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 제 것을 봅니다, 어머니."위명서가 답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제 문양이 달렸으니 제 것이지요. 그리 말씀하신 것은, 어머니셨습니다."숙비가 창고 안으로 한 걸음 들었다. 느린 걸음이었다. 그 느림이, 오늘은 병 때문인지 셈 때문인지 위명서는 알 수 없었다."그 종이를 내려놓거라, 명서야.""내려놓으면… 안 본 것이 됩니까.""안 본 것이 된다. 이 어미가 그리 만들어 주마."위명서가 그제야 돌아섰다. 어머니를 보았다. 야윈 얼굴. 핏기 없는 입술. 그런데 눈이 야위지 않았다. 그 눈이 아들을 읽고 있었다. 물건을 읽는 눈으로."어머니는 저도 읽으시는군요. 물건처럼."*숙비가 손을 내밀었다.종이를 달라는 손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 손에 무엇이든 놓았다. 붓도, 매화 가지도, 처음 쓴 글씨도. 놓으면 어머니가 웃었다.위명서는 놓지 않았다.대신 셋째 궤를 닫았다. 첫 궤와 둘째 궤도. 그러고는 그 세 궤를 제 발치로 끌어당겼다."이것은 제 것이니, 제가 처분하겠습니다.""어디로 말이냐.""아바마마께 올립니다."숙비의 손이, 멎었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도로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네가 어미를 고하겠다는 말이냐. 이 어미를.""고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위명서가 낮게 말했다."제 창고에서 나온 제 것을 제가 아바마마께 올릴 뿐입니다.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아무것도 안 하신 것입니다. 늘 그러셨듯이."*숙비는 오래 말이 없었다.그러다, 웃었다. 옅게. 오래 안 웃던 얼굴의 웃음이었다."너도 셈을 할 줄 아는구나, 명서야.""어머니께서 가르치셨습니다."숙비가 돌아섰다. 낮은 발소리가 창고를 나갔다. 회랑 끝까지. 그러고는 들리지 않았다.위명서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종이를 쥔 손이 아직 떨렸다. 떨리는 채로, 그는 그 종이를 접었다. 접어서 품에 넣었다. 궤와 함께 올릴 것이 아니었다. 이것만은.*편전에, 궤 셋이 놓였다.경화제는 옥필을 굴리지 않았다. 아들
창고 안은 향이 없었다.위명서는 그것부터 알았다. 어머니의 처소는 늘 무향이었다. 정갈하게, 아무 냄새도 없이. 이 창고가 그랬다. 제 살림살이를 둔 곳이라면 먼지 냄새라도 나야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등잔을 들어 올렸다.궤가 있었다. 셋. 살림살이 궤가 아니었다. 자물쇠가 달린 옻칠 궤. 그 자물쇠에도 매화가 찍혀 있었다.*첫 궤는 돌로 열었다.금이었다. 옥이었다. 값이 안 변하는 것들. 위명서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만질 까닭이 없었다.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지기 전에 알았다.둘째 궤에는 종이가 있었다.물표 묶음. 삼황자부 도장이 찍힌 것들. 제가 찍은 적 없는 제 도장. 그 도장을 누가 쥐고 있는지, 이제 물을 필요가 없었다.그 밑에, 명단이 하나 있었다.호위. 내관. 침소 나인. 삼황자부 사람 열둘의 이름. 이름 옆에 작은 표. 자녕궁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표. 열두 살 때부터 문 앞에 서 있던 그 얼굴이, 첫 줄에 있었다.주란의 이름은, 없었다.위명서는 그 명단을 두 번 읽었다. 있어야 할 이름이 없어서. 침소 나인은 셋이 올라 있었다. 주란만 없었다. 어머니가 심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심었으나 셈에서 뺐다는 뜻이거나.어느 쪽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창고에서 처음으로 그를 조금 살렸다.*셋째 궤는 작았다.위명서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열지 않으면, 아직 아무것도 안 본 사람으로 남았다. 어머니가 보지 말라 한 것을 안 본 아들로.돌을 들었다.놋쇠가 울렸다. 한 번. 두 번.*종이 한 장이었다.붉은 실로 묶은, 낡은 종이. 사본이었다. 원본은 다른 데 있고, 이건 어머니가 아들 처소에 감춰 둔 것. 사람 이름이 세로로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 값. 값 옆에 붉은 표.위명서는 그 이름들을 읽었다.모르는 이름이 많았다. 아는 이름이 몇 있었다. 향방 궁녀. 침방 것. 고향에서 편지가 안 온다던 이름들.그리고 아랫줄.섭정왕가의 여아.
