시옵니다.""기다리라고요.""예, 왕비마마. 사흘이옵니다.""사흘 뒤에도 안 내리면요.""그때는 소인을 다시 부르시옵니다."기다리라는 말을 월령은 열흘 사이에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설련의 종이에서, 한 번은 지금이었다.*방어멈이 두 번째 밤을 샜다.반 각에 한 번 찬 수건을 갈았다. 우물물을 새로 길어 대야를 마루에 두었고, 마루로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문틈으로 드는 찬 바람을 제 등으로 막았다."아씨, 주무세요. 애 열은 제가 봐요. 아씨가 옆에서 눈을 벌겋게 뜨고 계시면 애가 더 못 자요. 애도 압니다, 어미 얼굴을. 저는 얼굴이 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7. 소연화

    들것 위에서 심각이 강무진을 불렀다."강 호위, 왜들 저기 서 있소. 종이 한 장 놓고.""모르겠습니다. 저는 못 봤습니다.""못 봤으면 가서 보시오. 나는 못 가니까.""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부장 곁에 하나는 있어야지요.""그럼 저건 셋이 종이를 놓고 서 있는 게 아니라, 종이가 셋을 세워 놓은 거로군.""그렇게 보입니다."강무진은 붕대 감은 왼팔을 오른손으로 잡고 서 있었다. 사당 안의 셋은 움직이지 않았다.*값 칸에 글씨가 있었다.'심부름이 끝나면.'일곱 자였다. 앞면의 가는 글씨가 아니라 인장을 찍은 손의 굵은 셈방 글씨였다. 그 손이 제 딸의 이름 옆에 그 일곱 자를 적었다. 심부름이 끝나면 지운다는 뜻이었다.위명서가 허락 없이 위지헌의 손에서 종이를 들었다. 부푼 손으로 잡아서 종이가 구겨졌고, 국자는 눈 위에 떨어졌다."소연화."위명서가 읽었다."어머니 이름입니다. 입궁하실 때 쓰신 이름이요. 아바마마가 그리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요.""안다.""외조부가 어머니 이름을 여기 적으셨습니다.""그렇다.""심부름이 끝나면."위명서가 그 일곱 자를 소리 내어 읽고, 다시는 읽지 않았다. 종이를 든 채 서 있는데 눈이 와서 종이 위에 앉았고, 위명서는 그것을 털지 않았다. 위지헌이 손을 뻗어 종이 위의 눈만 털었다."어머니는 심부름꾼이었습니까.""그 봄에 침방 옷을 입고 심부름을 온 것은 이미 숙비였다. 숙비가 아비의 심부름꾼이었다.""그리고 심부름이 끝나면 지워질 사람이었고요."위지헌이 답하지 않았다.*위명서가 오래 서 있었다.정무가 등을 안으로, 얼굴을 밖으로 두고 사당 문 자리에 섰다. 눈이 정무의 어깨에 앉았는데, 정무는 그것을 털지 않는 사람이었다.위지헌은 조카에게 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제 어깨의 눈을 왼쪽, 오른쪽 털고 대창포 자락을 털었다. 털 것이 없을 때까지 털었다. 터는 동안은 조카에게 아무 말도 안 해도 되었다.위명서가 그것을 보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6. 눈 속의 사당

    "살구 마을이요."위명서가 그 말을 받았으나, 받아서 어디에 둘지 몰랐다. 국자를 든 손이 부풀어 있어서 그것을 내려놓지도 못했다."탄 마을이라고만 하셨습니다.""탄 마을이 살구 마을이다. 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데다. 나무가 스물은 있었다.""지금은요.""그루터기다. 네가 밤새 옆에 두고 눈을 퍼 나른 게 그거다."위지헌은 그 말만 하고 사당 쪽으로 걸었다. 위명서는 따라가지 않고 검은 얼굴로 자루 옆에 서 있었다. 숙모가 여섯 살에 살던 마을에서 제가 군량 절반을 태웠다는 것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몰랐다.*심각이 낮에 창 두 자루에 망토를 건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북문군 넷이 들었다. 붕대로 굵어진 왼쪽 다리 위에 눈이 앉았는데, 손이 닿지 않아서 심각은 그것을 털지 못했다.탄 담 안에 들어서자 심각이 들것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전하, 여기가 어디입니까.""살구 마을이오."심각이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급한 사람이 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팔을 들어 곳간 뒤 낮은 돌담 쪽을 가리켰다."사당입니다. 저기요. 어머니가 저기서 빌었습니다. 아버지 살아 돌아오시라고요. 저는 여덟이었고 누이는 여섯이었습니다. 누이가 저 담 위에서 떨어져서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흉이 남았을 텐데, 보셨습니까.""못 봤소.""머리카락 밑입니다. 왼쪽이요."위지헌이 그 말을 받고, 받은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옥대에 얹힌 손이 매듭 위에서 잠깐 멎었다."부장은 성터에 계시라고 했소.""다리가 다쳤지 귀가 다친 게 아닙니다. 본진이 탔다는데 성터에 누워 있으면 그게 부장입니까, 전하."강무진이 들것 옆에서 헛기침을 했고, 심각이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사당은 지붕이 없었다.돌담 셋에 문 자리 하나, 안에 마루가 있었던 자국 위로 눈이 앉아 있었다. 담이 낮아서 불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위지헌이 그 안에 서고 정무가 뒤에 섰다. 위명서는 들어오지 않고 문 자리에 섰다."뭘 찾으십니까, 숙부.""명부지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5. 종이