"어미가요? 삼전하가 아니라.""어미가. 아들은 그 창고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오. 살림살이다, 그리 들었을 테지. 뭐."노경이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이제… 나는 남소? 이만하면.""대감은요. 대감은 남으세요."월령이 답했다."집은, 제가 모르겠어요."노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진이 오른손 하나로 빗장을 뽑아 문을 열어 주었다. 붕대 감은 왼팔은 등 뒤에 있었다. 노경은 혼자 그 문을 나갔다. 방어멈이 그 등을 보다가, 혀를 찼다. 이번에는 안 됐다는 쪽으로.*국청의 처결은 하루 만에 났다. 종친부는 그 뒤에 의(議)를 붙였다.노가 가주 노경, 자녕궁과 통모하여 산 사람의 이름을 값으로 사고판 죄. 관직 삭탈, 가산 절반 몰수, 도성 밖 거주. 목숨은 남겼다. 남긴 것이 월령의 말이었다.배중곤이 그 의를 읽어 내릴 때, 발이 반 발 더 옮겨 갔다. 이긴 쪽으로."노가는… 끝났군요. 이걸로."윤백이 낮게 말했다."끝난 게 아니라요. 값을 치른 거예요."월령이 답했다."이름 산 값이요."윤백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월령은 물었다."왜요. 왜 그런 얼굴이에요?""노가 유배지가… 그게, 제 고향 근처라서요.""그래서요?""그래서…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마님."윤백이 물러났다. 강무진이 그 등을 보다가, 따라 나갔다. 마당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강무진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밤에, 위지헌이 노경의 말을 다시 들었다."…삼황자부 창고라.""예.""못 뒤진다.""알아요. 황자 처소니까.""형님도 못 뒤셔. 뒤지면, 아들 처소 뒤진 황제가 되니까."위지헌이 손을 탁자 모서리에 얹었다. 그 손이 멎지 않았다. 손가락이 나무를 두드렸다가, 멎었다가, 또 두드렸다."…그 문은 그 아이가 열어야 해. 그 아이가.""열까요? 그 아이가.""모른다."위지헌이 솔직하게 답했다. 월령은
청릉 창고 문에 봉인지가 붙었다.호부 관인이 찍힌 종이였다. 허도겸이 그것을 제 손으로 붙였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붙이고 나서 한 걸음 물러나 그 반듯함을 확인했다."낭중. 그거… 그거 붙이면요, 낭중이 붙였다는 것도 남는데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압니다. 압니다만.""지워 드린다고 했잖아요, 제가. 전에.""지우지 마십시오. 그건."허도겸이 관인을 소매에 넣었다."숫자로 안 떨어지는 일이… 하나쯤은요. 제 이름으로 남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쯤은."*고 내관이 어전의 뜻을 가져왔다.독고가 상단 청릉 본체 봉인. 물표 발행 정지. 상단 명의 재산 동결. 황제의 붓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칼이 다 벤 뒤에."그럼 숙비마마는요. 숙비마마 쪽은.""폐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아니 하셨습니다. 한 마디도요."고 내관이 답했다."…아무 말씀도 아니 하신 것이, 소인 보기엔 그것이 말씀이옵니다."늙은 내관이 마루에서 내려서다가, 잠깐 멈췄다."저, 왕비마마.""예, 말씀하세요.""봉인 명을 내리실 적에요, 폐하께서 옥필을 안 굴리셨습니다. 소인이 모신 뒤로… 두 번째입니다, 그것이.""첫 번째는요? 언제였는데요.""…대황자마마 때였습니다. 그때도 안 굴리셨지요."고 내관이 물러갔다. 월령은 그 등을 오래 보았다.*왕부 별채에서 독고진겸이 그 소식을 들었다."허. 젖줄이 끊겼구먼, 끊겼어.""젖줄이요? 무슨.""명부라는 게 값으로 돌아가는 거요. 이름을 적어 놔도 값을 못 치르면 안 지워지지. 그러니 상단이 마르면… 명부도 마르는 게요."독고진겸이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딸을 똑바로 보았다."네 이름도. 이제 못 지운다, 아무도."설련이 그 눈을 받았다. 잠깐. 그러고는 문가에서 한 걸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앉지는 않았다."제 이름이… 거기 있었어요? 그 명부에.""네가 자녕궁을 나온 날부터지. 그날부터.""값은요. 얼마였는데요.""…누이가 적으라 했고, 나는 적었다. 내 손으로. 값은 못 매
회춘당 앞에는 이날도 줄이 서 있었다.은매가 그 줄 끝에 섰다. 손에 약봉지를 들고. 앞에 선 아낙이 돌아보며 말했다."아가, 너도 애 있는 집이냐? 그 봉지.""소, 소인이 사는 집에요. 아기씨가 계셔서.""그럼 미리 지어 둬, 미리. 동쪽에 열병이 돈다잖니.""동쪽… 동쪽 어디요?"아낙이 잠깐 말을 못 했다."어디더라. 그게, 약방 주인이 그러던데, 어디라 했더라."은매는 그 대답을 가슴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는 줄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약방 주인 앞에 물표 석 장을 놓았다."소인이 이거… 이걸 주우러 왔는데요."*강무진이 약방 뒷문에서 나왔다.주인은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은매가 물표를 놓는 순간 알았다."열병이 어디서 돕니까. 어디서."강무진이 물었다."그, 동쪽에—""동쪽 어느 마을이요. 마을 이름을 대십시오. 제가 직접 가 봐야 하니까."주인이 답하지 못했다. 강무진은 답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았다.은매가 그 곁에 서 있었다. 손에 약봉지를 그대로 들고. 강무진이 그 봉지를 보았다."…그건 또 뭐냐. 손에 든 거.""약이요. 소인이 진짜로 지은 거예요. 아기씨 감기약인데, 온 김에.""약방을 잡으러 와서, 약을 지었다고. 네가.""잡으러 왔다고 안 지으면요, 아기씨가… 아기씨 감기는 누가 봐요."강무진이 그 말을 곱씹었다. 곱씹다가, 아주 낮게 헛기침을 했다. 은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목에 뭔가 걸린 채로.*왕부로 돌아오는 길에 은매가 물었다."나리. 저기, 소인이… 잘한 거예요? 오늘.""잘한 건 잘한 건데, 어느 정도로 잘했는지, 그건 마마님이 정하신다.""그럼 나리는요. 나리 생각은."강무진이 걸음을 늦췄다."나는… 약. 약 지은 게 좋았다."은매의 걸음이 잠깐 빨라졌다. 앞서 걷느라 얼굴을 안 보였다.*종친부 앞마당에, 그 약방 주인이 세워졌다.배중곤이 원로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삼황자부 문 앞에 서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위명서는 북영에서 돌아와 그 자리를 보았다. 열두 살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름을 물은 적이 없었다. 호위, 라고만 불렀다."…호위는.""이틀째 안 보입니다. 이틀째요."내관이 답했다."어디 갔느냐.""…모, 모릅니다. 삼전하께서 북영에 계신 동안 상단 사람이 몇 번 들었는데, 그 뒤로는 그만."위명서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이 집에서 처음으로 저를 보았다.*처소 창고 문 앞에서, 그는 멈췄다.어릴 적부터 열어 본 적 없는 문이었다. 어머니가 채워 둔 것이라고만 들었다. 삼전하가 손댈 것 없는 살림살이라고. 그는 그 말을 곧이들었다. 곧이듣는 것이 편했으니까.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놋쇠에 다섯 잎.매화. 제 문양이었다.위명서는 그 자물쇠를 만지지 않았다. 만지지 않고, 돌아섰다.돌아서다가, 다시 멈췄다. 창고 앞 흙에 발자국이 있었다. 제 것이 아니었다. 상단 사람의 신발 자국. 그리고 그 옆에, 가마꾼의 것. 북영에 있는 동안 이 문 앞에 가마가 섰다."내관.""예, 삼전하.""내가 없는 동안 가마가 왔느냐. 이 문 앞에.""…자녕궁에서, 예. 마마께서 삼전하 살림을 살피신다 하시고요.""병중이신 분이.""…예."내관이 답을 늦게 했다. 늦은 답을, 위명서는 처음으로 놓치지 않았다.*주란이 회랑에서 그를 보았다."삼전하. 창고 앞에 계셨지요?""지나는 길이다.""지나는 길에 서 계셨어요. 오래요."위명서는 답하지 않았다. 주란도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스치면서, 아주 낮게 말했다."…물어보세요. 누구한테든."*말은, 그 길로 왕부로 갔다.이번에는 대문을 두드렸다. 청아가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그 얼굴을 보고 굳었다. 방어멈이 뒤에서 소리쳤다."밖에서 오는 사람은 마당에서 돌려보내라 했지! 누구야, 또.""어멈, 삼전하세요. 삼전하."방어멈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마당에 세워라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