    "안 마시나."숙비가 제 잔은 들었다. 쉰 목으로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도로 덮는 손이 느렸다."목이 안 말라요, 마마.""꼭지가 오른쪽인데.""예.""오른쪽이면 마셔도 되는 잔이지. 설련이가 자네한테 그리 배웠고, 그대로 놓았네.""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목이 안 말라요."월령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매 안의 얇은 종이가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는 것이 오늘 이 방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설련은 병풍을 보는 눈으로 고모 곁에 서 있었다."자네 남편이 북에서 이기면 내 아들이 산다."숙비가 잔을 든 채 이어 갔다."자네 남편이 지면 둘 다 죽고. 그러니 나는 섭정왕이 이기길 빌어야 하는 사람일세. 우스운 셈이지.""셈이 아니에요, 마마. 그냥 그런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눈 위에 서 있으니까요."숙비가 웃다가 기침을 삼켰고, 삼킨 것이 목에서 소리를 냈다.*담 밖에서 병사장이 제 발을 보고 있었다.해가 미시 자리에 왔다. 기윤이 반대편 지붕에서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초비가 지붕 위에서 문을 보았다.길 끝에서 사람이 가마가 아니라 걸어서 왔다.늙은 상궁이 앞에 서고, 그 뒤에 예복을 갖춘 여인 하나가 신이 먼지로 하얗게 된 채 왔다.병사장이 그 얼굴을 알았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황후마마."황후가 문 앞에 섰다. 병사장을 보지 않고, 안에서 열면 열리는 붉은 문을 보았다."섭정왕비를 내놓아라. 곤원전이 왔다."두드리지 않고 그 한마디만 문 안으로 보냈다.*방 안으로 궁인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마마, 곤원전 마마께서 문 앞에 와 계시옵니다."숙비가 소리 없이 잔을 놓았다."가마를 타고 왔더냐.""아니옵니다. 걸어오셨사옵니다.""황후가 내 문 앞까지 걸어왔어."숙비가 무엇인가를 다시 매기는 얼굴로 월령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가게, 섭정왕비. 곤원전이 자네를 데리러 온 것이니. 안 마신 잔은 그대로 두고.""예, 마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14. 삭원

    옛 삭원성 성터의 돌담은 반만 남아 있었다.남은 반 안에 심각의 북문군 이백이 갇혀 있었고, 무너진 반 쪽 비탈에 흑령이 엎드려 있었다. 밤인 데다 불을 피우지 않는 놈들이라 수를 셀 수 없었다.정무가 앞에 섰다."왕야, 비탈 아래로 돌아서 오릅니다. 놈들은 담만 보고 있습니다.""그렇게 해라. 소리 없이.""예. 왕야는 제 뒤에 서십시오."위지헌이 정무의 반 걸음 뒤에 섰다. 도성을 떠난 뒤로 처음이었다. 늘 제가 하던 말을 정무가 했으니, 강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북경군이 비탈 아래서 소리 없이 올라갔다. 눈이 발소리를 먹었다. 흑령이 알아챈 것은 등 뒤에서 칼이 왔을 때였다.*길지 않았다.정무의 칼이 먼저 갔고 위지헌의 칼이 그 옆으로 갔다. 검은 것들이 눈 위에서 일어나다가 도로 누웠다. 나머지는 산으로 뛰었다."왕야, 산으로 간 놈들은요.""두어라. 밤에 산을 쫓지 않는다."돌담 위에서 북문군이 소리를 질렀다. 반나절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소리였다. 위지헌이 담을 넘었다.*심각은 담 밑 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앞으로 뻗은 왼쪽 다리 허벅지에 화살대가 꺾인 채 박혀 있었고, 그 아래 눈이 검었다."전하, 늦으셨습니다."심각이 급한 사람답게 급하게 말했다."늦지 않았소. 부장이 살아 있으니 늦은 것이 아니오."위지헌이 그 앞에 무릎을 꿇자 대창포 자락이 검은 눈에 닿았다. 화살은 뼈를 비켜 갔고 살은 비켜 가지 못했다."다리요. 다리만입니다. 다리는 둘이니까 하나쯤은 괜찮습니다.""입을 다무시오.""예, 전하."강무진이 윤백이 넉넉히 넣어 준 붕대를 꺼내고 화살대를 잡았다."부장, 이를 무십시오. 하나, 둘에 뽑습니다.""셋에 뽑는 게 아니오?""둘에 뽑습니다. 셋을 기다리면 힘이 들어가서요."화살이 뽑혔다. 심각은 소리 대신 급한 말을 냈다."누이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 하십시오. 어차피 어머니가 아실 테니까요. 어머니가 아시면 누이도 알고, 그러면 전하가 말 안 하신 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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